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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립 서비스(Lip Service) (마 1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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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입술 신앙과 마음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에서 병을 고치고 계실 때(14:34-36),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2)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되었던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30:17-21절을 보면, 회막에 들어갈 때 물로 씻도록 한 규정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제사장에게 적용되는 손 씻는 규정을 일반 음식 먹는 일에까지 확대 하는 규례를 만들어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전을 모세 오경과 동일한 권위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어떤 랍비들은 오히려 장로들의 말을 율법과 선지자의 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그들이 모든 구전에 대해서 철저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충 지키는 구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 씻기 구전만큼은 열심히 지켰습니다. 손 씻는 방법도 특이했는데, 손을 팔꿈치보다 조금 높게 들어서 물이 팔꿈치로 흘러내리도록 했습니다. 이는 손 씻은 때 국물이 물이 손가락으로 흘러내리면, 그 손가락으로 음식 먹는 것이 부정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손이 더럽지 않아도 밥을 먹기 전에는 언제나 손 씻는 결례를 습관적으로 행했습니다. 그들의 유전에 의하면, 쉬브타(Shibta)라는 악마가 사람들이 잠든 동안에 사람들의 손 위에 올라앉는데, 만약에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에 손대면 악마가 그의 음식에 옮겨 와서 그 음식을 위험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반면 손 씻는 규례를 행하면 부정함을 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왜 더러운 손으로 먹느냐는 ‘청결’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 장로들이 정한 ‘규례’를 어겼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은 종교적으로 심각한 범법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3) 예수님은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범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장로들의 유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중요하게 여기는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만일 어떤 종교적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게 만든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악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는 한 가지 사례를 지적하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장로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바리새인들의 한 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4-6)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즉 ‘고르반’되었다고 말하면, 비록 그 물질을 여전히 본인이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 물질로 부모 공양해서는 안된다는 이상한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드리려고 생각했던 용돈이 그만 고르반 되었네요’라고 말한 후에는 아버님께 그 돈을 드리지 못하도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어떤 계획을 세울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잠 16:9). 하나님께 드리려고 계획했다가도,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부모님을 섬겨야 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님 여행시켜 드리려고 모아둔 물질이나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던 물질을 헌금하게 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헌납하겠다는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마땅히 해야 할 자기의무를 회피하려는 목적의 ‘기만적이고 가식적 행동’에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7-9). 바리새인들의 그런 규례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입에 발린 말(lip Service)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할렐루야’ ‘아멘’ ‘주여’가 입에 발린 신자들이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아멘’은 진실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주’라는 것은 정말 내 삶과 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이 담긴 호칭입니다. 그러한 용어들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접하며, 마음으로부터 주님께 순종하려는 태도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단지 입에 발린 습관성 감탄사라면 그야 말로 헛된 경배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일한다는 명목을 내세웁니다. 신자라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가끔 마땅히 해야 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고도 그런 수식어로 핑계하는 뻔뻔한 외식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가족을 돌볼 책임을 재대로 이행하지 못하면서도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이 사는 사람, 함께 하나님 일하자고 불러놓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고용주, 직장업무를 성실히 하진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느라 그랬으니 괜찮다는 고용인, 하나님의 일에 헌신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는 학생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참된 신자라면 그런 경우에 죄송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외식자는 뻔뻔하게 변명하고 자기를 합리화할 뿐입니다.

‘고르반’ 규례는 장도들의 유전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치도록 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명백하게 어기면서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 경건하고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고 잘못 느끼게 하는 이상한 규례였습니다.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은 자꾸 세부적인 규례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쁜 의도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규례를 세울 때 가졌던 의미와 목적들은 사라지고 단지 규례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 규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왜곡하고 변질되게 합니다. ‘규칙’이 많아질수록 ‘원칙’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는 길선주 목사님의 자발적인 새벽기도에서 시작되어 한국 교회의 좋은 전통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 때문에, 새벽 기도와 말씀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바른 신자가 아니라고 비판한다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전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전통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통이 된 종교적 활동 자체가 사람을 경건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해서 변화되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의 태도가 없다면, 그 전통은 본질을 잃어버린 껍데기가 됩니다.

월드컵 경기 때 ‘내가 보기만 하면 진다’는 징크스(jinx, 불행을 가져오는 것)를 가진 사람들이 눈가리개를 하고 응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새벽 기도하지 않으니까 왠지 하루가 찝찝하더라는 징크스 때문에, 주일예배 빠지니까 꼭 무슨 일이 생기더라는 징크스 때문에, 십일조 하지 않으니까 꼭 그 이상의 돈이 들어가는 사고가 생기더라는 징크스 때문에 종교 활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헛된 경배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부적인 종교 활동들 중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런 일들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임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11). 겉으로 드러나는 세세한 형식보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상태가 중요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바리새인들의 신경을 자극한 것이 염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유전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이므로 “뽑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3).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 자처하고 있지만 사실 정작 본인들도 마땅히 보아야 진리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 하셨습니다(14). 인간의 전통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뽑아내실 것입니다.

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18).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별됨은 형식적인 구별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활동 자체나, 십자가 목걸이와 차량 뒤에 물고기 같은 상징적 표식이 그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 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경건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 분의 역사하심을 통해 마음이 구별된 결과로 자연스럽게 그 삶의 모습이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마음속에 온갖 악한 생각과 죄악들로 시궁창 같으면서(19-20),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활동에만 열심이라면 그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입술은 존경하되 마음은 하나님께 먼 립 서비(Lip Service)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씻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성령으로 지켜주셔서,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섬기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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