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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기념] 가인이 남긴 문화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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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6·25기념일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들의 불법남침으로 무방비 상태에 있던 서울이 점령당하고 남한 전체가 초토화된 치욕적인 날입니다. 6·25 한국 전쟁은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이 나라를 공산화 시키려고 무자비하게 동족을 살상하고 유린한 범죄행위입니다.

다행히 미국을 위시한 16개 UN참전국의 도움으로 남한의 민주국가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 전쟁으로 인하여 입은 피해와 상처는 헤아릴 수 없이 컸습니다. 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기까지 인명 손실만 하더라도 남쪽이 230만 명, 북쪽이 290만 명, UN군 15만 명, 중국군 9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월남한 피난민과 월북 또는 납북된 자, 행방불명되어 소식이 없는 자 등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나 되었고, 아직도 그 한을 간직한 채 5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에덴의 낙원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과 평화로 공존할 것을 명령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본성이 사랑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개입하면서부터 에덴의 낙원은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나게 하며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살벌한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낳은 최초의 사람 가인과 아벨 형제 사이에 칼부림이 나서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살인이 빚어졌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이와 같은 가인의 행위를 기록하였고 이어서 그로 말미암아 이어지는 그 계통의 사람들을 소개하였습니다. 곧 그들은 인류 최초문화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문화요 전쟁문화의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I. 인본주의적 예배문화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대표적 자격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곧 만물의 영장으로서 책임이며 권위이기도 합니다. 여기 최초의 사람 가인과 아벨 형제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예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1) 자의적 예배 형태입니다.

흔히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자원하는 행위여야 하고 즐거운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말합니다(출 25:2). 그렇다고 예배의 내용이나 형식이 드리는 사람의 마음 내키는 대로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어디까지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향에 맞는 예배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예배의 내용이나 형식을 모두 율법으로 반포하셨습니다(레 1:1-2). 가인과 아벨도 각각 그 생업에서 얻은 것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3-4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여기 대하여 히브리서 11:4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가인의 제사는 믿음 없이 드린 제사이기에 하나님께서 열납 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예배

5절에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자기 나름대로 농사지어 얻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인데 이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셨으니 화가 날만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어떤 것인가를 살피려 하지 않고 자기 취향에 맞는 대로 드리고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분히 여기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예배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기들의 잔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데도 저희들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예배 형태로 변질되어 가는 것입니다.

(3) 적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1:14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였습니다(마 7:15). “적(敵)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를 뜻합니다(요 1서 2:18).

성경에는 “적그리스도”를 안티 크리스토스(ὰυτί ΧρισΤος)라고 하는데 안티(ὰυτί)라는 접두사는 ‘대적 한다’는 뜻과, ‘대신 한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막 10:45). 그러니까 사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이면서 겉으로는 대신하는 자처럼 행세하며 교회에 접근하여 그 속에서 교회를 유린하는 죄악을 자행합니다.

역사적으로 크리스챤 중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6·25의 원흉인 김일성의 집안이 기독교와 관련이 있었던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입니다.  최근에 김일성의 가족 중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한국에 와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강양욱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일성의 외가가 기독교 집안이었다는 것과 그의 외조부뻘되는 강양욱이 평양신학교 출신의 목사로서 공산당 간부가 되어 북한의 교회를 유린한 붉은 용으로 알려 진 것은 사실입니다.

Ⅱ. 폭력적인 행동양식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결과로 동생에 대한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8절).

(1) 예배자와 폭력자

예수님께서는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하였습니다(마 7:16-20). 이 말씀은 신앙과 행위는 별개일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가인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한다고 하고 행동으로는 동생을 죽이는 폭행자가 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난 종교 전쟁도 따지고 보면 자기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저와 반대되는 사람을 처단하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일부 특정한 종교 집단은 테러와 폭력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우겨댑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고 평화를 유린하는 행위는 종교로 미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4:20).

(2)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자

성경은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정죄합니다. 예레미야 17:5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신 말씀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폭력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예들은 계속해서 사람 죽이는 일을 꾀하면서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였습니다. 창세기 4:22에 보면 가인의 7대손 두발가인이 쇠붙이로 각종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사람을 죽이는 전쟁무기를 만든 자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의 발달이 곧 대량살상 무기의 발명으로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곧 오늘날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핵무기와 최첨단 미사일을 보유하고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3)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전형(典型)입니다.

8절에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없고 저희 둘만 있는 들판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동생을 제 손으로 쳐 죽이는 잔인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56년 전 이 땅에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사실상 가인의 전철을 그대로 따른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며 나라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지난 반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도발을 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해가고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는지 그 양상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입만 벌리면 같은 민족, 또는 민족 공조를 내세우며 친북 반미 세력을 선동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4년 전 세계인의 축제인 한·일 월드컵이 열리고 있을 때 서해교전을 일으켜 우리 병사들을 죽게 하였고, 얼마 전에도 평택에서 그들의 추종세력들이 죽창과 쇠파이프로 젊은 군인들의 눈을 찌르고 병영을 파괴하는 등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Ⅲ.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무너지면 사람과의 사이에 지켜야 될 양심이나 기본적인 윤리도 무너지고 맙니다. 가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의 표본입니다. 그는 동생을 쳐 죽인 다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시침을 떼었습니다.

(1) 선악의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켜 상실된 마음의 소유자라고 하였습니다(롬 1:28).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며 그 기준에 맞추어 건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은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악으로 분류합니다. 이들은 시간이나 장소 또는 상황에 따라서 제멋대로 다르게 처신합니다. 같은 법을 편리한대로 적용하기도 하고, 겉과 속이 다른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대세몰이를 잘합니다. 여기에 체면이 걸리면 모두가 혼란에 빠져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 채 휩쓸러 가고 맙니다.

가인의 아들 이름이 에녹이고, 그의 5대손자의 이름은 라멕인데 이들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과 라멕의 동명이인입니다. 5장에 나오는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고 삼백년 간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이고, 라멕은 노아의 아버지로서 이들은 다 믿음의 계통이지만, 가인의 아들과 손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입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 제도를 파괴하고 일부다처(一夫多妻)주의의 쾌락 문화를 만든 조상입니다.

(2) 양심이 화인 맞은 행동을 합니다.

흔히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가인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동생을 죽였으니 하나님께 모른다고 거짓말을 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10절). 보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세월이 얼마나 지났든지 진실은 가려질 수 없고 사실은 왜곡되어 지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9:40).

지금 우리나라에는 가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두 가지 행태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이 천사로 가장하듯이 속으로는 공산주의거나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친북세력이면서 겉으로는 지식인 또는 지도층으로 행세하며 국민을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어내 놓고 북쪽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맡아 나라의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세력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저질러진 6·25 전쟁을 북침전쟁이라 또는 통일전쟁이라고 우겨대는가 하면, 우리나라를 도와준 UN과 미국에 대하여는 통일을 방해한 원수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엄연한 사실을 왜곡하며 거짓을 참인 것으로 선동하는 것이 가인 계통의 상투적인 스타일입니다.

(3) 결과를 보고도 반성을 못합니다.

허구에 찬 공산주의 이론은 지난 반세기에 걸친 세계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위시하여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붕괴된 것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은 역사적 필연입니다.
과거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이 저지른 일 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이 있습니다. 독일은 종전 후 60년이 되도록 그 때의 만행을 반성하고 이스라엘에 사죄하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위시하여 유대인에게 고통을 주었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세계인 앞에 자기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공개하고 희생된 유대인의 명단과 자료를 밝혀주어 원한 맺힌 그들을 위로하며 상처를 싸매려고 애를 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사죄하는 뜻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과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50년이 되도록 6·25의 상처를 위로하기는커녕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아픔을 키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납북자 가족 협회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기록을 통하여 전쟁납북자 수가 8만 2959명이라고 공식적인 숫자를 밝혔습니다.

그동안 북한 측에서는 국군 포로나 납북된 민간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정부도 여기에 맞장구를 치듯 공식적인 숫자가 485명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나마 정부 차원에서 그들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북한의 눈치를 살피느라 온 세계가 주시하는 인권문제도 입을 다물고 대한민국의 국가관과 민족의 자존심마저 포기하는 듯한 현상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은 선지자적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 13:11)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시대적인 경각심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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