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솥뚜껑 콤플렉스 (마 14:1-12)

  • 잡초 잡초
  • 410
  • 0

첨부 1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솥뚜껑이 자라 등껍질하고 비슷합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착각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자라를 보고 놀랐기 때문에 솥뚜껑 같은 비슷한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일 월에 형을 죽인 동생이 8 년 만에 자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98 년 1 월에 전북 임실군 도로에서 30 대 의사가 뺑소니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그런데 뺑소니 운전자는 바로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병원 경영을 하면서 여러 차례 부도를 냈습니다. 형은 자기를 죽이고 보험금을 타서 가족에게 주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생떼를 썼습니다. 결국 시달리다가 동생은 형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형이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환청에 시달리면서 성격이 난폭해졌습니다. 동생은 제대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괴로워하던 동생은 결국 경찰에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촉탁살인죄의 공소시효도 7 년이 지나 불구속 수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죄를 짓고는 못사는 것이 이치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와 같은 이유로 사건이 벌어집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이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세례요한이 살아서 나타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세례요한을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죽인 이가 살아났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세례요한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자극을 줘도 세례요한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놀란 것은 솥뚜껑보고 놀란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 안티파스입니다. 분봉왕이란 로마가 정복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점령지에 현지인을 분봉왕으로 세워 로마에 충성을 하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로마는 이 분봉제도를 통해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유대 영토의 사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절반은 형 헤롯 아켈라오가 받았습니다. 나머지 사분지 일은 배다른 동생 빌립이 받았습니다.

본래 아버지 헤롯대왕이 죽고 아켈라오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자 동생 헤롯 안티파스는 유언장을 근거러 자기가 왕권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유언장 분쟁으로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헤롯 가문의 누구에게도 왕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형제들끼지 영토를 나누어 분봉왕으로 임명했습니다.

분봉왕은 왕보다 못한 자리입니다. 로마는 헤롯의 충성도를 보고서 나중에 왕이 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헤롯은 식민통치의 지배를 받은 조국의 분봉왕이었습니다. 자기 민족보다는 로마에 충성을 해야만 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면서 조국을 착취해 로마에 충성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헤롯이 아무리 친 로마주의라고 해도 만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헤롯은 유대의 사분지 일이 아니라 전체를 통치하고 싶었습니다. 분봉왕이 아니라 한 국가의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형 아켈라오가 추방된 후 유대의 실권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 때문에 헤롯은 사적으로 몹시 타락했습니다. 헤롯은 가족끼리 정치적인 암투를 벌였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멀리 귀양을 보냈습니다. 자기 본래 아내도 쫓아냈습니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와 살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이 로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게다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동물처럼 사는 것을 볼 때 참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거침없이 헤롯에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질타의 메시지는 백성들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포악한 헤롯을 향해 감히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타락한 헤롯을 지적하는 요한의 독설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치권의 입지가 좁아지자 헤롯은 세례요한을 잡아 가뒀습니다.

헤롯도 처음에는 세례요한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민중이 두려워 차마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형 헤롯 아켈라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켈라오는 글라피라라는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 마리암네를 버렸습니다. 이 일을 부도덕하게 여긴 유대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켈라오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아켈라오는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하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아켈라오는 로마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형 아켈라오의 정치적 생명이 끝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백성들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권력이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잡아놓고 민중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졸지에 왕비가 된 헤로디아도 교활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을 빼앗겼으나 정절의 도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행동을 보면 공범으로 볼 수 있습니다. 헤로디아의 눈에도 세례요한은 가시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가두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교활한 흉계를 꾸밉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을 맞았습니다. 헤로디아는 딸까지 앞세워 헤롯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딸은 연회에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합니다. 공주가 연회에서 춤을 추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보통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노예 신분의 여자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악을 행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표독스러운 여자입니다. 그만큼 헤로디아의 꾸미는 일이 악독했습니다.

헤롯은 흥분하여 그 딸에게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사실은 자기 동생의 딸이니 조카입니다. 헤롯은 조카에게 아버지의 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결국 헤롯은 환심을 사기 위해서 분에 지나친 맹세를 하고 맙니다.

왕에게 소원성취를 약속 받았으니 이는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이 소원을 아주 황당하게 써먹고 말았습니다. 어미의 사주를 받아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엽기적인 소원이 가냘픈 소녀의 소원이라니요? 동물을 그렇게 해도 끔찍합니다. 연회장에서 그런 끔찍한 시신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악마적인 소원이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커다란 부담입니다. 교활한 여자는 머뭇거리는 헤롯을 다그쳤습니다.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냐고 몰았습니다. 헤롯은 맹세한 말을 다시 주워 담기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이 맹세를 함께 있던 신하들 앞에서 했습니다. 맹세를 번복하는 것은 왕의 권위에 손상이 가는 일 아닙니까?

결국 헤롯은 세례요한을 내 주고 말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옥에서 참수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원대로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 그 여아에게 주었습니다. 딸은 승리에 찬 모습으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참으로 엽기적인 소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헤롯은 이 사건 이후로 사실 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으로 인한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헤롯은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헤롯은 예수님 소문을 듣고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헤롯이 강박증에 시달렸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헤롯이 이런 강박증에 시달렸다는 증거가 또 있습니다. 나중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다가 헤롯에게 넘겼습니다. 그 때 헤롯은 그 판결을 맡지 않습니다. 다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돌려보냅니다. 헤롯은 본문대로 예수님에게서 세례요한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건드려 또 다시 연관 짓고 싶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솥뚜껑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 받습니다. 어떤 죄인도 죄에서 놓여 자유인이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솥뚜껑 콤플렉스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 이름만 들어도 부담스러워합니다.

여러분! 전도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휘젓는 것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세상 쾌락에 휩쓸려 정신없이 삽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 믿으라고 해보십시오. 세상 즐거움을 끊고 교회에 다니자고 해보십시오. 아주 부담스러워합니다.

요즘 시내와 강들이 거의 오염되어 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것 같아도 작대기로 바닥을 훑으면 부유물들이 떠오릅니다. 생물이 살수 없을 지경으로 물이 혼탁해지고 맙니다.

이와 같습니다. 죄 짓고 사는 세상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작대기로 강바닥을 훑는 것입니다. 바닥에 가라앉은 온갖 오염물질들을 놔두면 어찌 됩니까? 물도 썩어 버립니다. 물고기들이 살 수없는 죽음의 강이 되고 맙니다.

교회를 멀리하고 세상 즐거움을 따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별일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점점 죽음의 수렁에 빠지는 것입니다. 썩은 바닥을 훑으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긁어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수록 솥뚜껑 콤플렉스가 심합니다. 예수 믿자하면 반항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 온갖 방법으로 저항합니다.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전도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래도 자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전도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연약한 사람입니다. 겁내지 말고 예수님 이름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비폭력입니다. 칼과 몽둥이 보다 사랑과 인애를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언제나 이 부드러움이 칼과 폭력을 이겨왔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순한 양 같이 끌려가 처형당하신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형장에 넘긴 빌라도는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헤롯도 꽁무니를 뺐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형틀에 단 로마 지휘관도 그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 속에서 십자가가 어떤 폭력 앞에서 진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십자가는 승리했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 부흥회를 엽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부흥회 주제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영적 강자로 거듭나라!’ 주제만 봐도 너무 귀한 말씀을 주실 것으로 기대됩니다.

부흥회 포스터를 만들면서 해안에 올라와 앉아있는 어선 사진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이 사진이 유독 끌렸습니다. 처음에 포스터를 만들어서 아내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어선이 무슨 뜻이냐고 묻더군요. 그림만 보고도 감이 오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 그 밑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난파선 같은 영혼의 회복을 위하여”

여러분 어쩌면 지금 우리가 이런 난파선 같은 심령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목 놓아 울며 회개한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두 손을 높이 들고 우러러 찬양해 본적 언제입니까? 설교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감동을 느낀 적이 언제입니까?

저는 압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지를···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지각을 하고 있는지. 어쩌다 사정이 생겨서 예배에 늦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주 그렇게 많은 분들이 여전히 지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심령이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영혼이 곤고한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배 지각은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복과 은혜를 구할 면목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부족한 모습은 이 세상을 살면서 승리하지 못합니다. 어느새 슬금슬금 죄를 짓고 삽니다. 지금 신앙의 정로에서 빗나간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족을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경성해야 합니다. 영혼이 지쳐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내려놓아야 합니다.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다시 생기 넘치는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먼저 교회에서 있던 일입니다. 제가 길을 가다가 어느 교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저를 보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말을 더듬습니다. 낌새가 무슨 좋지 못한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 같았습니다. 다행인지 저는 보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제가 봤을까봐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의 흔들리는 음성을 듣고 대충 눈치를 챘습니다. 바로 솥뚜껑 콤플렉스입니다.

여러분! 죄 짓고는 못삽니다. 이 죄를 빨리 청산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죄는 회개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묵은 때를 벗기려면 특수 화학세제를 써야 합니다.

이번 부흥회는 저와 여러분의 묵은 죄까지 깨끗하게 씻음 받는 집회가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내 영혼의 새로운 각성이 되기를 사모합시다. 삶의 고민과 문젯거리들이 해결되길 바랍니다. 오래된 지병이 낫는 기적이 나타나길 원합니다. 전도의 줄기를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내 영혼에 똬리를 틀고 있는 쓴 뿌리가 뽑히길 바랍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신앙생활이 정성과 열심을 내는 헌신자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황금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