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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의 씨름장사 야곱 (창 32: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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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씨름을 하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씨름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모양은 다르지만 많은 민족 가운데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에게도 있고 남미 사람들에게도 있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씨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중국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씨름은 일본과 함께 몽고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씨름과 일본 씨름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일본의 스모와 우리 씨름과의 차이는 일본 스모는 우리처럼 5판 3승, 혹은 3판 2승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판에 승부를 냅니다. 그냥 단판에 지면 끝나는 거예요. 일본 사람들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지면 안 된다고 하는 철저한 민족의 강인한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의 차이점은 일본은 씨름에 이기든지 지든지 관중들이나 선수가 표현하지 않습니다. 진 사람도 그냥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이긴 사람도 웃지도 않고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모래를 뒤집어쓰거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씨름에서 지는 사람을 보면 너무 낙심하고, 침울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또 이긴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모래를 날리고 곤두박질치고 절하고 너무 좋아서 감독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감정적입니다. 씨름은 민속 경기이기 때문에 우리 국민성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일본 스모는 심판이 판결을 내리면 한 사람도 지금까지 반항하거나 불복하거나 다른 의사를 표현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만이 있고, 심판이 잘 못 됐다고 생각이 들면 경기장에서 나오지도 않고, 모래판에 눌러 앉아 있고, 달려들고, 소리 지르고, 코치와 함께 뛰쳐나가고, 하는 일들이 항상 비일비재합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이번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은 심판의 권위가 있어서 한 사람도 거기에 대해서 반항하지 않습니다. 질서에 대해서 철저하게 순종하고 적응해 나가는 이러한 모든 분야에 권위에 대해 인정을 하고 살아가니까 온 나라가 평안합니다. 게임도 잘 되고 관중도 모입니다. 

또 일본 씨름은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관중들에게 볼거리도 만들어 줍니다.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하는 동작은 자기를 정신적으로 담대하게 하고 상대방의 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런 동작이라고 합니다. 소금도 뿌리고, 배도 두드리며 관중들에게 볼거리를 주면서 이끌어 나가는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나라 씨름은 지금 사양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은 기도의 씨름 장사입니다. 야곱이라는 사나이는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 이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 된 사람입니다.

1. 야곱의 과거의 생활입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제 중에 둘째입니다. 형 에서는 들사람이라 사냥꾼이며 남성적이어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고, 야곱의 여성적이고 가정적이고,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첫째가 되지 못한 것 때문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을 정도입니다. 일찍이 야곱은 형을 꾀어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 챕니다. 그리고는 하란 땅 외삼촌의 집에서 20년 도피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한 여인을 얻기 위해 14년을 머슴살이를 합니다. 또 재물을 얻기 위해 또 6년을 머슴살이로 보냅니다. 이렇게 20여년의 타향살이를 하다 보니 거부가 되어 두 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지요? 형 에서입니다. 그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던 죄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형 에서가 4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에게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심히 불안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의 마음을 풀어 볼까 해서 꾀를 부립니다. 형 에서에게 먼저 선물을 보냅니다. 그것은 뇌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13-15절을 읽겠습니다. “13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32: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32:15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그래도 불안해서 자기의 재산을 두 떼로 나눕니다. 그리고 자기는 멘 마지막 대열에 섭니다.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뛸 생각으로 말입니다. 지금 야곱이 하는 생각을 보면 옛날에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며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던 그 때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당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야곱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쫓기듯 인생을 달려와야 했던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먼저 할 것이 무엇인지! 나중에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불안합니까? 왜 그에게 평안이 없고 늘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까? 큰 재산을 이루었는데도 그는 불안하였습니다. 재물이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요? 인생을 거꾸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목사님이 마차를 타고가 시골교회에서 저녁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잠을 자기위해 마을 끝에 있는 어느 집사님 댁으로 가는데 그 길이 얼마나 가파른 언덕인지 금방이라도 뒤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일어나 그 가파른 언덕을 찾는데 언덕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두리번거리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찾으십니까? 간밤에 내가 하도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서 얼마나 가파른 언덕이기에 그러나 했더니 언덕이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아니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 집까지 오는 길은 평지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짓궂은 마을 청년들이 마차의 앞 뒤 바퀴를 바꿔 달아 놓았던 것입니다. 작은 앞바퀴는 뒤에 달고 큰 뒷바퀴는 앞에 달아 놓았기 때문에 가파른 언덕을 올라온 것처럼 끄는 말도 목사님도 힘든 길을 와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목사님이 그렇게 힘든 고갯길을 가야 했습니까? 앞에 있어야 할 것이 뒤로 가고 뒤에 있어야 할 것이 앞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앞에 서고 나는 뒤에 서고, 믿음은 앞세우고 욕심은 뒤에 묻어두고, 말씀은 앞세우고 자아는 뒤로 가고 거기에 평안이 있고 형통이 있습니다.

2. 야곱을 만나러 오신 하나님

22,23절에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다 썼습니다. 가족들과 짐승 떼를 먼저 강 건너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 홀로 얍복 나루터에 앉아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불안과 근심 걱정도 깊어져만 갑니다. 어느덧 깊은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 봅니다. 어떤 사람이 옆구리를 칩니다. 야곱은 그 사람을 붙잡고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그 씨름은 야곱이 먼저 건 씨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4절을 함께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서 씨름을 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씨름은 필사적입니다. 죽기 살기입니다. 야곱에게 싸움을 걸었던 사람은 야곱이 워낙 강하고 다급하게 붙들고 늘어지니 25절 보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그를 이기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창세기 28장 벧엘에서 야곱이 사다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닥다리는 야곱이 하나님께 올라가기 위해 만든 사다리가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오시기 위해 설치하신 사다리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늘도 내 인생 속에 간섭하시고 개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찾아 오셨습니까? 야곱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많은 세월동안 야곱을 지켜보았으나 도무지 변할 줄 알지 못하는 야곱! 타성적인 교회생활,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채워주는 분 정도로 믿는 종교인 같은 야곱의 삶을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서 지금 간섭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야곱아! 어제 같은 오늘은 살지 마라!”}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아갈 때, 진정한 내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이 내게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있을 때에 우리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아갑니다. 폼을 잡고 허세를 부립니다. 자신을 과장합니다. 그 모습은 참된 나의 모습이 아니라 위장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정직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 거짓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시기 전에 야곱을 홀로 남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그런 야곱을 오늘 홀로 있게 하셨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날 시간입니다.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는 돈이 많고 친구들이 많을 때는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다 떠나간 다음에, 재물이 다 없어진 다음에(눅15:14,17)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얍복이란 뜻은 “비운다. 몽땅 털어버린다. 쏟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가면(假面)으로 진정한 자기를 가리고 살았던 자기 인생을 철저히 비운 곳이 얍복강입니다. 아마도 지금 여러분들은 얍복강가에 서 있는 분들이라고 봅니다. 이 순간에 겸손히 야곱처럼 위선된 자기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3. 새벽에 환도 뼈가 부러졌습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의 씨름의 절정은 바로 새벽이었습니다. 새벽녘에 결정적인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새벽녘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십니다. 환도 뼈는 사람의 상체와 하체를 연결하는 뼈를 말합니다. 소위 히프 조인트입니다. 인체 중에서 가장 강한 뼈라고 합니다. 사람이 힘을 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환도 뼈를 내려치시자 야곱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치셨을까요? 지금까지 야곱의 철학은 “내 힘으로, 내 재주로, 내 꾀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야곱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야곱은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장자가 되었습니다. 형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맨손으로 미인 아내를 얻었습니다. 재산과 명예를 얻었습니다. “내가 마음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목적을 이루고야 만다.” 이 얼마나 방자한 인생이었습니까? 이러한 야곱을 하나님은 때려눕히십니다. 환도 뼈가 부러지는 이 순간 하나님을 붙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건강을 믿고,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믿고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언제 깨닫게 됩니까? 바로 환도 뼈가 부러지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환도 뼈가 부러지는 그 순간, “이제 내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나님, 나는 당신 없이 못살아요. 주 없이 살 수 없어요. 당신의 축복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라고 고백하는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을 26절이 증명합니다. 본문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상황에 대하여 호세아선지는 주석하기를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호12:4) 야곱은 비로소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내 꾀, 내 수단, 내 요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호12:4절에 왜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더라.”고 했을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는데 왜 웁니까? 기뻐 뛰어야지 왜 웁니까? 이 눈물은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눈물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봉쇄하였던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순간입니다. 용감하고 억척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실한 고백의 눈물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억척스러워 보였고 강해 보였지만 속에는 깊은 불안과 한없이 약한 모습이 숨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명랑한 것 같고 활달한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의 세계는 울고 있었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을 토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이제는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하면서 맡기는 눈물입니다. 그의 생애 중에 가장 진실한 기도가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 위대한 변화의 축복은 바로 새벽에 기도하는 중에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얍복강의 새벽은 야곱의 인생을 바꾼 새벽이었습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터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새벽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곳과 시간도 바로 새벽이었습니다. 지금도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분들이 늘어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홀로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한 번 하나님 앞에 진솔한 모습으로 서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환도 뼈를 치시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앞뒤가 바뀌어 허둥지둥하며 사시는 분들도 이제 결단하십시오.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준 이 새벽의 씨름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는 순종을 새벽에 결단했습니다. 홍해가 새벽에 갈라졌고, 요단강이 새벽에 갈라졌고 여리고성이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만나가 새벽에 내렸습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는 새벽에 많은 물고기를 잡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고 믿음으로 그물을 던지는 시간입니다. 1907년 한국교회 부흥 역시 새벽기도회로 시작되어졌습니다. 우리 예수님 새벽에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새벽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으신 주님이! 너무나 피곤하여 풍랑 속에서도 잠을 주무셔야 했던 예수님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 기도의 씨름에 승리하고 나면 큰 인물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새벽을 붙잡으신다면 여러분의 영성이 되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벽에 기도의 씨름에 이긴 야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매달려 애원하고 기도하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이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 야곱이란 말은 ‘약탈자, 속이는 자, 사기꾼, 강도’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이스라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일어서는 야곱 앞에 동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창32:31절인데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브니엘이란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야곱의 앞길을 비추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축복 중에 축복은 민6:24절인데 거기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주시고,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내게로 향하여 비추시니 은혜가 있습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더 이상의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렸더니 되기 시작합니다. 풀리기 시작합니다.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새벽에 승리한 야곱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새벽에 야곱과 같이 기도의 씨름을 하고나면 하루 일과 중,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축복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부딪히는 모든 사건과 상황 속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간섭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해결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일찍이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위풍당당하게 불의의 길은 걸어가는 것보다 절뚝거리며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쪼록 얍복강 가에서 승리한 야곱과 같이 여러분들의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 되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새벽에 기도의 씨름을 하고 일어설 때에 여러분들 앞에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쳐 주셔서 평강 주시고 은혜로 넘치도록 내려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할 수 없는 문제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결 하실 줄 믿습니다. (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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