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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 나도 아멘할 수 있는가? (히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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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6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전쟁 후 6.25에 대한 많은 연구와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신앙적 해석은 손양원 목사님일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애양원과 애양원 교회에서 한센씨 병(문둥병)을 앓고 있던 성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피고름을 짜고 빨아내면서 일평생 그들과 함께 했다. 전쟁이 일어났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피고름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양떼들을 두고 피난을 떠날 수가 없었다. 손양원 목사님을 피신시키기 위해서 그 애양원에서 조금 떨어진 해변에 배가 닿았지만 끝끝내 교회에 남아 목회를 계속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3개월이 되었다. 1950년 9월 13일 수요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날 목사님은 공산군에 붙잡혀서 여수 미평동의 한 과수원에서 총살 순교를 당하셨다.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 준비했던 그 설교원고. 그 설교는 선포되지 못했지만 성도들과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어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바로 그 설교원고에 6.25전쟁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해석이 나타난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설교에서 6.25한국전쟁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눈동자처럼 아끼고 사랑했지만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았을 때 바벨론포로로 70년을 고생하신 것처럼 오늘 이 나라가 당하는 이 고통은 이 나라와 민족, 교회가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내가 오늘 이 죄악상을 말한다면 우익이나 좌익, 정치가나 경관, 미국인, 그리고 교역자 혹은 교인에게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해야 한다.”면서 비장한 각오로 설교를 하고 있다. 다음은 손양원 목사님이 말씀한 6.25전쟁의 원인이다. 간단히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국가지도자들의 범죄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의 선거에서 부정이 너무 많았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영예와 부귀를 탐하고, 국민의 종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상전이 되어서 돈벌이 기회를 삼았다. 심지어는 목사로 있다가 출마한 자들이 주일도 지키지 않은 채 선거에만 열중했다.

2) 한국민족의 죄악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이 일제치하의 고통이 물러가게 하시고 해방을 주셨는데 그 자유를 범죄 하는데 자유로운 기회로 사용했다. 참된 자유는 죄에서 떠난 심령의 자유와 선과 의의 자유인데 자유가 방종과 타락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자유를 핑계로 자녀가 부모를 돌보지 않고, 학생이 선생을 업신여기고, 부하가 상관을 멸시하고, 아이가 어른을 함부로 대한다.

둘째,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독립의 기적적인 은혜를 주셨지만 국가지상주의로 흐르고 있다. 이 민족에게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보다 국가에 은혜를 돌리고 국가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에 치우쳤다는 것이다.

셋째, 5년간 계속해서 풍년을 주시니 도리어 귀신을 대접하게 하고, 해방된 후에 우상은 이 강산에 더 왕성해졌다. 또 이런 과거의 범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외치는 종을 비웃고 욕하고 독선자로 책벌하고, 총회에 참석하지도 못하게 했다. 풍년과 곡식으로 방탕하게 술이나 해 먹고 쓸데없이 써 버렸다. 흉년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풍년주시면 우상 숭배했다.

3) 미군정시에 잘못한 일들

미군들의 정치적 잘못(일정 때 악한 관리들을 그대로 등용, 좌익사상자들을 많이 양성, 선교사들이 지난날의 우상죄를 예사로 용납, 신신학(자유주의신학)을 방관, 주일성수 관념이 희박)

4) 기독교의 죄악 때문이다. 이것이 제일 큰 죄악이다.

첫째, 기독자의 기도와 전도부족, 언행의 불일치

둘째, 과거의 우상죄를 회개하지 않고 청산하지 않고 오늘도 계속됨.

셋째, 의인처벌의 죄 값. 회개를 외친 의인을 설교강단에 세우지 않음.

넷째, 교회와 결혼한 목사가 변절, 개인의 영달을 위해 양떼를 버리고 정계로 나감.

다섯째, 구제품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추태를 부림.

여섯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찮게 취급한 자유주의 신학자들 죄 값.

일곱째, 총회 석상에서 목사와 장로들이 서로 싸우고 치던 죄 값.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설교의 결론으로 회개해야만 우리가 다시 살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입을 수 있다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여러분! 이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이 얘기가 56년 전의 얘기로 들렸는가? 오늘 이 시대,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시간은 지나고, 문화는 발달하고, 용어는 달라지고, 옷은 바꿔 입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죄악과 부끄러움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민족의 비극을 바라보면서 죄악 앞에 회개하자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던 선각자의 예언자적 외침 앞에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1.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문제가 경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는 구호품이 있던 시대보다 얼마나 행복해지고 부유해졌는가? 우리는 못살겠다, 힘들어 죽겠다 말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모습이다. 그 때의 죄악이 오늘에도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안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면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앞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순종이다. 진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불순종이요, 우리가 변해야 할 것은 부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의 앞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2. 성경에는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순종하라고만 윽박지르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순종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축복들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청년부 LTC 훈련 때 나누었던 것처럼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경험해가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집을 짓고 나와 함께 살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순종하면 우리는 성령을 받고, 기도 응답을 받고, 우리의 속사람이 정결케 되고,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한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순종할 때 이렇게 많은 복을 약속해 주셨지만 왠지 그렇게 하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위축되고, 내가 편하고 죄의 유혹에 이끌리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순종의 방법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께서 순종을 배우셨던 방법은 고난의 길을 통해서였다. 예수님은 순종의 학교에서 사셨는데 그것은 고난이라는 과목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고난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이라는 그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 그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에 부딪치고, 그 죽음 속에서 살아가면서 순종을 배우셨고, 순종하셨다.

  빌립보서 2:8에서는 예수님의 순종을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죽어야만 복종(순종)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께 진정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주님 앞에 철저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의 생각, 내 주장이 여전히 살아있고, 나의 소유욕을 끊임없이 행사하려하고, 내 고집, 내 꼬라지가 죽지 못하고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저에게 엄청난 일이 있었다. 집사람과 대판 싸웠다. 별일이 아닌데 서로 감정이 상해서 3일을 말을 안했다. 목사가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감정이 상하면 목사할아버지도 안된다. 목사라 머리 속에서는 성경말씀이 자꾸 떠올랐다. “네 원수를 사랑해라” 그러나 저는 빨리 화해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죽지 못해서 그렇다. 나의 자존심이 죽었다면, 내 고집이 죽었다면, 내 꼬라지가 죽었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성령의 음성 앞에 금방 순종했을 텐데 나는 내 자신이 죽지 못했다. 그래서 불순종한 것이다.

3. 요즘에 마태복음으로 묵상을 하는데 지난 금요일에 마태복음 12:38-45을 가지고 묵상을 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다. 요나의 표적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이요, 죽음을 통해 무덤에 있는 시간을 말씀하고 있음을 잘 알 것이다. 저는 묵상했다. 왜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향해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하다고 했을까? 음란과 음행은 깊은 사랑의 관계없이, 아무런 책임도 없이 단지 나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얕고 표면적인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임을 거부한 채 단지 기적만을 요구하는 자들을 우리 주님을 책망하셨다.

  오늘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우리는 어떤가? 그 분은 바라보면서 그 분의 죽으심을 바라보는가? 그 분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죽을 수 있는 것일까? 그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을까?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면 우리 또한 오늘 나에게 있는 이 고난을 통해서 그 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경제가 좋아지기만을, 내가 잘 사는 것만이 진정으로 내게 복이요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표적만을 구하는 세대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의 표적을 모르기 때문이요,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순종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4. 지난 사순절에 묵상했던 글

  십자가는 걸려 있으나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는 교회/ 작은 것보다 큰 것을/ 낮은 데보다 높은 곳을/ 가시관보다 황금왕관을/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나눔보다 받아 챙기기를 것을 더 좋아하는 교회// 손발의 믿음보다 입술의 믿음을 외치며/ 저 세상 좋다하면서 속인 뒤/ 이 세상 물질을 다 차지하는, / 생명을 버리는 것보다/ 몸 도사려 내 목숨하나 부지하기에 바쁜 교회// 정통이다 법통이다 격식 따지기에 바빠/ 뜨거운 사랑보다 차갑고 냉기에 찬 교회/ 고난의 십자가는 예수님께 다시 지우고/ 좁을 길 버리고 넓은 길 따라/ 평안 축복 남발하는 회칠한 무덤 같은 교회/ 주님이 십자가가에서 바라보시면서 아픈 눈물을 흘리셨을 교회.

  순종을 표현하는 영어단어가 많은데 저는 "Amenability"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든다. 풀어보면 그것은 "아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아멘이라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 바로 그것이 순종이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내가 그것을 얼마나 여러 번 해 본 경험이 있는지 그것도 묻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은 "너는 나의 뜻에 아멘할 수 있느냐?"를 물으신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듯이 너도 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느냐?”

성경의 마지막에 성도들은 이렇게 외쳤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 분의 뜻 앞에서 아멘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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