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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사랑, 사랑 (요일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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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없는 결혼, 사랑없는 사귐, 사랑없는 사역, 그것이 얼마나 적막하며 숨막히는 것이 될지는 되물을 필요조차 없다.
예수님도 부활하신 이후 해변가에서 떡을 떼며 고기를 나눠주신 베드로에게 3번씩 질문을 던지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한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부탁하셨다.
양을 먹이고 양을 치는 사역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요한은 사랑에 대하여 요한1서 4:7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나서 하나님을 알고......"하였다. 그런데 소망의 사도라는 베드로도 요한과 똑 같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 대접하며 서로 봉사하라고 벧전4:7∼10에서 강조한다.

사랑은 어느 누구의 전용물이 될 수 없다. 믿음의 사도라는 바울을 보라.
롬8:35∼4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사망이나 생명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으리라"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고전13장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사랑의 정의를 15가지로 내린다. 그리고 그 사랑이 모든 것의 으뜸임을 외친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보다 위대하고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도도 사랑을, 소망의 사도도 사랑을 증거하며 사랑의 사도 요한과 같이 사랑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것은 성경의 명령이요 피조물의 삶의 원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죄가 들어오므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욕심이 빚어낸 사랑이 판을 치고 자기 중심적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면서 사랑은커녕 싸움과 분쟁과 계산적인 주고 받음이 사랑으로 둔갑한 삶을 살고 있다. 나의 정욕을 채우느라 남을 죽이고 희생시키는 것이다.

우리 성도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또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품성이 사랑이심을 안다.(요1 4:8)

  하나님의 품성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와 사랑인데 구약은 의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요한1서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정녕 하나님을 안다면 그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마태5:48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였다.
레위기11:44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였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데 하늘 아버지가 온전하시고 거룩하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하려고 거룩하려고 변화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이라면 우리도 아들로서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하게 된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오늘 본문에 3번 반복하고 있으니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게 된다. 

2. 하나님이 사랑을 보여주신 것을 안다. (요일4:9)

  요일4:9上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였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을 모르는 인생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셨다. 사랑은 본 대로 느낀 대로 배운 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을 왜곡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요일4:9下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란 뜻인데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살리려 하셨다.
나를 살리려 하나님의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종의 형체로 낮추고 낮춘 겸비한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사랑이 부족하고 사람이 죄를 지으며 사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람 곁으로 다가오신 자기 비하의 사랑이다. 이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왕자가 시골처녀를 사랑하여 왕위를 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대로 사랑을 한다. 지나날 그리스도인이 되기전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본 것은 육정으로의 사랑이다.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거의 다 뒷골목 만화방에서 배웠다. TV, 영화, 삼류소설에서 배웠다. 또한 컴퓨터에서 배우고 친구들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안되면 될 때까지 도끼로 10번 찍고 100번찍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인줄 알았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자기를 낮추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배운 사랑은 철저히 너를 죽이는 것이었다. 주먹으로 사는 사람을 박력이라고 좋아였고, 내가 군림하고 내가 섬김을 받는 사랑, 왕이 되려는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하다. 잘못된 사랑의 방정식을 놓고 끙끙거리기에 삶의 해답이 없고 고통스럽다. 상처와 절망 수치심과 복수심으로 넘쳐나고 자살도, 살인도 감행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내려가는 사랑, 찾아가는 사랑, 함께 하는 사랑을 보여주신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을 안다. (요일4:10)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하였다. 그 사랑은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다. 즉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사랑이다. 그래서 요일4:11은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주신 사랑은 사랑하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사건이다.
롬5:17에서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복케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과 나의 원수된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화목제로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 이 보다 더 큰 사랑의 실천이 더 있겠는가? 나의 죄 값인 사망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대신 죽어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이런 사랑앞에서 우리는 계속 무엇을 더 버틸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을 이야기하신분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였다. 자기 아들을 화목제로 주실만큼 사랑하셨다. 우리가 화목제물 되신 주님을 보면서 남은 인생의 과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가스실로 사람을 보내어 처형하는데 한 젊은이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 때 신부님이 일어나서 대신 죽을 것을 요청하였다. 신부는 가스실로 보내졌고 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젊은이는 살아났다. 대신 죽어지는 사랑,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나하고 교제하는 장로교회 목사님이 자기의 신장을 떼어주기로 하여 한 아주머니를 살렸다. 그 후 소감간증을 하는데 이 아주머니는 자기는 예수를 모르지만 신장을 떼어준 목사님이 자기에게는 하나님이요 전부라고 하면서 이 목사님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해서 예수믿고 평생 자원봉사하기로 했다고 하였다. 신장하나 준 것으로도 사랑을 실천한다면 목숨을 주어 화목제물이 된 이 사랑의 실천이 나를 살리기 위함임을 안다면 나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삶이 마땅한 것이고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므로 내가 살아나게 되는 참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이란 너를 위해 죽는 것임을 배우게 되었다. 사랑은 그러므로 끊없이 나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주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줌으로서 더 즐겁고 기쁘고 신이난다.
너를 위해 죽어도 되는 사랑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완전한 사랑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나에 대한 존경이다. 보배로운 존재로 여기는 섬김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관심이다. 나의 못난 모습에 대한 이해이다. 나에 대한 책임이다. 나를 아는 것이고 나와 영원히 함께 하는 돌봄이다. 우리는 이 완전한 사랑에 담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고전13:5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온유함이며 무례히 행치 아니함이다. 그리고 여기 완전한 사랑에 담긴 사랑에 대한 존경, 섬김, 관심, 이해, 책임, 돌봄으로 사랑으로 보여주고 실천하는 자가 되라.

요한 사도가 늙어서 설교할 수 없게 되었다. 인생의 말년이 되어 제자들이 그를 들것에 실어 설교를 부탁하면 요한은 언제나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서로 사랑하자"고 하였다. 왜 사랑하자는 멧세지를 반복하였을까? 사랑의 실천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 형제끼리 미워하고 시기하고 반목만 거듭하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고도 당장 주차할 때 내 앞길 가로막았다고 죽이네 살리네 하며 싸운다. 김종희 장로님은 권사시절 자동차에 치여 두개골이 깨져 병원에 입원했는데 가해자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본인도 퇴원하여 기도로 맡겼다.
형제를 미워만해도 살인한 자가 되는데 어떻게 돈 받아 낼 궁리를 하는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최고의 사랑실천은 원수를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로 이끌어 오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품으로 초대하고 전도하는 일이다.

실천 없는 사랑, 말만 가지고 하는 사랑은 오늘 끝장내자.
요일3: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거리끼는 사람에게 손을 내 밀고 복음전하는 실천자가 되자.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가 주님과 함께 죽고 연합하여 하나님 사랑의 실천자가 되자.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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