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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감사 인생이 되라 (신 16: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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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감사 인생이 되라
본문 : 신명기 16장 9-17절

(9)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오늘은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중 맥추절은 봄에 보리나 밀을 수확한 후 드리는 감사축제입니다. 흔히 유월절 이후 일주일의 일곱 번, 곧 7 X 7 = 49 일 후에 드리는 절기라고 해서 칠칠절이라고 하고 또 50일째라고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절기상으로는 오순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우리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켰습니다. 한국교회는 봄의 보리 추수가 끝 날 무렵, 1년의 전반기를 마치고 후반기를 시작하는 7월 첫 주를 맥추절로 지킵니다. 감사절기들과 관련된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감사의 참된 의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복 주심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세 절기를 주신 이유는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예컨대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 해방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이 자기 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12절 말씀대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들은 원래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종 되었던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는다면 현재의 어떤 어려움에도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 사회도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더 잘 살게 되었습니까? 50, 60년대만 해도 보리 고개라는 것이 있었고, 대부분 자기 집도 없이 쪽방 같은 곳에서 세를 얻어 살았습니다. 온 가족이 한 방안에서 자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는 않지요. 대부분 자기 차도 있고, 자기 방도 있으며, 먹는 것도 부족하지 않지요. 그러나 오히려 우리 삶은 과거보다 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1998년도에 런던 정경대학(LSE)에서 국가별 행복지수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모두 54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주관적인 만족도를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놀라왔습니다.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한 나라는 방글라데시였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와 국민소득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연중 홍수로 고난을 겪는 나라이며, 콩나물시루처럼 인구 밀도가 최고인 나라입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도 많고, 생활조건은 최악입니다. 바로 이런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1위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방글라데시는 2002년도 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3위는 나이지리아 였고, 5위는 인도였습니다. 전혀 모자랄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미국은 꼴찌에서 열 번째인 45위, 가까운 나라 일본은 44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스위스는 41위, 예술의 나라 프랑스는 37위였습니다. 영광스럽게도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을 제치고 23위를 차지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진국 순서로 행복지수가 높았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우리나라는 살기 좋아졌습니다. 먹는 것도 옛날의 왕후장상의 식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6,70년대만 해도 좁은 단칸방에 한 식구가 모여 생활하고 잠을 잤습니다. 위생 관념은 엉망이었고 대부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자동차는 꿈도 꿀 수 없었고, 텔레비전만 있어도 부유층에 속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우리는 행복한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과거만큼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부채만 있을 때는 선풍기만 있어도 감지덕지 할 것 같은데, 이제는 에어콘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듭니다. 비교의식도 문제입니다. 일전에 하버드 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남들이 2만 5천 달러 받을 때 자신은 5만 달러 받는 경우와, 남들이 20만 달러 받을 때 자신은 10만 달러 받는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대다수의 학생들이 전자의 경우를 더 선호한다고 답했습니다. 생활수준이 높더라도 비교가치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과 같은 감사 축제를 통해서 자기들의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유월절에는 맛없는 무교병을 먹고 쓴 나물을 먹게 합니다. 옛날 출애굽 당시 어려웠던 형편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지요. 초막절에는 일주일 동안 자기 집을 떠나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살게 합니다. 40년 광야에서의 힘들었던 삶을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삶에 감사하십시오. 지금의 삶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잘 드는 예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예화를 생각할 때마다 제 인생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날 장미꽃이 하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가시를 주셔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너에게 가시를 준 적 없다. 오히려 가시 나무였던 너에게 장미를 주었다” 같은 인생을 살지만 한 사람은 ‘가시 때문에...’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가시 같은 자기 인생에 장미로 아름답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천국은 감사하는 자의 심령 속에 있습니다. 

맥추절은 봄 추수 후 드리는 감사제요, 초막절은 가을 추수를 마친 후 드리는 감사제입니다. 이는 먹고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고백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따뜻한 햇볕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 노력이라는 것은 1%에도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모든 것이 자기 손으로 된 냥 우리는 자기 것이라 주장합니다. 농사를 예로 들어 보지요. 먼저 씨앗을 보세요. 그 씨앗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토지는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그 안에 있는 거름은 누가 뿌려 놓은 것입니까? 적절한 때에 햇볕과 비를 준 자는 누구입니까? 농기구를 자기 손으로 만들었습니까? 시장이란 시스템을 만들어 열매를 팔아 다른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누구의 솜씨입니까? 인간은 서로 얽혀 있고 서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자기 노력이라고만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남 저음 목청으로 나지막이 깔린 목소리로 설교하면 온 청중이 빨려듭니다. 저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못하다 생각했기에 참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 사무실에 갔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분 동생이 거기 있었는데 목소리가 똑같아요. 생긴 것도 똑같이 가난하게(?) 생기셨어요. 그때 제가 생각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 다 물려받은 거구나.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절기들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웁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 주셔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감사에 대한 보답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빈 손으로 와서는 안 됩니다. 16절에서는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가졌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의 일부를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역대기서에서 다윗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담은 아주 전형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역대상 29장 14절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감사 절기를 드리며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감사

우리는 감사하되 이것이 자기만 즐기는 이기적인 감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객과 고아와 과부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가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감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땅과 큰 민족의 축복을 주심으로 이스라엘 민족만 잘 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서 다른 이웃도 축복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워렌 버핏’이라는 세계 두 번째 가는 부자가 자기 재산 37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37조 원을 빌 게이츠가 운영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부가 마치 왕조적으로 세습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현 부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상속세 감세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 받은 몇몇 소수가 출발선에서 한참 앞서 달려 나가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얼마 안 되는 재산세도 더 못 내겠다고 버티는 우리나라 부자들에 비하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버핏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부자인 빌게이츠도 자선사업으로 유명합니다. 빌 게이츠는 기업재산이 아니라 순수 자기 사유재산 중에서 매년 2조 원 이상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전 재산 55조 원 중 120억 원만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선 사업에 쓰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빌 게이츠의 자선금은 주로 에이즈 퇴치나 저개발국의 의료 백신 개발 등에 사용되는데 게이츠 재단이 가난한 국가의 백신사업을 집중 지원하면서 지금까지 최소한 7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게 의료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미국 사회가 강한 것은 이런 부자들의 윤리의식이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로는 강철왕 카네기나 석유와 록펠러도 기부로 유명합니다. 이들은 사실 기업사냥꾼들이며, 이들 때문에 독과점법이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벌어들인 부를 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악명은 곧 사리지고 말았습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부자인 채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부자의 인생은 두 시기로 나누어야 한다. 전반부는 부를 획득하는 시기이고, 후반부는 부를 분배하는 시기여야 한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 등의 명언을 남기며 자신이 죽을 때는 한품도 남김없이 도서관과 공공시설, 이웃을 위한 자선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신 이유는 혼자만 잘살라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하게 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진정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자기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아직 이런 건강한 부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부자는 자기 것을 움켜쥐고 내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 중에 그렇게 존경받는 부자가 없습니다. 중산층이 많은 이 곳 강남은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닙니다. 

물질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맥추절을 맞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손에 쥔 열매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즐거움의 감사

짧은 절수지만 절기와 관련된 오늘 본문에는 ‘즐거워하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초막절을 언급한 14절 하반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즐거워하되)” 15절 하반절입니다.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불안하고 고단한 현실에서 위로처를 찾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살 때 또 하나님께 바치며 살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에 감사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누며 살 때 행복하기에 이웃과 더불어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일곱 날 빛을 주신다”(사30:26)

감사도 훈련입니다. 기도 훈련 하듯이 감사도 자꾸 습관적으로 반복하다보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궂은일에 감사하면 그 궂은일이 지속되는 시간이 단축되고, 오히려 우리의 축복의 발판이 됩니다. 형통할 때 감사하면 그 형통함이 오래 지속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란 말은 우리 신앙인들의 습관적인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 인생이 됨으로써 행복하고 축복받는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이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누가 “개척교회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 집사람과도 서로 “즐겁게 하자”고 격려합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도 개척교회 티를 안 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반 개척교회의 전형이 지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항상 물질과 사람에 쪼들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힘드니까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가정이 파괴되고, 목회자가 자신감이나 믿음을 잃기 쉽습니다. 비굴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께 떼를 썼어요. “저 그렇게 못하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저는 즐겁게 목회하길 원합니다. 하나님도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쪼들리지 않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개척교회는 개척교회인지라 빈자리를 보면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속으로 다짐합니다. “즐겁게 하자”

즐거움이란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저는 개신교 목회자들이 너무 고생한다고 생각해요. 목회자도 스님이나 신부님들처럼 구도자의 삶만 살았으면 좋겠는데 형편이 그러질 못합니다. 교회를 성장 시켜야 한다는 기업가적 자세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기독교 목회현장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대형교회 목회자들 중 크건 작건 병에 걸리지 않은 분들이 드문 것 같습니다. 제가 섬기던 이전 교회 목사님도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쉴 틈 없이 일하셨는데 그 게 화근이 되신 것이지요. 스님이나 신부가 암에 걸렸다는 말은 저는 잘 못 들었어요. 마음의 평화와 수양을 추구하는 종교인이 이런 병이 걸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을 즐거운 목회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가정이 즐거워집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목회도 즐거워집니다. 내가 즐거워야 창의력도 나오고 추진력도 생겨 일이 잘 됩니다. 일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시55:22)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처럼 우리의 행복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15)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는 인생이 되므로 우리 늘 행복하며 즐거운 인생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은혜가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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