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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딜자라도 (합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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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딜지라도 
하박국 2:1-4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행사에는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아니마밈’의 뜻은 '나는 믿는다'입니다. 원래 이 노래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된 노래며, 또한 그곳에서 불리워진 노래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부르며 위로를 받았던 노래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그런 찬송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자신의 동료들이 그대로 끌려서 가스실로 나가는 것을 봅니다. 죽음을 향해서 끌려가는 그 모습을 볼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은 이 찬송 뒤에 한 절을 더 넣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추가된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한 외과의사는 절대로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답니다. 그는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단정히 행하고 죽음을 앞둔 시간이지만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가면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믿음으로 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지 아니하고 수용소 문을 나오게 됩니다. 나오면서 그는 마지막 절을 고쳐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그래서 믿음을 포기하는 자가 많다'라고 불렀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세상, 정말 기다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들의 시대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늘 즉석에서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문화를 잘 반영하는 상품 중 하나가 바로 즉석복권 아닌가 합니다. 예전에는 주택복권이라고 해서 주말에 뺑뺑이를 돌리며, 쏘세요.를 외쳐대던 그 복권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동전으로 긁어 확인하는 그런 복권의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인내’나 ‘끈기’는 옛말처럼 되어 버렸다.

이런 조급한 성향은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즉석에서 확답을 듣고 싶어 한다. ‘하나님, 지금 대답 안하시면, 관둘랍니다.’ 일종의 협박이다. 이런 협박성 기도를 남발하며, 몇 번 기도하다 안 되면 대충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가고 그다음 기도로 넘어간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생활이다.

기다림의 의미가 있다. 아니 기다려야만 될 때도 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자리에서 채근하고, 다그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대역무도한 죄악이다. 농부를 보라, 그가 씨앗을 뿌리며 다음날 열매가 안 열린다고 밭을 뒤집어 엎는가? 아니다. 그는 기다릴 뿐이다. 이제 그에게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 그저 기다릴 뿐이며, 그 가운데 기쁨의 때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뿐이다.

1) 이럴 수 있습니까?

하박국 1장에 나오는 기도는 한마디로 ‘하나님, 이럴 수 있는 겁니까?’이다. 두가지 질문이 나오는데, 하나는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을 괴롭히는데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참는 것은 둘째치고, 어떻게 당장은 악인이 더 잘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도 하나님의 태만함을 탓하는 원망이요, 하나님의 무능을 밝히는 불신앙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식이다.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

우리들은 어떠한가? 우리들도 세상에서 이럴 수 있는가라고 하며 의분을 터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악한 민족이 선한 백성을 괴롭히고, 착한 나라가 못살고, 고약한 나라가 오히려 강대국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지 않은가?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독일과 일본은 지금 너무나 잘살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 밑에서 고통당하고, 괴로움 당한 사람들은 오히려 못살고, 가난하고, 못배우고 살지 않은가? 심지어는 자신들이 얼마나 끔직한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은가? 이럴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박국의 입장이 그랬다. 그는 강포하기 그지없는 갈대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국인 이스라엘을 강탈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가만두는 것이 더욱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하박국의 이해되지 않음에 대한 몸부림이 1장이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결을 하는가? 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을 반찬으로 삼는데 나의 아까운 시간을 흘러 보내버리지는 않는가?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닌가? 스스로 체념하고, 힘없는 삶을 살지는 않는가? 별 수 있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손심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겠다고 고개숙이고 들어가진 않았는가?

2) 기다리라.

하박국은 세상의 모든 불합리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1절을 읽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실제로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도 아신다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이다.

하박국은 모든 문제를 뒤로 하고 높은 성루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기다리고 보리라고 한다. 내 능력의 한계에 다다른 일이 있는가?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가? 그리하면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했으면 문제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 성루로 올라가라. 그 문제로부터 빠져나와, 벗어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헛된 약속을 결코 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믿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세시는 우리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 보다도 우리를 염려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응답을 살피며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렸지만 10년이 되도록 아들이 생기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진 노부부는 그만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으며, 그 일로 그 가정에 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고 기다리지 못한 조급함의 쓴 열매를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혹시 이런 아브라함을 보고  답답하여 ‘나 같으면 끝까지 참고 기다렸을텐데’ 하고 나무라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아브라함이 우리보다 믿음이 적어서 그랬을까요? 그도 나이 먹어가는 노인으로서 기다림에 지친 한 평범한 인간이었고 우리들처럼 마음이 조급해져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들의 나이와 신체적인 한계를 더 크게 보았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정한 때를 바라며 끈기 있게 기다리는 훈련이 요구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기도하며 끈기 있게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기도하여 하늘의 불이 내려와 제단위의 제물을 불사르는 응답을 받았던 엘리야가 이번에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3년6개월 동안 비가 그친 그 땅에 비가 오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땅에 꿇어 엎드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기도하던 엘리야가 사환에게 ‘비의 소식이 있는지 바다 쪽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는 사환의 말에 ‘일곱 번까지 다시 가서 보라’ 하며 계속 기도하는 모습에서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믿음의 기도를 보게 됩니다.

기도의 아버지,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죠지 뮬러 목사님의 친구들을 위한 기도는 유명한 일화로 전해집니다. 뮬러 목사님이 5명의 불신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5년 후에 회심하였고, 두 명이 10년 후에, 그리고 35년 후에 한 명이 더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명은 뮬러 목사님이 죽기까지 52년간을 기도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뮬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친구가 자기를 위하여 평생 52년간을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회심하고 예수 믿기로 결심했고 뮬러 목사님이 해왔던 고아원 사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기간 내에 일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조급하여져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해놓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수습해주십시오’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기다림을 배우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을 얻기까지 40년간 광야에서 기다림을 배워야 했습니다. 바로의 궁궐에서 자라났던 모세 역시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는 미미한 존재로 지내왔으며, 다윗은 어린 목동 시절에 왕의 후보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30세에 왕이 되기까지 사울의 미움과 시기와 살해의 위협을 견디며 광야에서 기다림의 훈련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기다리도록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지연작전은 우리를 잊으셨거나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튼튼하게 하고 정하신 때에 적합한 일을 맡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급한 성질이나 믿음 없음 그리고 짧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고 놓치는 때가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며 언젠가는 이루십니다. 우리 세대에 안 되면 다음 세대에라도 이루십니다. 지금 불신 가족이나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는 분이 있다면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끈기 있게 기도합시다. 응답이 더디다고 너무 빨리 기도를 중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어떻게 대답하실까 기대하며 기도의 파수대에 서서 끈기 있게 바라보며 기다립시다. 

3) 믿음으로 살아라

하나님은 대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계시는 흐릿하지 않다. 분명하다. 확실하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 세월이 흐르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확실한 응답이다. 하나님은 너희를 괴롭힌 갈대아인의 힘은 잠시 잠깐이라고 말씀하신다.

삶의 두 가지 방식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이성의 방식이고, 하나는 믿음의 방식이다. 하나는 불신앙의 방식이고, 하나는 신앙의 방식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배척한 채 제멋대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거기에 나의 삶의 방식을 비추어 판단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살 수도 있다.
4절을 읽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너무도 중요하여 신약성경에 수차례 인용이 되고 있다.

이성으로 사는 사람들, 불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교만하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변화가 없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중심이 뒤틀려져 있다. 뒤로 물러가 침륜, 즉 침체에 빠진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왜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산으로 갔는가? 그 왜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했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이제까지 무엇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왔는가? 오직 믿음의 원칙에 입각해서 살기를 바란다. 왜냐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원칙에 입각해서 사는 자는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 있는 삶을 산다. 역동적인 삶을 산다. 권능 있는 삶을 산다.

삶의 침체를 경험하는가? 문제는 우리의 믿음에 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의 향한 믿음이 회복되기를 갈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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