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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애굽에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맥추절 (신 1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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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편리한 오늘날 현대인의 생활은 인간에게 전에는 불가능했던 많은 것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인간은 그 이전에 조상들이 누렸던 어떤 부분을 상실하고 맙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도시 교회가 얼마나 신앙생활 하기가 편리해졌는가 하면  반면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절기의 감사 생활입니다.

절기감사와 하나님 백성들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가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경제적으로 빈곤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정한 절기를 지키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새 지도자가 나타나 나라를 다시 일으킬 때는 꼭 절기를 회복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대하31:5-에 보면 유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먼저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 모든 소산의 첫음 것을 풍성히 드렸더니  - 바로 맥추절을 말합니다. 그러니 10절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합니다. 뿐만아니라 대하34:에 요시야 왕이 신앙개혁을 단행할 때도 제위 18년에 성전을 수리하다가 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서기관 사반이 그 율법책을 요시야 왕 앞에서 낭독할 때 요시야 왕이 자기 옷을 찢으며 율법대로 지키지 못함을 회개하고 사무엘 이후 그때까지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하였더라합니다.

그리고 느 8장에 보면 학사 에스라를 중심한 수문 앞 광장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도 율법책을 읽다가 초막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온 백성들로 하여금 초막절 절기를 지키게 합니다.

그럼 왜 하나님 백성이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 합니까?

1. 왜 하나님 백성이 절기를 지켜야 합니까?(참조/출23:14절)
성경시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수천 년의 길고도 험난한 고난을 겪어 오면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상실치 않고 지속적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앙을 지켜오고 또한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일은 일년을 주기로 이어지는 명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본래 이스라엘에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출23:14절 이하에 <2>
[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 하면서 [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 합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요 맥추절은 첫열매를 거둔 것을 감사하며  성내에 모든 사람들, 객과 과부와 고아와 함게 즐거워하는 절기요. 초막절은 밭에서 거둔 곡식을 창고에 수장하면서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고  지키는 절기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유월절은 한 해의 시작이요 맥추절은 중간이며 초막절은 한 해의 마지막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작도 중간도 마지막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짐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므로
1) 하나님 백성의 신앙과 삶의 회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2) 유대인들의 명절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축제이기보다는
그러한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축제의 근거를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명절은 선조들이 경험하였던  여호와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을 다시금 재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명절을 지켜오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선조들이 지켜온 신앙을  자신들의 삶으로 이어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에게 명절은 성경의 절기는 하나의 축제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재확인하는 과정이며 또한 자신들이 실제적으로 그러한 역사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어  신앙의 전통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맥추주일을 맞이하여 맥추절 절기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2. 맥추절 절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9절)
오늘 본문말씀에 맥추절을 칠칠절이라고 합니다.

칠칠절이란 말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실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가 지나 안식일이 일곱 번 즉 7주가 지나 그 다음날 지키는 절기로서  오십일 째 되는 날 지킨다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한 해 농사의 첫열매를 거두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서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이날에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오순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 도시 교회 안에는 맥추감사절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3> 왜냐하면 농경시대 농사짓는 사람에게 첫열매의 감사가 있지  도시 생활하는 교인들에게는 맥추감사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맥추절의 의미는 농사를 지어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추수에 대한 감사 그 이상의 의미가  맥추절 절기에는 담겨져 있습니다. 

실은 칠칠절에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자원하는 예물입니다. 이 자원하는 예물 속에 칠칠절의 신앙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물 속에도 나의 신앙의 성격과 수준이 담겨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원하는 예물은 단순히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이란 뜻을 넘어서 출23:6절에 자원하는 예물은 바로 첫열매를 말합니다.

이 첫 열매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거둔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첫 열매를 요구하십니까?  구약적으로 말한다면 첫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는  약1:18절에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첫 열매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의 삶을 의미합니다.

1)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첫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수5:10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 건너 길갈에 도착하여  그 땅에 첫 소산을 먹을 때 만나가 그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첫 땅 길갈에서 첫 곡식의 거둠은  신앙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아왔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신 것으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땅의 소산을 거두게 되었고 중요한 건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성숙한 자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맥추절 때 드리는 자원하는 예물은  첫곡식으로 떡을 2개 만들어 어린양과 함께 요제로 드렸습니다. 요제는 바로 헌신을 말합니다.  맥추절을 맞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첫열매로 드려지는 헌신되어지는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덜 익은 열매 풋 냄새만 납니다. 덜 익은 포도 사과 시기만 합니다.  <4>  덜 익은 참외 쓰기만 합니다. 덜 익은 감 떫기만 합니다. 덜 성숙한 신앙 아무짝에도 쓸데없습니다. ]
어떻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성숙한 신앙생활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렘2:3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소산 중 첫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왜? 하나님은 구속함을 얻은 성도에게 먼저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 몸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건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첫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평생 먹을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가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우리 몸을 드리면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첫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2. 바로 광야생활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수고 후 거둬들인 첫 열매는 바로 고생의 끝을 의미합니다. 이제 애굽의 종살이도 끝이 났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불신의 삶도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열매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의 삶은  바로 세상과 마귀의 종살이에서 벗어났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세상에 방황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왜?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되어져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바로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말해주며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의 종이 되어 방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삶, 의미있는 삶,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맥추절은 첫 열매 드리는 절기로서 우리 자신을 첫열매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번 맥추절을 통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첫열매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3. 이러한 맥추절의 첫열매를 드리는 영적의미는 <5> 신약교회에 그대로 살아납니다.
행2:1절 이하에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저들은 변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종노릇해서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방황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저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께 몸을 헌신할 때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농사짓는 사람은 아니지마는 맥추절의 의미를 우리 몸을 첫열매로 드려짐으로 성령의 은혜 받아 세상의 종살이와 고난의 방황하는 삶을 종식하고 하나님께 헌신되어진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칠칠절 절기를 지키라고 합니까?

3.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칠칠절 절기를 어떻게 지키라고 합니까?(10-11절) 1) 10절에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맥추절 절기 때 하나님 앞에 감사예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감사를 하되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감사할 때 첫 번째 생각해야 할 것이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대로 감사해야 된다 ]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하나님께 맥추감사절을 지낼 자격이 있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 없다고 생각하면 감사드릴 자격이 없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많다고 생각이 되면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려도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들고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물을까요?

어려운 가운데서 선물을 챙겨왔는데 가장 나쁜 질문이 뭘까요? [ 뭐하러 이런 거 가져왔노? ] 그것도 좀 나쁩니다만 그보다 더 나쁜 질문은 뭘까요? [ 이것 얼마줬노? ] 혹시 자녀들이 집안에 갖다 놔봐야 소용도 없는 물건을 선물이라고 사오더라도 제발 `이거 뭐하러 사왔냐?` `이거 얼마줬노?` 그러지 마세요. 속으로야 맘에 별로 안 들고 이것도 선물이라고 사왔냐 싶더라도 <6> 어떻게 합니까? 고맙다 해야죠. 속으론 안 고마워도, 짜증이 나도 `고맙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 너 정말 나에게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 고 묻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게 이 질문을 하신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십시오. 뭐라고 대답할 겁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는데 할 말이 없으면  이건 하나님을 굉장히 섭섭하게 하는 처사가 됩니다.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을 먼저 생각하고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나아서 믿음이 없으면  제일 부담스러운 것이 바로 물질입니다. 왜 물질이 부담스러운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게 복을 주신 대로 하는 것을 볼 때 주신 복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원하는 예물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헤아리지 못합니까? 마음을 다른데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같이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니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가 없으면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께 패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2) 11절에
[ 너와 네 네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
그러니 너 만 복받았다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네 성중에 있는 모든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특히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함께 즐거워하라 합니다.

이 말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나누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맥추절 절기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유대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을 웃기려면 고아와 과부를 웃겨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라는 말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하는 말이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크게 웃기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녀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크게 웃기고 살다간 성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7>
절기는 하나님과의 바른관계를 점검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에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소외된 자와 관계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약1:27절에「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

어려운 이웃 돌아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을 맞아 가난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조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동굴 속에 사는 박쥐는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동료에게 구걸을 하는데 자기가 먹었던 것을 토해서 굶주린 박쥐에게 준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굶주린 박쥐가 먹이를 구할 때 이유 없이 거절하면 다음에 자기가 굶주릴 때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어려운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평시에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불쌍한 이웃을 돌아본다는 것, 이것은 저축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쌍한 이웃을 돌보라는 것  우리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각 절기의 공통점을 발견함으로 또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을 알게 됩니다.

4. 이스라엘 절기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11절)
1-17절 까지 3대 절기를 읽어 보면 공통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각 절기를 지키되 2, 6, 7, 11, 15, 16절에 6번이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택하신 곳은 여호와의 임재의 장소인 성소를 말합니다.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소를 말합니다. 신약적으로 말한다면 교회를 가리킵니다. 왜 하나님은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느냐?  이스라엘 절기는 개인의 절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의 절기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공동체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더라도 공동체로서 함께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8> 먼저 교회 와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키되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5. 하나님은 맥추절 절기를 지키되 함께 왜 애굽에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까?(12절) 12절 [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 ] 왜 애굽에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까? 1) 고난 가운데 구출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구속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 백성의 삶의 저력은 바로 구속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구속의 은혜 잊어버리면 반드시 삶의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삶의 문제가 생기거든 구속의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구속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 백성에게 삶의 저력입니다.

2) 너희도 애굽에 종노릇 할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종 되었던 우리를 구해 주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추수한 곡식을 앞에 두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겠습니까? 그 때는 죽자고 일해 봐야 자기 것이 되지 않던 시절입니다. 힘써 농사지어서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일할 수 있고 일한 결과를 자신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입니다.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행복함을 느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역사를 통 털어 서민이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은 현대뿐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 중에 한자로 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점심입니다. 점심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 없습니다. 한자를 빌려서 표현하는 것이지요. 점심이란 순우리말이 없다는 것은      과거 우리 조상에게는 점심이 따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나마 점심이라고 글을 만들었어도  그냥 마음에 점 하나 찍는 것(點心)으로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어제, 오늘,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셋 중에 순우리말 표현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來日입니다. 내일의 순우리말이 없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겐 내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날 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먹으며  내일을 위해 저축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대로 먹을 수 있고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칠칠절은 성중에 노비와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봄으로  <9>  너희도 종노릇 할 때가 있어다는 것을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7월 선교의 달을 맞이하여 외국인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달이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애굽의 객이 되고 종노릇 할 때가 있었기 때문에  희 성중에 거하는 객들을 잘 대해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디아스포라 선교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 즉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디아스포라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핍박이 일자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저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바로 바울의 선교의 기지가 되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근대사도 바로 디아스포라의 역사입니다. 일제시대의 가난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흑해에 이르기 까지 흩어진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디아스포라와 같은 흩어진 나그네  즉 외국인 근로자들을 안와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미국 일본 나아가 중동 그리고 세계에 흩어져 나그네의 서러움을 경험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선교헌신 주일을 맞이하여 외국인 형제들에게 선교적 관심과 사랑의 손길로 다가가는 내일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결론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농사를 잘 짓고, 장사를 잘하며 그동안 어디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느냐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 주셨느냐는 것을  맥추절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복을 너는 성중에 노비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나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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