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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입은 강아지 (마 15: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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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에서 은혜 베푸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지역 안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 저기 많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안식일과 장로들의 유전을 범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서로 결탁해서 우리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과도하게 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담대하고 거침없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직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갈릴리 지역을 떠나 서북쪽에 위치한 이방인들의 땅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21). 그곳은 수리아(Syrian) 지역에 속했고 베니게(Phoenician)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수로보니게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마태는 예수님을 찾아와 딸의 치유를 간청한 여인을 ‘수로보니게 여자’라 하지 않고 “가나안 여자”로 소개합니다. 가나안 족속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이방민족이었습니다. 마태는 여인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던 종족의 후손임을 밝혔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22). 여인은 귀신들린 딸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귀신 들린 딸만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찾거나 부르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던지 딸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아마도 여인은 일찍이 예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한 많은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꾸 듣다보니 그런 분이라면 귀신 들린 자기 딸도 고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 후 여인은 예수님께 관심을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인기스타의 모든 것에 알고 스케줄까지 기억하는 극성팬처럼, 여인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 자기 지역으로 오셨다는 것, 지금 어디에 계신다는 것까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찾아와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여인의 부르짖음을 전적으로 무시하셨습니다. 계속 부르짖는 여인을 본 제자들은 민망했던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23).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는 동안 여인은 재빨리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여인은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 예수님의 태도는 참 냉정해 보이기도 하고 무례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당신님께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자신의 사역 한계와 원칙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팔레스틴에는 떠돌아다니는 늑대 닮은 개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개(퀴온)들은 사납고 썩은 고기를 좋아해서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개는 언제나 불결하고, 비천하고, 비양심적이고, 탐욕스러운 자에 비유되었습니다(마 7:6, 눅 16:21, 빌 3:2, 벧후 2:22, 계 22:15). 유대인들은 온갖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인에게 사용된 것은 유대인 가정에서 기르는 작은 개(퀴나리온)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여인을 떠돌이 개 취급하신 것이 아니고, ‘애정’은 가지고 있지만 떡은 자녀부터 배불리 먹이는 것이 옳다는 원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배불리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마음이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셨다 해도 여인의 입장에서 이 말은 상당히 불쾌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잃어버린 양’과 ‘자녀’로 비유되는 반면 자기들은 이방인이라고 ‘개들’에 비유하니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동안 들어왔던 예수님의 인품에 관한 소문이 모두 헛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고, 아무리 사정이 있기로서니 처음 보는 여자한데 ‘개’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민족 감정에 사로잡혀 ‘당신도 별수 없는 유대인 남자구료’라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고, 자존심이 상해서 ‘내 딸 귀신들렸다고 무시하는 거냐?’며 따질 수도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팍 상해서 ‘그래 나는 개다. 오늘 미친개한테 한번 물려봐라’하며 싸우자고 덤빌 수도 있었습니다. 하려고만 했다면 여인은 얼마든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따지고 물고 늘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너무도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100%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께서 자기들을 ‘개’로 평가하셨을지라도 할 말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여인은 정말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떠돌이 개 취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좋게 평가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록 바르고 정직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 딸을 반드시 고쳐 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무릎 꿇었던 여인은 다만 “주여, 옳소이다”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라는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거만하게 ‘그 무슨 소리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하는 사람, ‘예수는 사람 아니랍니까, 사람이 다 똑같지요’라는 사람, 말씀마다 물고 늘어지며 따지는 사람이 은혜 받는 경우는 볼 수 없습니다. 비록 한 때 거만했던 사람이라도, 은혜 받는 순간에는 깨어지고 부셔져서 겸손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주여, 옳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여, 옳소이다”다음에 나오는 “마는”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인이 ‘그래요, 나는 개예요, 개란 말이예요’라며 펑펑 울면서 도로 가버렸다면 참 난감한 상황이지요. 낙심한 마음으로 ‘그래 나는 개다’라고 인정 하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절망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개같이 개판으로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옳소이다 마는”이라 해서 여전히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소망’은 주님에 대한 신뢰 곧, ‘믿음’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여전히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여인의 대답은 너무나 재치 있고 지혜롭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가끔 멋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주인 밥상에 올라가다가 두드려 맞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상아래 개는 주인이 밥 먹는 동안 주인의 무릎 아래서 기다립니다.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면서 숟가락이 입으로 가면 입을 쳐다보고 숟가락이 밥그릇으로 가면 밥그릇을 쳐다봅니다. 밥을 다 먹기까지 도저히 부스러기라도 던져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애절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결코 포기할 줄 모릅니다. 어쩌다가 한 숟가락 던져주면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먹고 나서 더 애절한 눈빛으로 주인을 은혜를 구합니다. 주인이 끝내 주지 않으면 그냥 슬며시 밖으로 나갑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서 먹다 남은 뼈다귀나 흘린 밥덩이라도 던져줍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상아래 개와 같은 자세로 주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자신은 가나안 여인으로서 택함은 백성들인 유대인이 받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부스러기라도 주시면 감사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비록 자신의 부르짖는 간청에 예수님께서 묵묵부답이셔도, 자신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 같아도, 오히려 상처 되는 말씀만 하시는 것 같아도, 끝까지 주님에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인의 태도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큰 믿음(Great faith), 곧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해 주시고,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예수님께 칭찬 받은 사람은 이 여인밖에 없습니다. 온갖 우상을 섬기다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조상들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그녀는 참으로 복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29-39절을 예수님께서 갈릴리 북동쪽 호숫가 이방인들에게 사역하신 내용입니다. 치유된 사람들의 목록은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을 반영하고 있습니다(사 35:5-6). 한명의 가나안 여인을 시작으로 이방인들에게 떡 부스러기 은혜가 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떡 부스러기지 그 내용을 보면, 떡덩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그 일을 증명해 줍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얼핏 보기에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유사합니다만, 차이점이 많습니다. 사람 수도 다르고, 먹고 남긴 빵의 수도 열 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먹이신 동기도, 오천 명을 먹일 때는 ‘목자 없는 양 같음이 불쌍해서’였던 반면, 지금은 단지 ‘굶어서 기진할 상태가 불쌍해서’였습니다. 이 본문들이 기록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던 것만큼이나 풍성하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한다면,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시기 위해 한동안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단지 딸의 질병만, 즉 예수님을 통해 현실적인 유익만 얻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신령한 은혜의 관계를 맺기 바라셨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이방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은혜의 왕국의 일원이 되도록 좀 더 끌어 당겨 주신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에 품고 있는 믿음의 씨앗이 점점 자라서 큰 믿음으로 드러나도록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 역시 그녀의 믿음 같은 믿음으로 은혜의 왕국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이 여인처럼 간절한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줄 압니다. 많은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응답 받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때로 내가 걷는 이 길이 굽어 도는 것 같을지라도 지나고 보면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잠깐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간절한 소원에 대한 소망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금 기다려보다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미친개처럼 되지 않고, 끝까지 상아래 개의 자세로 은혜 입는 강아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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