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잠잠하라, 고요하라! (막 4:35~41)

  • 잡초 잡초
  • 277
  • 0

첨부 1


  우리는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고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몹시 놀라곤 합니다. 작년 여름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즈 시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 허리케인 때문에 얼마나 극심한 피해를 당했습니까? 재산 피해만도 일천억 달라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또 인명 피해도 이천오백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초강대국 미국도 대자연의 가공할만한 파괴력 앞에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대체로 호수인 갈릴리를 왜 바다라고 부르는가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그 둘레가 약 18킬로미터에 불과하며 가장 먼 지점의 거리도 약 10킬로미터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평평한 수면 위로 맞은편을 보기 때문에 그 10킬로미터가 한 2~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릴리를 호수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조금만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지중해, 성경의 명칭으로는 대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를 ‘그 바다(the Sea)’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릴리를 그 바다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할 것 같으면 그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바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마도 전반적으로 거칠고 메마른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유일한 물, 그래서 생명의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갈릴리의 중요성을 바다에 비유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실제로 갈릴리 바다는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 위에 띄워지는 어부들의 생업 수단인 고깃배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고깃배를 타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광풍이 불어와서 그 작은 고깃배가 거의 뒤집혀서 침몰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양쪽으로 언덕이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사천 미터나 되는 높은 헐몬 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헐몬 산 꼭대기에서 찬 공기가 생기곤 합니다. 그리고 그 찬 공기는 낮은 계곡을 향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곤 합니다. 그럴 때 얼마나 그 바람의 힘이 센지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바람에 빨려 들어가곤  합니다. 바로 그 무서운 광풍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그 작은 고깃배에 닥쳤던 것입니다.

  바람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제자들이 이제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갈릴리 바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거센 바람이 분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들이 겪은 그 광풍은 어릴 때부터 그 갈릴리 바다에서 살아온 베드로나 야고보, 안드레나 요한도 도저히 살아날 수 없겠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무서운 광풍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광풍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인간의 힘과 능력, 수단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또 감당할 수도 없는 일들을 당할 때 두려워 떨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 두려움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두려움에 질린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외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듯이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시고 다만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바람과 바다도 거역할 수 없는 그런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마치 그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더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후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우리도 종종 인생의 바다 위로 불어오는 무서운 광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 바다는 우리로서는 아주 익숙한 삶의 자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도 어두운 밤 광풍과 노도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광풍, 노도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 세상에서 심한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이천 년을 볼 것 같으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참으로 억울하게 핍박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명 가운데 열한 명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만 유일하게 사형을 면했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말년도 매우 비참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거지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광풍, 노도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를 괴롭히지만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더 큰 아픔과 슬픔을 안겨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그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전혀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 그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삶을 사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를 믿음의 대장부로 세우고 싶어 하신다는 말입니다.

  가장 크고 화려하고 또한 가장 안전하다고 자랑하던 타이타닉 호도 빙하에 부딪혀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강하다고 자부하던 그 배는 결코 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타고 있던 그 작은 고깃배는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오히려 잔잔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광풍이 몰아치는 삶의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실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실 때 절망이 끝나고 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실 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함께하실 때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복의 역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아마 죄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선한 청지기로서 인간은 이 땅 위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삶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하실 때 모든 것이 변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때 모든 것이 채워지고 풍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었습니다. 패배가 승리로, 불안과 절망이 평안과 소망으로 변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그 무서운 광풍은 오늘 하늘의 평화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풍랑 이는 거친 바다가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믿음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소개하면서 제자도의 핵심이 바로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적인 제자의 삶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청됩니다. 아울러 믿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요청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이적은 원래 바다를 지배하는 악한 사탄을 예수님이 오셔서 무력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세계로 만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적입니다. 그런 이적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이적이 우리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오늘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한 여행자가 그랜드캐니언에 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굴렀습니다.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가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 줘요." 그러자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이다." "주님이 거기 계신다니 정말 기쁩니다." "내가 구해 주마.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넌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주님, 저는 매 주일 교회에 나갈 뿐 아니라 새벽기도회에도 나갑니다. 헌금도 제법 많이 합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가 정말로 날 믿느냐?" "제가 얼마나 주님을 잘 믿는지 모르실 겁니다. 저는 주님을 확실히 믿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네가 붙들고 있는 그 나뭇가지에서 이제 손을 떼거라." 그러자 그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이 없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심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과연 누구를 의지합니까? 과연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까? 혹시라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그 문제를 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변함없이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고 고요하게 만드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에게 닥친 거센 풍랑이 오히려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마음껏 누리며 끝까지 순례자의 길을 걷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