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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달픈 인생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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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불안과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고, 위로 받을 수도 없는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제가 무엇일까?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없는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평안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모든 삶의 역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붙들고 여호와의 신으로 생명마다 권능의 채움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재산이 많아야 합니다.  남들보다 명예가 높아야 합니다.  남들보다 가방끈이 길어야 합니다.  남들보다 키도 훤칠해야 하고, 외모도 잘 생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솔직히 그러한 것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던가요?  혹여 어떤 사람은 제게 이렇게 반문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목사님, 그런 멋진 사람하고 그런 좋은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그렇다면 돈 많고, 명예가 높은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왜 그렇게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 것입니까?
지금의 시대가 지나온 시대보다 환경이 못해서입니까?
지나온 시대보다 못 먹고, 못 살아서입니까?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에게 있어서 외적인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자세요 태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왜냐하면 모든 삶의 문제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지키십시오.  내 마음이 분노의 영에게, 미움의 영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 마음이 어둠의 영들에게 침탈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격동시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분노하게 합니다.  순간적으로 미워하게 합니다.  순간적으로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감사와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주장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도 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내 마음에 환경이 어떻게 할 수 없고, 사람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역경이 있습니다.  삶에서 곤고한 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늘 건강한 인격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생각하는 것들이 언제나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기를 노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코 환경을 붙들지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인간을 바라보지 말고 도우시고 힘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감정의 포로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십시오.  마음의 평화를 탐내십시오.  산과 같은 평정, 호수같은 안정을 사모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여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애굽의 종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남자아이를 낳으면 모두 죽이라는 애굽 바로왕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의 남자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시퍼런 애굽의 칼날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채 숨겨서 키워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도저히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드넓은 나일강에 조그만 운명의 갈대상자에 담겨서 방향 없이 떠내려보내야만 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모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드넓은 나일강에 조그만 갈대상자에 담겨서 방향 없이 떠내려가면서 울어대는 아이 모세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이 어린아이가 장차 히브리 역사에서 위대한 주인공이 되리라고 누가 과연 예견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부모가 예견했겠습니까?  그의 형제들이 예견했겠습니까?

그들은 이 아이가 하늘 아래 어느 곳에 있던 그저 목숨이나 부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이끄심은 참으로 놀랍고도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사람의 생명 속에 개입하는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인생의 혼탁한 강물에 떠밀려 가듯 우리의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사건이 우리들 속에 일어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조그만 운명의 갈대 상자 속에서 어린 모세가 한 일이라고는 앙앙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함께 하셨더니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건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형제가 친구가 사회가 버렸어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건져주시는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의 무능함에 좌절되지 말아야 합니다.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기력한 자에게 능력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아십니까?  성경은 놀랍게도 무능한 자들이 일으킨 역사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제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것 밖에는 정말 아무 재주도 없습니다."

오늘 이곳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키를 한 자나 더 크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을 하루라도 더 연장시킬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자녀들의 문제로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가 건강하게, 올바르게 자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것 같은데 실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십니다.  우리는 못할 일이 없고, 못 이룰 일이 없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 항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 항복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항복 이후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 항복은 자기 절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 포기는 약한 자의 한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더 큰 나를 창조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넉넉히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내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더 큰 일도 넉넉히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정을 살리고 가문을 살렸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민족이 일어나고 열방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마음에 긴장 대신 평안이 충만합니다.  겁쟁이가 어느 날 용감한 자로 거듭납니다.  피곤함이 즐거움으로, 지루함이 열심으로 바뀌어집니다.  불평과 원망이 감사과 고마움으로 바뀌어집니다.  미워하던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짐이 없었던 때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인생의 짐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고달프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아갑니다.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괴롭고, 권력자는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에게 괴로움은 떠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모세도 모든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

한 때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자신을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단 일주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저기 바닷가에 넘실거리는 물결은 세상 사람들의 눈물이요, 저기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로구나."

인생의 짐은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고 누가 대신 져줄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보채고 울기 시작합니다.  몸에는 열이 납니다.  숨을 할딱거리고 몰아쉽니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릅니다.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게 됩니까?  안됩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인생의 짐을 대신 져줄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어느 누구도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준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인간의 무거운 인생고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길이 없는 것입니까?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도 모든 인생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수고한다'는 말은 원문에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은 원문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고난을 겪는 그런 고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취하든지, 아니면 원하지 않는 고난을 받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수고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곳이 창세기에서 인간의 타락 직후입니다.  이때부터 수고는 인생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고민이 없겠지 하고 만나 보면 나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일의 고민, 자신에 대한 고민, 부모나 자식에 대한 고민, 부부간의 고민 ….

화려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고뇌하고 있습니다.  아십니까?  웃는 얼굴 뒤에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넓은 가슴속에도 홀로 가슴 치는 아픔이 있습니다.  인간 관계가 얽혀 그 갈등으로 영혼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저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고 그것이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인생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시고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앞에 오는 사람은 영원히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라는 말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 많은 사람만 오라.  무식한 사람은 저리 가고, 많이 배운 사람만 오라.  병든 사람은 물러가고, 건강한 사람만 오라.  양심이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만 내게로 오라"

그랬다면 오늘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솔직히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돈이 있든 없든, 무식하든 유식하든, 건강하든 병든 몸이든 주저하지 말고 모두 다 내게로 오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누구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상처 나고 찢겨진 그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우상은 재물을 봅니다.  그래서 굿을 하는 사람들은 굿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재물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재물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병든 자여 내게 오라. 가난한 자 내게 오라.
죄에 빠진 많은 사람들아 모두 다 내게 오라
슬픈 자여 내게 오라. 괴로운 자 내게 오라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아 모두 다 내게 오라"♬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선교사가 차를 몰고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보니까 할머니 한 분이 시장에 갔다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갑니다.  선교사가 차를 세우고 "할머니, 이 차에 타십시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차에 타고서도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채 내려놓을 줄을 모릅니다.  보다 못한 선교사가 "할머니, 짐 내려놓고 편히 가세요."라고 했더니 이 할머니가 아주 미안해하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 하나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이 짐까지 내려놓는담"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무거운 짐을 혼자서 끙끙거리며 지고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다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다 맡겨버리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내가'라는 것입니다.  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경가 깁슨이라는 사람은 오늘 본문의 진정한 뜻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뜻이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 되신다"는 뜻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평화요 우리의 안식이십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그분은 우리를 만져 주시고 무거운 짐을 맡아주시고 쉬게 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교회에 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왜요?  교회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런 의문의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가 뭐가 그렇게도 좋으세요?
남들은 산으로 바다로 놀러 가는데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규칙적으로 정해 진 시간에 교회에 간다는 것은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도 좋으세요?"

이 의문에 쌓인 물음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를 한번 믿어보십시오.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의 맛을 알면 평생을 믿게 됩니다.  죽인다고 해도 이 믿음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신만 예수 믿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도 자식도 평생을 예수 믿고 살게 만듭니다.  예수를 잘 믿어서 못사는 나라가 없고, 예수를 잘 믿어서 못되는 가정이 없습니다.  그만큼 예수를 믿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이 좋은 예수를 한번 믿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뎅이라는 사람이 만든 작품 가운데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이 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지옥문 앞에서'입니다.  거기에 보면 근육 짱의 사나이가 발가벗고 앉아서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지옥문 앞에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이 땅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죽어서 저 세상에 갈 때는 발가벗고 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를 못합니다.  빈손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지옥문 앞에서 벌거벗고 앉아서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생각할까?  어떤 짓궂은 사람이 그럽니다.
'누가 내 팬티를 가져갔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목숨이 다해 가는데도 갈 곳이 없는 인생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여러분은 이 땅의 생명이 끝나고 갈 곳이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올 때의 순서는 있어도 갈 때의 순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인생이 죽은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으로 가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 사망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모셔들이면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만약 우리에게 100m를 9초에 뛰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모르긴 하지만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역기를 300kg 들어야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저는 아예 포기해 버리고 말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쉽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동국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동국대학교는 우리 나라 최대 불교 종단인 조계종에서 세운 대학입니다.  그 당시 스님들이 곧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교는 아주 신비하고 깊고 깊은 진리의 종교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는 30년을 공부하고 도를 닦아도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려면 까마득하다는 겁니다.  아니 300년을 공부해도 불교의 도리를 한 바닥도 넘어가지 못한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분명하게 말씀하건대 기독교는 그렇게 어려운 종교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쉬운 종교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교회 유치원 아이들조차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도를 깨닫고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는지 그 도를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기독교는 너무 쉬운 종교입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쉽게 예수를 믿고, 쉽게 은혜의 생활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선하게 살아서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악하게 살았다고 지옥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서 지옥 가는 것이고 예수 믿으면 누구나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죄악의 짐을 짊어지시고 돌아가셨고 나를 의롭게 하시고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모셔들이기만 하면 내 모든 죄는 사해지고 나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막내 예인이가 밖에 나갔다가 동네의 큰 아이가 괴롭히면 '아빠'하고 저를 찾아옵니다.  밖에 나가서 놀던 예인이가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나면 '아빠'하고 울면서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저는 예인을 붙잡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처를 싸매어 줍니다.  예인이를 괴롭힌 아이를 찾아가서 혼 줄을 내줍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빠가 되십니다.  아빠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구원의 여정에로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은 초청에 응하셔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영접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은 잔치집에서도 내가 집어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아무리 멋진 계획을 준비하고 계셔도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달픈 인생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초청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힘들게 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짐들을 예수님 앞에 다 내려놓고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기를 예수님은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마음에 참 평안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 여러분을 구원의 여정에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찢겨지고 상처난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나를 사랑하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님.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이 엄청난 축복의 자리에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 앞으로 가십시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환경이 어떻게 할 수 없고,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참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누려보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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