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3) (창 29:15-20)

  • 잡초 잡초
  • 257
  • 0

첨부 1


요즘 저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속적인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들의 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하여 시작한 설교입니다.

오늘은 야곱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데 그 주인공의 하나로 야곱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과연 야곱을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은 악착같은 사람,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형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까지도 속이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야곱에게서도 우리가 본 받아야만 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근사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더 은혜스러운 일 이었습니다. 흠이 없고 완벽한 사람이 아닌 흠이 많고 연약한 인간에게서도 근사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참 희망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다음과 같은 면은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본 받아야만 할 근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저는 지혜를 분별력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요,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을 때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옵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기가 졌던 에서는 야곱에게 팥죽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때 야곱은 형 에서에게 흥정을 합니다. 장자의 명분과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형의 다급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챙기려고 하는 얍삽함이 거슬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면을 좀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야곱이 장자의 명분에 대한 집착이 강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당연히 에서는 그와 같은 흥정을 거절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배가 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 버립니다. 하나님을 그것을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평가하십니다. (창25:34) 다시 말하면 에서가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다라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 9:10)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홀히 여김이 어리석음의 근본이 될 것입니다. 야곱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많은 야곱의 약점을 다 커버합니다.

우리의 대부분은 대개 다 에서 같습니다. 보통 때는 주여, 주여 하지만, 솔직히 하나님을 팥죽 한 그릇 값도 안 처 드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김에서 오는 어리석음처럼 인간을 바보스럽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야곱처럼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만큼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히 여겨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늘 지혜 있는 자와 같아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랑과 사람의 가치를 앎입니다. 저는 야곱의 이야기 중 오늘 본문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수일처럼 여겼다는 말씀이 특히 좋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라헬과 결혼하고 싶어 했습니다. 라헬이 아버지도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대신 라헬을 위하여 칠년을 일하라 하였습니다. 야곱이 약속을 하고 사랑하는 라헬을 위하여 칠년을 봉사하였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을 수일처럼 여기며 일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처음에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우리의 상식과 반대되는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표현대로 표현하자만 수일이 칠년 같았어야 합니다. 라헬을 사랑하여 기다리면 시간은 더 더디 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칠년을 수일처럼 여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너무 사랑하여 칠년 봉사의 대가를 크게 생각하지 않고 수일 봉사의 대가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칠년을 봉사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 ‘약속’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의사와 조폭 두목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영화입니다. 조폭 두목이 자기 부하가 어떤 조직의 테러로 숨을 거두게 되자, 복수를 해 주기 위해 그 조직의 두목과 조직원 몇 명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그 두목의 죄를 부하가 자진해서 대신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어느 날 그 두목이 자기 대신 사형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고 있는 자기 부하를 면회 갑니다. 그때 참 근사한 대사가 나옵니다. 그 대사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장님은 제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사장님에게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두목에게 반듯하게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합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자기 대신 부하를 죽일 수 없어서 모든 범행의 증거들을 가방에 챙겨 들고 자수하러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다며 자기 대신 죽으려는 부하를 살리기 위하여 죽을 자리를 향하여 가는 그 장면을 보며 저는 너무나도 근사해서 또 울었습니다.

제가 설교 중에 자주 인용하는 시 중에 함석헌 선생님의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리 길 떠나는 길 처 자식 내 맡기며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대목이 참 좋습니다.

자기 생명처럼 귀히 여길 사람이 있는 사람이 참 근사한 사람입니다. 그냥 덕보고 신세지고 서로 적당히 이용해 먹으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알아, 귀한 사람이 있어 칠년을 봉사하고도 수일 밖에 봉사하지 않은 것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람은 근사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야곱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셋째, 성실함과 책임감입니다. 창세기 31장에 보면 야곱이 라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한 말이 나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 31:38-40)

사람들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싶어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의 명분을 사들이는 모습만 보고, 간사한 사람 또는 약삭빠른 사람으로만 생각하지만, 야곱의 인간됨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말씀 중에 하나가 저는 창세기 31장 38절 이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31장에 의하면 야곱은 성실한 사람이며, 책임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책임감이 있고,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성실하지 못하고 늘 핑계하고 탓만 하는 사람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지금도 그와 같은 프로그램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 보니 ‘쪽박 집과 대박 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같은 업종의 음식점인데 어느 집은 손님이 많아 늘 북적거리는 대박 집이고 어느 집은 손님이 없어서 파리 날리는 집입니다. 대박집의 노하우를 전수하여 쪽박 집을 대박 집으로 바꾸어 주는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박 집이 대박 집이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가게 인테리어도 달랐고, 몫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대박 집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과 끈기 그리고 성실성이었습니다. 대박 집 사장은 작은 음식을 하나해도 대충하는 법이 없었고, 모두가 다 작은 일에도 생명을 건 사람처럼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박 집이 그냥 재수가 좋아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형교회니까 되고 소형교회니까 안 된다.’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형교회를 탓하고 소형교회를 변호 또는 변명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대형교회들이 자기 교회만 생각하고 작은 교회의 입장이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이 소형교회들을 도와 저들을 키우는데 관심이 전혀 없고 계속 자기 교회만 키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계속해서 자기 교회만 키우려고 하는 일을 어느 순간 포기하고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가 되어 자기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들을 키우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직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그럴 만큼 큰 교회는 아니지만 방향을 그 쪽으로 잡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을 실천하려고 우리 노회의 큰 교회 목사들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서 의논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들이 노회비 외에도 예산을 좀 더 모아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작은 교회를 일년에 몇 교회씩 선발하여 예산도 몫 돈으로 지원하고, 목회 프로그램도 지원하여 작은 교회를 키우는 일을 하자고 결정도 하였습니다. 아주 근사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대형교회의 그와 같은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대형교회니까 되고 소형교회니까 안 된다.>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무조건 대형교회를 비판하고 소형교회의 문제를 대형교회에만 전가하려고 하는 태도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대형교회들이 처음부터 대형교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대형교회와 그 교회의 목회자들도 처음에는 다 작은 교회였고 작은 교회의 목회자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대형교회니까 되는 줄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되니까, 다시 말하면 되게 하니까 대형교회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대형교회 때문에 목회가 어려워졌다고 하여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자기에게서는 어떤 문제도 찾아 내지 못하고 핑계만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 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남의 탓 하지 아니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발버둥질 치는 사람은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일어서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야곱은 이십 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양을 쳤는데 암양이나 암염소들이 한번도 낙태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속된 말로 졸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자신의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표현해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자신의 말과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참 근사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야곱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야곱만큼 근사한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야곱도 배가 고파 팥죽을 끓였습니다. 배가 고픈 것은 야곱이나 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당장 팥죽 한 그릇이 더 중했고, 야곱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하나님의 축복이 더 중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우리도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그러나 배만 고프면 우리는 에서와 같이 당장 우리의 배를 채워 줄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칠년을 수일처럼 여길 만큼 사람을 귀히 여겼다는 것은 훌륭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칠년의 대가를 수일의 대가처럼 지불할만한 사람이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가족이 아닌 사람이라면 정말 훌륭할 것 같습니다.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짧은 인생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것은 억울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최소한 칠년은 살아 보았으면 합니다. 그 대상이 아내와 자손들만이 아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정말 근사할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는 그와 같은 사역을 하기 위하여 지금 희년 재단 (이름은 좀 바뀔 것 같습니다.)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시 소망을 주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려고 하는 희년 재단에 최소한 내 인생의 칠년을 투자하고 싶습니다. 칠년의 대가를 헌금하고도 그 일이 너무 좋아 수일의 대가를 지불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양도 아닌 외삼촌의 양을 치면서도 이십년 동안 양이나 염소가 한번도 낙태하지 않았다는 말은 참 충격적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도 중요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과 직장과 세상에서 자기의 일을 그렇게 성실하게 잘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과 이 설교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은 다 야곱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야곱 때문에 라반이 덕을 보았듯이 저와 여러분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보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핑계하고, 남의 탓을 할 시간이 있으면 더 기도하고, 더 노력하고, 더 연구하여 자신의 어려움과 어려운 처지를 극복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그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기에게 맡겨 진 일을 귀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귀히 여기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귀히 여기고 살면 정말 근사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 일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