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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원수를 (삼상 26:1-12, 히 12:14-17, 마 6: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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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유명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난 것은 1948년 10월 19일이었습니다. 제주 사태 진압을 위하여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던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인데 저들은 불과 4시간 여 만에 여수시내의 모든 주요 공공기관을 다 장악했습니다. 여수 순천 두 도시는 삽시간에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단체난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 죽이는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을 연출했습니다.

유명한 손 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저 광란의 주인공들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체포당하여 인민재판을 받고 정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 바로 이런 사태 속에서였습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들로서 기회만 있으면 복음을 전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허구를 비판하고 폭로하던 동인 동신 형제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공격 순위 최우선이었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두 아들의 장례식을 한꺼번에 치러야 했습니다. 부모 된 사람으로 어찌 가슴 터질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손 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열 가지 감사의 조건을 말했습니다. (1)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 순교자가 나오게 하신 것, (2)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이런 보배(순교자)를 내게 주신 것, (3)3남 3녀중 가장 아름다운 첫째와 둘째를 하나님께 바치게 된 것, (4)한 아들도 귀하거든 두 아들을 순교자 반열에 세워주신 것, (5)예수 믿다 누워죽는 것도 감사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당한 것, (6)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게 된 것, (7)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주신 것, (8)두 아들 순교를 통하여 무수한 천국의 아들이 생겨 질 것, (9)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여유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신 것, (10)나에게 분에 넘치는 큰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반란이 평정되고 난 다음 두 아들을 죽인 안 재선이라는 청년이 사형 선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을 찾아가서 무죄방면을 간청해서 허락받고 결국 안 재선을 손 재선이라 이름까지 바꾸고 자기 아들을 삼았습니다. 용서가 빚어낸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후 사람들은 손 양원 목사님을 일컬어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의 이 원수사랑 이야기는 한국 교회 역사가 지속되는 한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줄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아주 심각한 질문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그때 베드로가 왜 이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아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도저히 상식이나 경험 또는 당시 유대교의 관습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삶의 스타일과 교훈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용서”였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것, 간음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용서하신 일, 불가촉천민이라고 할 수 있는 나병환자를 만져 주신 것, 또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 온 탕자를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성대한 잔치까지 베풀었다는 이야기 등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또 말씀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일곱 번까지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나중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을 내려다보시고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가장 모범기도인 소위 “주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가르치시고 나서 덧붙인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여 주시리라”.

이렇게 따져보면 기독교 신앙은 용서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용서의 복음을 통하여 개인과 사회를 멸망에서 건져내게 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바로 용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용서야 말로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든 크든 용서하려고 한다면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저 놀라운 “살리는 용서의 힘”은 나를 통해서도 우리 이웃에게서 이루어지고 열매 맺게 되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일”인줄로 믿습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을 보면 다윗이 또 한번 자기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해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추종자들로서는 마치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듯이 다윗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행동 하나하나가 통상적인 것이 아니라 상식을 초월한, 이럴 테면 전적으로 하나님께 붙잡혀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땅의 백성으로 처신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백성답게 살았기 때문에 아직도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생활 습관에 빠져있던 다윗 추종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고 하나님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끈질기게 노리면서 추격하고 있는 그 사울을 다윗은 용서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진 한가운데로 들어갔는데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울이나 그 군인들도 너무 피곤해서 진을 치고 나서 곧바로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보초까지 모조리 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다윗일행이 그 진영 한 가운데 자고 있던 사울왕의 무기인 창과 물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다윗 일행이 사울에게 접근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을 보고 측근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농담으로 하는 말이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말을 씁니다. 원수 사울의 운명이 다윗과 그 일행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원수 갚을 기회가 왔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측근의 말처럼 “하나님이 오늘 그 원수를 다윗의 손에 넘긴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취한 행동은 보복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사태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이라도 되는 양 처리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윗에게 사울은 원수였지만 오늘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까지도 내 기준에 의하여 정죄하고 심판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다 용서해 주셨는데도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우기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혹 재판을 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삼심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상급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하급 법원에서 그것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은 모든 재판의 최종 판결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법원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으면 이미 최종 판결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급 축에도 들 수 없는, 아니 같은 피고석에 앉아있는 내가 감히 하나님의 판결을 뒤집으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신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고 가던 종이 자기가 탕감 받은 일 만달란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해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주인은 다시 자기 종을 소환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네 친구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줄 수 없었더냐?” 그래서 그 악한 종을 재수감하고서 그 일만 달란트를 다 갚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도무지 용서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재소환 당할 위치에 서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속히 가서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3. 우리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한 가운데 분노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쓴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정도가 심하게 되면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가지게 되고, 결국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것은 또 자기 자신을 망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분노 때문에 우리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너희 죄가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러 가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쓴 뿌리는 우리 육체까지도 해칩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받게 되는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위궤양이나 편두통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가득 쌓인 원한이 불면증의 원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의학자들은 이런 분노가 정신발작을 일으키게도 된다고 했습니다. 분을 억누르는 사람이 차라리 분을 풀어버리는 사람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더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방법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 말씀대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사탄이 둥지를 틀고 앉아서 나를 주관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임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내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승리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장 무서운 병을 지칭할 때 어떤 것을 예로 듭니까? 암입니다. 우리 육체 어느 부분에 암이 자리를 잡게 되면 순식간에 우리 육체를 망치게 됩니다. 상주 있을 때 장로님 한분은 어깨에 콩알만한 혹이 생겨서 조직 검사를 했더니 근육 암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수술을 하고 또 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병으로 그 장로님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 저를 비롯해서 부쩍 암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만일 그 뿌리 그야말로 쓴 뿌리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에 깃든 분노나 원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육체의 암보다 더 무서운 영혼의 암입니다. 그것이 나의 영혼과 육체를 망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온통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그 놀라운 은총을 뼛속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 주기도문의 말씀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과 말씀, 그리고 사랑과 용서로 영혼의 암을 추방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라파”이신 우리 주님께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맡길 때 고쳐주시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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