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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끊어진 보복의 사슬 (행 7:54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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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54-60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보복전을 보고 있노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팔레스타인 사람을 죽여 복수를 합니다. 팔레스타인이 다시 보복을 하고 이스라엘도 반격을 합니다. 복수의 사이클이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복수의 사이클이 언제 끊어질지 참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언젠가 이스라엘 대사가 제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이 복수의 사이클을 끊으려 합니까?” 그 대사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이스라엘은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인구는 다 합쳐야 500만 명밖에 안됩니다. 서울 인구의 절반도 안 되지요.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랍인들은 수십억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여섯 번을 져도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한 번만 져도 그것으로 완전히 끝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은 단 한 번이라도 질 수가 없습니다.” “We cannot afford.” 한 번 지면 끝이니까 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구가 적은 우리 유대인 한 명이 죽는 것은 아랍인 천 명 죽는 것과 맞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죽게 놔둘 수가 없습니다. 아랍국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데 그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58개 아랍 국가 중에 이집트만이 유일하게 우리와 교류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수십 년 동안 노력한 결과입니다. 얼마 전에는 요르단과도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습니다만 그 외의 다른 나라들은 아직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서 우리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을 원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죽여 없애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아랍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면 우리는 반드시 그에 대한 보복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남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아, 이 복수의 사이클은 계속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이 복수가 끝날 것인가? 언제 평화가 올 것인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복수의 사이클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끊어져야 되는데 잘못하면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의 문제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상처를 입으며 살아갑니다. 서로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우리 속에서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오르기도 합니다. 복수를 하고 싶은 본능 때문에 말을 받아치기도 하고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고 쟁반을 부수기도 하면서 우리의 아픔을 표현하지요.

  평화에 대한 관점도 우리 기독교인과 모슬렘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 년 전에 이란에서 열린 평화대회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기독교와 모슬렘 지도자들이 “어떻게 해야 세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나?”하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했는데 모슬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 주장을 합니다. “Peace with justice” 정의 없이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정의만 가지고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갚는 것이 정의인데 이 세상에 완벽한 정의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의를 요구한다면 복수의 사이클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복수의 사이클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사랑과 용서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복수의 사이클을 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해치고 죽이는 사람들에 대해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심으로써 복수의 사이클을 끊으셨습니다. 그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타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원수 맺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끊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안주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스데반이 첫 번째 순교를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도 복수의 사이클을 끊었습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용서와 사랑의 마지막 기도를 통해 복수의 사이클을 끊고 돌아가셨습니다.

  왜 이 땅에서 정의가 이길 수 없습니까? 완전한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사람이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정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싸움을 잘 하지 않았는데 한 번 싸운 적이 있어요. 초등학교 때 축구를 하는데 제가 공을 이미 다른 곳으로 보냈는데 친구가 발로 제 정강이를 정면으로 걷어찼습니다. 너무너무 아팠지만 예수님이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주라”고 하신 말을 기억하고 참았지요. 그런데 몇 달 지나서 또 축구를 하는데 그 때도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그 친구가 또 정확하게 제 정강이를 차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정의를 행사했습니다. 정의를 행사하려면 제가 그 친구의 오른쪽 정강이를 그 친구가 찬만큼 차야 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먹으로 그 친구의 눈을 때렸습니다. 그 친구가 그 자리에서 퍽 꼬꾸라져서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겁이 난 저는 도망을 갔지요. 다음날 학교를 갔는데 그 친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2주정도 학교를 나오지 못했어요. 눈에서 먹물이 나왔다는 거예요. 정의가 과해서 불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한 정의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정강이는 정강이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대응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누가 내 이를 하나 깨뜨렸다면 정의는 상대방의 그 이만을 깨뜨려야 하는데, 화가 나서 주먹으로 치는 바람에 이 두 개가 깨졌다면 그것은 불의입니다. 불의를 당한 사람은 한이 맺힙니다. 속이 상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상처가 납니다. 또 심하게 대응하면 대응하는 사람에게도 죄의식이 생깁니다. 제가 그 때 친구의 눈을 때리고 얼마나 죄의식을 가졌으면 환갑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그 생각이 나겠습니까! 제가 너무 심하게 정의를 행사했기 때문에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여러분과 저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행한다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주먹질을 하고 욕을 합니다. 정의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서로 계속 불의를 행합니다. 그래서 상처가 깊어지고 힘들고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20년 전의 잘못까지 들추어서 속상하게 만듭니다. 부부 싸움할 때 많이 그러잖아요. “왜 그 이야기를 또 꺼내?” 우리가 불완전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정의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씀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완벽한 정의를 행하실 테니까 정의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어주고 끝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에 ‘제자’라고 한 것은 누구의 제자를 말합니까? 제자에게는 스승이 있습니다. 그 스승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과 가르침과 행하신 일을 알고 그대로 본받아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좋은 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 보이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면 이런 복수의 사슬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가슴은 멍들고 한이 맺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본받기 때문에 스데반처럼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적을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충만케 하시고 도와주시지 않고는 복수의 사이클을 끊을 수 있는 재주가 도무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나를 해쳤는데, 나에게 악을 행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선으로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함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에 계신 성령님, 내 안에 계신 성령님,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여 나를 충만케 하셔서 나를 완전히 지배하여 주옵소서. 내 생각과 내 마음, 내 태도, 내 감정, 내 행동, 내 인격을 완전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충만은 한번의 경험이 아닙니다. 계속적인 반복적 경험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제가 현재명령형입니다. 현재명령형이라는 것은 반복형입니다. “성령이여, 내 마음을 주관하시고 내 생각과 태도와 말과 행동과 감정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반복해서 기도할 때마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냥 인간 나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죄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용서해주고 싶지도,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여러해 전,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어느 한국 사람이 비자를 안 받고 여행을 하다가 저희 동네에 주저앉았습니다. 불법체류자니까 가족을 데리고 올 수도 없고 무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일단 나가면 못 들어오기 때문에 10년 동안 숨어서 작은 가게를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 휴일도 없이 10년간 쉬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드디어 10년 만에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너무 좋았지요. 드디어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을 전부 다 초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만날 가족들을 기다리던 어느 날 흑인 두 명이 들어와서 권총으로 그 사람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제 곧 가족을 만나는데 흑인들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분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를 치러 줄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인회에서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께서 장례식을 좀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장례식을 맡았습니다.

  장례식 날, 아내와 다른 자녀들은 오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음직한 나이의 큰아들만 왔더군요. 너무 기가 막히지요. 온 가족이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었으니! 그 아들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너무너무 불쌍해서 제가 그 아들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해 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아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TV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살인자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온 도시가 술렁였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예수 믿는 한국 사람이 자기 아버지 죽인 살인자를 용서했다!”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인터뷰 때문에 예수 믿는 한국 사람들이 온 동네에서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막 제자가 된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줄 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4년 전쯤, 제가 한국의 한 신학교 졸업식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졸업식을 마치고 나니까 누가 와서 “목사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하는 겁니다. “글쎄요.” “20년 전에 미국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 아들이 바로 접니다.” 그 아들은 지금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원수를 용서해줬던 그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신학교를 갔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도와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여러분과 영원히 같이 계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이 구할 때마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능력으로만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여, 나를 오늘도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이여, 오늘도 나를 지배하여 주옵소서. 성령이여, 이 문제도 주님께서 간섭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지혜가 충만”(행6:3)하고 “믿음이 충만”(6:5)하며 “복종”(6:7)하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6:8)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에 충만해서 살면 나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할 수 없었던 것도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성령 때문에 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기적은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과거에는 내가 용서할 수 없었는데 이제 용서할 수 있으면, 그를 위해서 기도할 수 없었는데 기도를 하면, 그를 위해서 축복할 수 없었는데 축복을 하면,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들을 체험하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우리의 표정마저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상마저도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6장 15절에 보니까 고통을 당하고 순교자가 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환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충만해지면 영성이 발달되고 영이 열려서 영의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육신을 갖고 이 땅에서 사는 인간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영의 세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성령이 충만하여 영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세계가 보이고 하나님의 세계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장례식에서 이런 기도를 하지요. “하나님, 유족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어머니께서 벌써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예수님 앞에 서 계신 것을 영의 눈으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영의 눈이 밝아지면 영적인 것을 볼 수 있고 영적인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언젠가는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태어날 때는 차례대로, 나이별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는 나이가 상관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먼저가기도 하고 젊은이들이 먼저 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늘 성령께서 나를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날 때 영의 눈이 열려 우리를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두렵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설령 죽음이 내 눈 앞에 있어도 성령이 충만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고 저 천국이 보여서 기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처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기 원수를 용서합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에 대해 너무 화가 나서 이를 득득 갈면서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때렸습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그들에게 스데반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 주 예수여!” 예수님을 두 번이나 불렀습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주님을 불러야 악을 선으로 갚을 수가 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축복했습니다. 죄의 사슬을, 복수의 사슬을 어떻게 끊습니까? 악의 사슬을 어떻게 끊습니까? 성령이 충만해서 주님을 부르면 복수의 사슬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의 인생은 끝났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다 연약하고 부족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나라는 나라대로 서로 전쟁을 하며, 기업인들과 고용인들도 갈등을 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갈등을 합니다. 친구와 친구 사이도 갈등을 합니다. 사람은 연약해서 서로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삽니다. 만약 여러분이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면 너무도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우리도 모르게 상처를 주고 삽니다.

  마음의 분노는 그것을 터뜨린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노를 해결하려면 성령의 도움으로 분노의 사이클을 끊어야 합니다. 분노가 밖으로 터질 때도 있지만 때로는 속으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얌전한 사람일수록 속으로 들어갑니다. 속으로 들어간 분노는 나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우리가 날마다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체험함으로써 악과 싸워 반드시 선으로 이기며 예수님처럼 용서와 사랑으로 승리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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