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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시 6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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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군(軍)상담세미나를 서울에 있는 중앙군사학교에서 가졌습니다. 일반 상담이론을 군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한편 두렵기도 하고, 그래도 초급장교들에게 상담에 대한 이론과 지식을 전달해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일반적이 상담이 대답을 얼마나 해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문제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과연 사람이 해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자들도 그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담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문제를 깨닫게 하고, 그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겁니다. 누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나라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을 바꾼다고 되는 거 아닙니다. 정치인들을 바꾼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블레셋의 장군인 골리앗은 키가 6규빗(1규빗은 약 45.6cm)이고, 그가 입은 어린갑이라는 갑옷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1세겔은 약 11.4kg)입니다.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경갑을 차고, 어깨에도 놋으로 만든 단창을 메었으며,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약 7kg)입니다. 그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은 군복도, 녹 투구도, 갑옷도, 칼도 없이 나갔습니다. 그의 손에는 막대기 하나와 주머니에 든 돌 다섯 개 그리고 물매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려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게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 결과, 다윗이 이겼습니다. 아니, 정화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기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옛날이야기로 끝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성경은 대부분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요, 진리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 옛날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맨날 지느냐구요? 다윗은 전쟁에서 무얼 가지고 나갔어요? “여호와의 이름” 우리는 세상과 싸울 때 무얼 갔고 싸워요? “여호와의 이름”이었어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뭘. 그러니 맨 날 지지요.
사도 바울께서 “전신 갑주를 입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머리에는 투구, 가슴에 흉배, 허리띠 매고, 신발 신고, 방패 들고, 칼 들고……. 그러나 그것은 세상 것들이 아닙니다. 지식의 투구, 돈의 흉배, 건강의 허리띠, 명예의 방패, 권력의 칼……. 그래야 세상은 성공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입으라고 주장한 전신갑주는 그런 게 아닙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겁니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여호와의 이름.” 그 “여호와의 이름”이 다윗의 투구요, 신발이요, 흉배요, 방패요, 검이요, 허리띠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그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평생이 언제나 신나는 것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의 시기에 의해 쫓겨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일 것입니다. 압살롬은 성문 앞 재판을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병사들을 모아, 헤브론에서 아버지의 왕위를 노리고 반역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가담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급히 다윗 성을 빠져나와 도망했습니다. 후궁 10명만이 그 궁궐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가식들을 다 이끌고 피난 갔습니다. 그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향해 돌과 티끌을 날리며 저주 했고, 성 안에 들어간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함과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압살롬이 죽고 다윗은 다윗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압살롬과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이 심하면, “차라리 죽고 싶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들의 반란에 다윗의 마음은 “진작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압살롬과의 싸움은 힘과 권세가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과의 싸움, 그 절망과 슬픔과 고통과의 싸움, 이것은 힘, 돈, 권력. 그 무엇으로도 안 됩니다. 가끔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이기려 하지만 그것은 잠시입니다. 다윗의 승리 비결은 5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시편 23편, ‘하나님은 나의 목자’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주의 집에 거하리라.”고 찬양합니다.

오늘 본문 3~4절. 다윗의 절박한 상황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위기의 상황,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황일 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을 승리하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출애굽기 14장. 출애굽한 백성들이 홍해 앞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의 군대들이 그들을 잡으려고 특별 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들을 다 동원해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하면서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말합니다.

옛말 “죽는 것 보다야 낫지”라고 했습니다. “죽는 것보다야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낫지”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아닙니다. “애굽 사람 즉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섬기느니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이 낫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죽는 것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그것은 단순히 노예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서의 해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예배 하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나서는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길을 포기 하고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져버리면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어디든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을 떠나면 어디든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때, 그 원망의 소리가 들릴 때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어다.”(출 17:13-14)

절박한 상황, 그 상황에서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싸우시고 구원하십니다. 백성은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 함락에서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역할 역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이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열왕기상 18장.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대결하는 앨리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부르짖고 난리를 쳤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바알, 아세라. 그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만이 우리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무덤에서 건지실 분입니다. 환난, 질병, 사망, 죄악, 악한 마귀, 사탕에게서 구원해 주실 분입니다.
로마서 8:35-39.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8-39절,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 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2절의 “요동”은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흔들렸다.” 그러면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는 것은 반석 위에 있을 때입니다.
일본은 집 지을 때에는 지진에 견디도록 설계하고 건축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만약 지진이 나면 우리는 조그마한 진동에도 그 무너짐이 심할 것입니다. 반석 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삶도 반석 위에 세워 지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비바람이 부는 날, 집안에서는 별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들판에다 야영하느라 텐트치고 있었다면 더 두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는 자는 두려움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4 이하, 지혜로운 자는 반석위에 집지은 자요, 어리석은 자는 모래위에 집 지은 자라고 되었습니다. 둘 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도 붑니다. 그러나 반석위의 집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모래위의 집은 무너졌습니다.(심하게) 여기서 말하는 반석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반석입니다.

또한 반석은 힘의 상징입니다. 본문 7절(공동번역) “그분은 나의 힘이신 바위, 나 하나님께 피신하리라.” 하나님의 힘은 또한 보호하시는 힘, 대적을 물리치시는 힘. 산성과 요새와 같이 보호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8절, “백성들아, 어떤 일을 당하든지 너희는 하나님만 믿어라. 마음에 있는 걱정일랑 하나님께 쏟아 놓아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람을 의지한다는 겁니다. 9절, “사람들은 숨결에 지나지 않고, 높다는 것도 실은 거짓말. 모두 합쳐 저울에 올려놓아야 역시 숨결보다는 가볍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들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공동번역) “다시는 사람을 믿지 말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아무 보잘 것 없느니.”
미래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야고보서 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것이 인생입니다. 내일 내가 뭐하겠다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아무리 길어도 120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십니다. 그러나 행실을 착하게 살면 복, 악하게 살면 벌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행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면 하나님께서 은혜(구원)를 주시고, 하나님을 떠나 살면 하나님께서 저주(심판)를 주십니다.

직장, 사업, 가정, 사는 게 힘들어도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십시다. 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때, 특히 힘들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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