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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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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군복무를 마친지 어언 30년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 반공정신이 고조되면서 남한에는 좌경세력도 간첩도 맥을 못추는 줄 알았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역사의 패자로 확정되었습니다. 탈북자들의 소름끼치는 증언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누가 공산주의를 더 이상 찬양하겠느냐는 저의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좌경세력을 다룬 책들이 더 이상 활용가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책들은 그때보다 지금을 위해 준비된 책들이라는 것이 솔직한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북한 공산주의를 연구한 책들의 먼지를 털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북쪽을 사모하고 동족애를 가지고 손을 뻗쳐 본들 북쪽의 계산은 내 생각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역사의 교훈입니다. 언제 우리는 동상이몽에서 깨어날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한 교회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에는 목사가 30명, 교직자 300여 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기독교 신자가 1만 2천 3백 43명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사실은 지난해 말 일본에서 열린 제 7차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남북 기독자회의에 참석한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 강영섭 위원장이 밝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강위원장은 북한 교회 현황에 대해 이같이 밝히면서 북한 전역에는 예배당 없이 일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정교회가 5백여 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기독교인은 대부분 해방 전 교회를 다니던 노인 성도들이라고 전했습니다. 또 강위원장은 평양신학원은 지난 72년부터 92년 까지 7기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잠시 중단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99년 9월부터 다시 개원했다고 했습니다. 현재 13명의 학생들이 목사 양성수업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주로 남쪽 목회자들의 설교 테이프 등이 이들을 위한 좋은 자료로 활용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설교 테이프 등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의 증언이 사실 이하라고 해도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편하고 쉬운 것이어야 경쟁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활방법을 편리한 것만 생각하다보니 피상적인 사고방식이 현대인들을 깊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의상이나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우리의 행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의식구조는 깊이가 없고 얕아져 버렸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편한 것을 추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름이면 더욱 시원한 예배당, 겨울이면 좀더 따뜻한 예배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부담 없는 설교 듣기를 좋아하고 편한 교회생활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고행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좁은 문에 해당하는 스테네스(στενη?)는 14절에서 테들림메네(τεθλιμμενη)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들맆시스(θλ?ψι?)로 고난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정문, 곧 바른 문입니다. 성경은 이 좁은 문을 들어가기 위해 차라리 금욕과 희생과 겸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또한 이 좁은 문은 생명과 희열이 있고 그 문을 통과하면 영생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Ⅰ. 이 문은 고난의 문입니다.

1) 북한 사회민주당 조직과 순교
본문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945년 9월에 북한에서는 기독교 사회민주당이란 정당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정당의 이념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사회를 개량해 보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후 정당의 저변확대를 위해 일반인도 참여시키고자 사회민주당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사회민주당이 날로 지부결성과 조직으로 그 세력이 커지자 소련군은 여기에 탄압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이들은 소련이나 함경도에서 공산당을 데리고 와서 불량배들을 매수하고 노동자들과 군인들을 충동하여 사회민주당과 대항하게 했습니다. 1945년 11월 16일에 용암포에서 열린 사회민주당지부 조직대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용암포에 있는 공장직공들을 충동질하여 대회장을 습격하고 간부들에게 폭행을 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장로 한 사람이 현장에서 타살되었고 교회당이 파괴되었습니다. 11월 23일 격분한 학생들이 공산당 본부와 인민위원회 본부를 습격했습니다. 이때 공산당원들은 어린 학생들을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 수십 명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2) 3.1절 기념행사와 순교
시간이 흘러서 1946년 3월 1일은 한국이 해방된 후로 처음 맞이하는 의미 깊은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 날을 특별 기념예배로 드리기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3ㆍ1절 기념행사에 모이는 인민대회로 공식 승인시킴으로써 교회에서 기념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의주동 교회에서는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때에 공산당들은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수천군중을 이끌고 교회로 달려들어 성경과 단상을 부수고 말았습니다. 사회를 하던 김석구(金錫九)목사를 끌어내어 우차에 싣고 극악한 문구를 써서 김목사 목에 걸고 시내를 일주하였습니다. 이후로 공산당은 본격적인 핍박을 가해왔고 예배당에서는 정치적 강연이 행해졌습니다.

3) 김일성 정부 총선거일과 순교
김일성 정부의 총선거일로 제정된 1945년 11월 3일은 주일이었기 때문에 교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했습니다. 그해 10월 20일에 북한 5도 연합노회가 소집되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북한의 2천 교회와 30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수호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다음의 다섯 조항의 교회행정의 원칙과 신앙생활의 규범을 결정, 실시 중에 있사오니 이에 귀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① 성수주일(聖守主日)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 예배 이외에 어떠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② 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③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④ 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경건한 결의문을 받은 공산당은 김일성의 비서이자 전직 목사였던 강양욱을 시켜서 박상순 목사와 부흥사로 유명했던 김익두 목사를 설득시켰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대부분 여기에 응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총선거에도 가담하지 아니했고 종일토록 교회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채 순교를 각오했습니다. 나중에 김익두 목사는 기독교 연맹에 실망을 하고 고향인 선천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미 그때는 자기의 탈퇴를 성명하기에는 늦었습니다. 그 후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공산당은 김익두 목사를 총살시켰습니다.

4) 신의주지방 교역자들의 수난
선거에 참여하지 아니한 신의주 지방교회 교역자 40명을 도 당국에 불러 모으고 심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선거를 하지 아니했느냐고 묻자 교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날은 주일이므로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과거 일제 항쟁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 자유를 범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준수하면 우리나라가 축복을 받아 부흥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5) 신의주 견인동 교회의 수난
선거를 하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3차례에 박해를 가했습니다. 제 1차는 교역자들과 제직자들을 마을에서 축출하였습니다. 제 2차는 엄동설한에 알몸으로 축출하였습니다. 제 3차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도중에 습격하여 예배를 방해하고 교인들에게 온갖 잔인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6) 수송교회의 수난
공산당은 선거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젊은 교인 6명을 밤중에 호출했습니다. 고문 끝에 그들을 군중 재판에 회부하여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나체로 축출했습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 는 동절에 교회당을 찾아가서 간신히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손과 발과 온몸이 동상에 걸려서 오래도록 고생했던 참혹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또 용암포 지역 교인 중에 남편이 불응했다는 이유로 남편은 수감되었습니다. 부인은 그때 임신 만기에 있었으므로 보류되었다가 해산 7일 후에 속치마 하나만을 입혀 추운 동절에 축출 당했습니다. 산모는 15리나 되는 용암포읍에 소재한 교회당으로 걸어가서 겨우 죽음을 면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7) 손동인, 손동신 형제의 순교
이들은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이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부친이 옥중 생활하는 동안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사 참배하는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순결한 신앙생활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해방과 함께 손목사가 출옥을 하자 다시 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내사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형제는 공산당의 결점을 폭로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소위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동인, 동신 형제는 인민재판소에서 (문) 너희는 예수를 믿는 놈들이지 (답) 예 우리는 예수교인입니다. (문) 네 애비 애미도 예수를 믿지 (답) 예 아버지는 목사이십니다.
(문) 너희들은 학교에서 언제나 공산주의를 비난하지
(답) 예, 나쁜 것을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문) 무엇이 나쁘냐
(답) 하나님 계시지 않는 것이 나쁩니다.
(문) 이제라도 예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
(답) 예수는 나의 구주시요 나의 생명이십니다. 주를 버리면 우리는 정말 살수 없습니다.
(문)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지 어디 믿어서 잘사나 보자
1948년 10월 21일에 사형이 선고 되었을 때 형제는 서로 나만 죽이고 하나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그들은 둘 다 죽여 버렸습니다.

8) 기독교 연맹과 순교
1948년 가을 강양욱이 어용 기관인 기독교 연맹가입을 강요하기 위해 평양교회에 시무하는 이창환 전도사를 찾아왔습니다. 이창환 전도사는 가입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하고 무신론과 유물론에 근거한 공산주의자들의 앞잡이로 만들어진 마귀의 집단에는 가담할 수 없다. 기독교 연맹 가입을 권고하는 강양욱은 서기장이지만 목사인고로 목사로 상대하여 증거하는 바를 양해하라 ‘당신은 과거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니 죄가 아니라고 하여 많은 교인들을 미혹하여 타락시켰다. 지금은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여 많은 교인들을 공산당 앞잡이로 만드는 괴수이니 분명히 마귀 중 마귀’라고 하면서 속히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이때 지켜보던 교우들은 “왕 마귀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얼굴이 붉어 가지고 나가면서 나를 앞으로만 보지 말고 뒤로도 옆으로도 보아야 한다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면서 퇴장하였다고 합니다. 몇 시간 후에 이창환전도사는 내무서원에 체포되어 갔습니다. 가혹한 고문 끝에 사동탄광 강제 노동소로 끌려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추운 겨울날 물통 속에서 동사로 순교하여 따뜻한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1949년 12월 20일 순교자 이창환 전도사의 장례식은 남은 동역자와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지금 서울 동도교회 원로목사인 최훈 목사는 그때 친히 이창환 전도사의 수의를 입히고 시신을 안장시켰다고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Ⅱ. 이 문은 찾는 이가 적은 문입니다.

본문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1) 6ㆍ25사변과 순교
6ㆍ25전쟁은 김일성 집단이 저지른 우리 민족의 비극입니다. 전범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외 없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메시야니즘(Mesianism)입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독재자들은 한결같이 자기만이 의롭고 정당하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들은 잘사는 세계, 더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무성한 장미 빛 약속을 제시합니다. 동족상잔의 6ㆍ25는 세계사에 길이 기록될만한 극동 아시아에 일어난 큰 사건이었습니다. 동족끼리 밀고 밀리던 와중에 얄타에서 모인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남북으로 국토를 갈라놓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민족양심에서 볼 때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철저히 유린당한 것입니다. 더욱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입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교회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필요한 암적인 존재였습니다. 1950년에 이르러 북한에는 기독교 연맹총회의 간부 이외의 교역자들은 대부분 투옥되었고 많은 교역자들은 남한으로 내려오거나 숨어버렸습니다. 1950년 공산당이 남침하기 직전에 그들은 기독교의 철저한 소탕을 획책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검거하고 교회 건물은 공산당이 사용하겠다고 전부 징용하였습니다. 연합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이들은 그들의 조직과 군수물을 예배당 안에 대피시키는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이유는 예배당 표식이 있으면 연합군이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ㆍ28 수복과 함께 연합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공산당은 후퇴 직전에 예배당을 불사르고 남아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을 거의 다 학살하였습니다. 연합군이 평양에 진주해 보니 교회는 공장으로 변해 있었고 목사나 교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평양을 방문한 교회 방문단 일행이 교회를 일일이 심방한 결과 평양 시내교회는 일제히 문을 열었습니다. 그날 오후 2시에는 3천명의 교인이 서문밖 교회에 모여서 합동예배를 성대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합세하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남한의 국민들은 공산당 정부의 다스림을 직접 받아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원들의 감언이설에 많은 사람이 미혹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지방을 점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7년 동안 옥고를 겪었던 손양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에 공산당들에 의해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두 아들을 먼저 앞세운 채 순교 당하였습니다.

(2) 강원도 지방의 순교
1951년 1월 28일 세칭 암소고개에서 서기훈 목사와 함께 10여 명이 총살되었고 1950년 6월 24일에 납치되었다가 후퇴시 총살당한 조춘일 목사도 있었습니다.

(3) 공민증 거부와 순교
부산 송도교회를 시무하는 조성권 목사 증언에 의하면 공민증은 공산당의 신분증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 증이 없으면 통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품 매매가 불가능했고 제반배급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반역자로 몰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공민증을 짐승의 표라고 하는 교인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극악한 고문 끝에 순교 당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중에 사리원 교회를 시무하던 안제복 전도사가 있고 평양교회에 이의실 집사(장로부인)를 비롯하여 23명이 평양 공동묘지에서 순교당했습니다.

(4) 봉남리 교회의 순교
전남 영광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때 봉남리교회 김방호 목사의 가족 8명, 노병제 장로 가족 13명, 김종인, 원찬권 목사 등 교직자와 성도들을 합해서 73명이 순교했습니다.

(5) 영암교회 24성도의 순교
영암에서 퇴각하는 인민군이 20일간이나 머물면서 100명을 죽였습니다. 그중 김동흥씨를 위시한 24명의 성도들이 순교했습니다. 지금 영암교회에는 24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가 있습니다.

(6) 충남 강경교회의 순교
충남 강경교회 이종덕 목사는 6ㆍ25때 공산당들에 의해 총살당했습니다.

(7) 충남 예산 삽교교회의 순교
예산 삽교교회 독복일 목사는 1950년 9월 20일에 공산당들에 의해 검거되어 총살당했습니다.

(8) 경남 거창 배추달 선생의 순교
경남 거창 배추달 선생은 주일에 인민군에게 점심 제공을 거절한 것이 이유가 되어 총살당했습니다.

(9) 선교사들의 희생
6ㆍ25사변 중에 선교사들은 교역자와 성도들을 초교파적으로 구호하는데 성의를 다하였습니다. 200여명의 가족들을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키고 본국에 호소하여 구호물자와 의연금을 얻어 구호했습니다.

(10) 교회가 받은 인적, 물자적 손실
6ㆍ25 동란 동안에 받은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 교회의 경우도 신자 반수이상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서울중앙 기독 청년 회관과 성서공회 및 대한 기독교서회와 같은 건물과 서적 비품들이 모두 타버렸습니다. 지금은 복구되었으나 세브란스 병원 건물과 시설도 손실을 입었습니다. 지면상 기록하지 못하는 순교의 사건들은 차등을 두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지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Ⅲ. 이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문입니다.

본문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이 문으로 가는 자는 숫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외로운 길입니다. 이 문은 영생의 문이요, 구원의 문입니다. 창세전부터 영생을 소유한 자가 들어가는 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ㆍ25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사자가 17만 8,000여명이었습니다. 부상자 55만 5,000여명 실종 및 포로는 4만 2,000여명이었습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사망 66만 명 부상 80만 명 실종 및 포로는 13만여 명이었습니다. 남북한 민간인 250만이 사살되었고 피난민 32만 명 전쟁고아는 10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6ㆍ25는 3년 동안에 300만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월남전은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도 180만 정도가 죽은 셈입니다. 그럼에도 월남전은 월남의 폐해를 전 세계에 고발하는데 성공했지만 6ㆍ25는 세계 어느 한구석에서 벌어진 사소한 전쟁 정도로 묻히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인민대중을 위한 역사라는 미명아래 국민들을 전체주의 기반으로 유도했습니다. 반면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복지를 극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첨단과학 문명 속에 사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성경말씀은 대다수의 현대인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간단한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지 않고 구태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절대로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아니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들은 자기의 힘이 있을 때 자기의 부인이나 찾아가는 이도령적인 삶을 산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또한 안나스의 종같은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이 좁은 문은 하나님의 문입니다. 구원의 문이요 영생의 문이요 생명의 문입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좁은 문을 통과하는 고난의 현장을 절대 가치 없는 것으로 보지 아니합니다. 성도들의 생활이 권선징악이라는 보편적인 주제 앞에 용기를 얻음도 아닙니다. 이들은 어떤 이해관계에서 행동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이들의 행위는 오직 신앙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진리 앞에 고난을 양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이가 적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면 좋은 길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길이 협착하기 때문에 호신주의와 기회주의와 이기주의와 현실주의가 합창하는 지금은 찾는 이가 더욱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문으로 자랑스럽게 들어간 순교자들의 값진 피 앞에 정직해져야 할 것입니다.

평양 6ㆍ15 통일 대축전 참석차 방북했던 유홍준 문화재 청장이 ‘이름 없는 영웅들’이란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의 주제는 6ㆍ25때 남파 간첩을 예찬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놓고 정치인들은 양자구도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유청장은 대한민국의 고위공작자로서 선곡이 잘못되었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칼빈은 “경건한 자들의 비참함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보다 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데 주저하지 말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앞서간 선배들의 영예로운 신앙의 길을 따라 갑시다. 역사는 도도히 흐르고 시대는 변합니다. 지난 역사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는 이때에 그 많은 혼란과 시련은 우리의 값진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한꺼번에 목숨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한 방울 한 방울의 피를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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