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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찰하시는 하나님 (삼하 16: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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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동안 217차 미국 장로교 총회에 참여하도록 배려해 주신 교회와 기도해 주신 모든 성도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미국 장로교가 교인 감소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지역적, 세대적인 갈등과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의 안수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이나 한국을 막론하고 교회와 교인들의 역할과 사명이 중요한 때입니다. 많이 보고 느끼고 배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막은 불같이 뜨거웠으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목이 마르고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입니다.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죽는 편이 낫겠어요."
  "얘야, 조금만 더 가면 틀림없이 맑은 물과 마을이 나타날 거야. 힘을 내렴."
  그때 두 사람 앞에 커다란 무덤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더욱 절망해 울부짖었습니다.
  "이 사람도 우리처럼 죽은 거예요. 이젠 완전히 절망이에요."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들아, 무덤은 희망의 징조란다. 무덤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이다."
  과연 두 사람은 곧 마을에 도착해 안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 사막의 무덤 같은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것이 희망의 징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덤 너머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문제를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고난에 빠져 있는데, 그 고난을 비웃으며 비방하고 저주하는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마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불행하게도 다윗은 반역자에게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반역자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라는데 더 부끄러움과 서글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다윗은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설상가상으로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다윗이 부딪쳐 있는 상황을 비웃으며 저주하였습니다. 돌을 던지며 비방하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참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다윗의 모습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못 보는 작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감찰하시는 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본문 9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으로서 베냐민 지파와 가문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파인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됨을 시기하고 이제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이를 반기면서 다윗을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시므이의 극단적인 지파주의와 혈통주의자의 편협한 사상과 비참한 말로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문, 혈통, 지연 등 소아에 사로잡혀 대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표상으로 시므이를 들 수 있습니다. 시므이가 이처럼 다윗과 그 신복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까닭은 다윗이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불구자인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고 늘 식탁을 같이 하였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향하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라고 저주하였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아'라는 뜻입니다. 시므이의 욕설은 보통 사람이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독설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는 욕설이었습니다. 시므이는 지극히 감정적이고 무지에 근거한 욕설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 아비새가 '죽은 개'의 머리를 베겠다고 분노를 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개'란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죽은 개를 먹지 않습니다. 쓰레기와 거름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구나 분노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다윗은 분노와 살인을 지혜롭게 피하였습니다. 분노와 살인은 실패이며 죄악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버리고 살인을 피하였던 것입니다. 아비새와 다윗의 차이점을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의 도미타이누스 황제가 죽은 후(주후 96) 사도 요한은 밧모 섬의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에베소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자주 하는 설교는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였다고 합니다. 그가 몸이 불편하여 제자들이 부축하여 설교단 의자에 앉게 하면서 "선생님, 오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들려주십시오"하면 백발의 요한은 두 손을 들면서 "소자들아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쇼가 아닙니다. 행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신앙이고 삶입니다. 분노하는 사람이 지배하는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는 불행합니다. 분노하는 시므이나 아비새가 아닌 사랑이 넘쳐흐르는 다윗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10-11절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과 아비새와 요압의 생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시므이의 악독한 저주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회개하고 근신하는 자세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죽이려고 쫓아다니는데 하물며 베냐민 지파 출신 시므이가 다윗에게 저주 한 마디 한 것쯤이야 하나님의 징계치고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다윗의 신앙과 수용성은 참으로 크고 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하고 청결한 다윗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젊은이가 완벽한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불완전한 여성과의 결혼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완벽한 여성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완벽한 여성을 찾느라 일생을 허비한 후 피곤한 몸으로 귀가했습니다. 그 때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완벽한 배우자를 찾느라 평생을 허비했군. 이제 자네의 나이도 70일세. 그 동안 완벽한 여성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적이 있는가?"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완벽한 여성은 딱 한 사람 만났다네. 그런데 그 여자도 완벽한 남편감을 찾고 있더군. 결국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네."
  완벽한 사람들을 찾으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살아가는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지독한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서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워주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성도는 세상과 타인의 비방을 당할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더 가까이 나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남을 비방하고 탓하고 싸우는 어리석은 삶이 아닌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회개하고 경건하게 사는 다윗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다윗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돌아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축복을 구해야 합니다
  본문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다윗이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가의 피를 흘린 자라는 저주를 비난하거나 변명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수욕을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 상대가 아닌 언제나 하나님을 상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고 축복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현재 자기의 억울한 형편을 정확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위기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축복은 하나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서 죽었으나 다윗은 영육간에 놀라운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저주의 삶은 저주로 끝나지만 축복의 삶은 축복이 자자손손 계속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여자의 일생』을 쓴 프랑스 작가 모파상(1850~1893)을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모파상은 본래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퇴학당했습니다. 그는 신앙과 결별하기로 하고 자신이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 그는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 10년 만에 유명 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말에 그는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대저택을,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를 갖고 쉴 새 없이 애인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대중들은 그를 흠모했으며 그의 은행에는 넉넉히 쓸 수 있는 돈이 항상 있었지만 그는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1892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지만 인생의 의미를 잃은 그는 종이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합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이미 온전하지 않은 그는 정신 병동에서 몇 달을 알 수 없는 소리로 허공을 향해 절규하다가 겨우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무덤 묘비에는 그가 말년에 자주 외친 삶의 독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으나 실상은 가장 처절하게 가난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축복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잘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육과 현세와 내세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은 저주와 멸망과 지옥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어떠한 시련과 아픔이 있어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교만하거나 하나님을 떠나지 맙시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반드시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6.25 상기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과 전쟁에서 우리 민족을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분노를 버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누리는 성도와 가정과 교회와 민족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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