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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 (히 1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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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은 “영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영성을 찾고 또 영성을 높이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성을 말할 때는 대부분 카톨릭적인 영성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즉 조용히 자기 내면의 의식으로 들어가 관상하는 영성을 영성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영성의 핵심은 예배에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폴 스티븐스와 마이클 그린은 성경적인 영성을 탐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초대교회를 그렇게 강력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외형적 조직이나 의식이 아니었다.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 경험이 초대교회를 가장 강력한 요새처럼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도원에서 혼자서 조용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로 달려 나와 함께 예배함을 통해서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들의 영성이 되살아나고 있습니까? 만약 내가 그 수많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영성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든지, 아니면 예배를 제대로 바르게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예배에 대하여

  그러면 예배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두 개가 나옵니다.

하나는 “경외함으로 절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그 발에 입 맞춘다”는 뜻입니다. 전폭적인 헌신과 의탁을 그 분께 드리는 행위,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갈 때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의 모습을 한 번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 예배를 건성으로 대합니다. 준비도 없고 만나 뵐 분에 대한 예우도 없이 대강대강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는 우리의 태도와 비교해 보십시오.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면, 즉 하나님의 신비와 위엄 앞에 깊은 경외심이 내비쳐지면, 사람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 예배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예배를 뜻하는 또 다른 단어는 “봉사”(Service)입니다. 봉사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보다”는 종을 뜻하는 “에베드”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종을 아주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종의 신분에는 굴욕과 멍에가 아닌 특권과 영예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으로 통했고, 따라서 그 분을 위해서 일하는 봉사는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예배 속에 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에는 이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감과 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인 기쁨의 봉사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지 않는다면 예배는 감격을 잃을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 예배 가운데 없다면 불만에 찬 예배자들은 세속적이고 미지근한 교회를 계속 쇼핑하러 다니거나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3.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 분은 살아계셔서 천지를 지으시고 오늘도 그것을 붙들고 계십니다. 모든 생명은 그 분에게서 나와 그 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분은 살아계시기에 구약의 예언자들이 시종일관 통렬히 비난했던 죽어 말 못하는 우상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기대감, 침묵, 하나님을 기다림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그 분을 뵐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예배는 그 분의 살아계심을 구현할 뿐 아니라 그 분께서 개입할 여지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분은 철저하게 우리와 다른 “타자”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뛰어넘어 계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우리를 그 분께 더 가까이 부릅니다. 우리의 예배에 이 요소를 구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도 하나님을 만만하게 여기지 않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지고, 또한 하나님으로 인해서 높이 들릴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밀려나고 오직 그 분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 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와 나누지 않는 분입니다. 이것은 그 분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진실하셔서 그렇습니다. 그 분만이 창조주요 구속자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정도가 아니라 은혜 그 자체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그 분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셨으며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 의 길을 지도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의 영광으로 우리를 맞아주십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는 그 분을 높이지 않을 수 없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그 분이 우리에게 해 주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예배를 시종 지배하는 동기는 경외와 두려움입니다. 여기에 단조로움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내가 그 크신 분 앞에 있다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아래 있는 거룩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뜨거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회중위에 거룩한 정적이 임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 하는 그 곳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배의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4.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너무 변질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전통이 예배를 변질시킵니다. “옛날에 해왔던 방식대로” 그 전통이 우리의 예배를 변질시킵니다. 우리가 떠받들고 있는 형식이 내면의 실체를 놓치게 하며 예배를 변질시킵니다. 우리는 순서에 너무 집착합니다. 또는 반대로 어떤 형식을 갖춘 의식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성이 우리의 예배를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또 모든 것을 성직자에게 맡기는 성직주의가 예배를 변질시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하는 예배였습니다. 결코 어떤 한 사람이 예배를 주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참여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 가운데 깊숙이 참여하고 계십니까?

  무엇보다도 우리의 예배를 시계가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보다 시계가 우상이 되어 있는지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예배가 1시간짜리 드라마나 쇼처럼 반드시 1시간 안에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의 또 다른 예배와 순서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잘 지키려고 한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모든 예배 시간이 무슨 일이 있어도 1시간에 정확히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사실 큰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보다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인위적인 시간에 너무 얽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배시간이 길어지냐고 불평했던 분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나는 그 예배 시간에 살아계시고, 거룩하시고, 유일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또한 내게 믿음의 도전을 주시는 그 분을 전심으로 바라보았는가? 그 분 앞에 내가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감사와 찬양으로 서 있었는가? 그 분의 임재 속에 머물러 있기를 간절히 사모했는가?” 이런 것들보다는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는 것을 더 사모했습니다. 그 분을 바라보기보다는 시계를 더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시계가 우리의 예배를 변질키십니다. 때로는 건물이 진정한 교제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몸에 대한 두려움이 예배를 변질시킵니다.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들거나, 박수를 치거나, 춤을 추며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 분을 찬양하고 예배해도 부족할 뿐입니다.

5.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

① (히12:28)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깊은 두려움과 사모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 예배에 이것이 있습니까?

② (히13:15a)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

  예배는 찬양으로 빛나야 합니다. 우리 예배에 찬양이 풍성합니까? 이것은 단순히 노래를 많이 부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그 분께 찬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하늘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라는 윤동주 시인의 시 구절처럼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그 분으로 인해 행복해 하는가? (내게 아무런 걱정이 없어서 걱정 안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 염려도 없이 그 분 앞에서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③ (히13:15b)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배는 주중에도 계속 하나님을 위해 빛나는 입술과 삶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만 그 분을 고백하고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주중에 세상에 살면서도 그 분은 나의 입술과 삶을 통해서 고백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일 예배는 위선이 됩니다.

④ (히13:16a) “오직 선을 행함과”

  예배는 실제적 방식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⑤ (히13:16b)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예배야 말로)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예배는 단순하고 후한 생활 방식을 낳습니다. 현대사회의 주요한 특징은 탐욕과 이기심인데 예배는 이것을 극복하게 하고 여기에 도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열려있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와 삶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 그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해 그 분이 내게 어떤 분인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허구도 아니고, 부재자도 아니고, 너무 바빠 신경 쓰실 겨를도 없는 분도 아니고, 우리 기도에 귀를 막으시는 분도 아니고,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대상도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전부를 내게” 주신 분입니다. “그 분의 전부를 내게”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에게, 그 분의 모든 것을 주신 그 분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그 분께 드려야 할까요? 그 분의 전부를 내게 주신 그 분께 나도 “나의 전부를 그 분께 드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까요?

  며칠 전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먹을 팝콘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데 종업원 앞에서 팝콘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톡톡, 팍팍” 소리를 내며 밖으로 터져 나오는 팝콘들.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해 그 단단한 껍질을 벗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수북이 쌓이는 팝콘처럼 내 영혼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깨어지고 싶었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운데도 그렇게 나의 껍질이 벗겨지고 영혼이 순결해지고 싶었습니다. CGV에서 스타 콤보 세트를 시킬 때 잠시 묵상해 보십시오. 예배를, 그리고 그 앞에서 깨어질 나의 영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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