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삶의 주인은? (눅 11:24-26)

  • 잡초 잡초
  • 236
  • 0

첨부 1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헌신을 할 때 제값을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가까운 사람이나 또는 주변의 친지들이 말리다가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런 말씀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만합니다. 먼저 신앙에 깊이 빠진다는 것을 그분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이단 집단이나 사교에 빠져서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있습니다. 또 집을 나가서 집단생활을 하며 집문서, 땅문서 모두 바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도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신앙에 깊이 빠진다고 하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깊이 빠지는 것은 그만두고 아예 시작하는 것도 말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빠지지 말라고 했을 때에 어떤 배경이 있을까요?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중용의 도를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냉담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남이 하는 만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나 생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설교도 결단을 강요하며 부담을 주는 설교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쪽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신앙은 그 시작부터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상태를 싫어합니다. 성경적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고 그 때 신앙은 제값을 합니다. 결단 없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으며 헌신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물방울은 결국 큰물이 된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 하나의 물방울이 생겼습니다. 그 물방울이 뭉쳐 북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라인강을 타고 북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동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다뉴브 강을 통해 흑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남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로네 강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물방울은 똑같은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극히 미소한 방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수 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다른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이 갈라지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차이가 점점 뚜렷해지다가 결국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또 한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이 후회 없는 인생, 낭비 없는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방향을 잘 잡아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이 펼쳐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들의 삶은 진정 보람 있고 축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를 아끼시며 병자를 고쳐주시며 외로운 자를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가슴을 가지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의 주인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리고는 이웃집 아들을 의심했습니다. 걸음걸이를 보아도 안색을 보아도 말투를 들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습니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골짜기를 지나다가 그는 잃었던 도끼를 찾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보니 동작과 태도가 전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때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주인은 정의와 진실에 가까운지 한 번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뒤 계속적으로 양육되지 못할 때 파괴적인 결과가 따라올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쉴 곳을 찾아 거하기 위해서 계속 헤매다가 전에 살았던 사람에게 돌아와 보니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서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다가 거하여, 그 사람의 형편이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귀신을 쫓아내심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그 유익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더 악하게 될 것입니다. 이같이 말씀하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예수님을 낳고 키운 어머니가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참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키는 자에게 있으므로 그분의 가르침에 바르게 반응할 것을 요구하셨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빈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들어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다시 자기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까지 집에 데려와서 거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이 집을 점령하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 우상숭배는 버렸으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으므로 영적 동공상태가 되어 그들의 심령에는 더 악한 귀신들이 들어와서 살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악은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것은 개인으로 말하면 회개한 상태를 말하고 옛날의 잘못된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마음을 청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마음을 지배할 주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생각이 사람을 만듭니다. 즉 좋은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쁜 생각을 안 해야 하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 생각을 선한 일, 좋은 일을 계획하고 선한 일로 생각을 채우면 악한 생각이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생각 자체도 귀하게 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독교의 진리는 '하지 말라'의 진리라고 오해하는데 기독교의 진리는 '하라'의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주신 계명은 아주 적극적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마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악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안일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되고 주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을 보고, 행동도 합니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지기도 하고 안 들려지기도 하고, 이렇게 듣기도 하고, 저렇게 듣기도 하고,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내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고 했고,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는데, 사실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걸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이제 바른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윤리학에서는 생각과 마음이 함께 하지 않는 행위를 행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몸만 움직인 거니까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거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

사람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사회학적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며 그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한 사건에 부딪힐 때입니다. 바로 배우자를 잃거나 자녀를 잃는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합니다. 또한 자신감이 없고 자기만족이 없을 때, 그리고 일에 대해서 불만할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내가 왜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생의 의미를 잊어버릴 때, 그만 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건강이 허약해 질 때, 허약해지기 시작하면 가속화되면서 점점 무너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비관주의가 그 사람의 마음을 자리 잡게 되면 만사가 어둡고, 만사가 괴롭고, 만사가 짜증이 납니다. 도대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벌써 자살을 하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기에 죽음을 위한 행동을 과감하게 거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고 싶지 않으니 남의 생명도 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마음을 누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이 같이 기울어진 마음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일까요?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해야 될 사람이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 졸고 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에는 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하고 마음과 의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이성과 마음은 별도라고 합니다. 지식과 감성이 다릅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별도로 갑니다. 이 따로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감성이라고 하는, 이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보다 더 원초적입니다. 내 마음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별도이며, 이 속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세계, 더 원초적인 그런 속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이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네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해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주권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나를 맡기고 있습니까? 그 분의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기에 감히 더러운 귀신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성령께서 그 마음에 들어와 계시지만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주님이 도전하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간구할 때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우리는 생기가 넘치고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사람의 생각을 초월한 평강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나아가서 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먼저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거룩한 능력의 부으심이 없이 우리의 마음 상태는 유령 같은 빈 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성령께서 내 속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면 주님께서 원치 않는 것들을 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주님께 서원하시는 것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들을 내가 찾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립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십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장악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은 더러운 귀신이 다시금 접수한 집처럼 더 심각한 자리로 전락할 것입니다.

어느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교인들의 95%의 상태를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의자의 앉은 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돌아가는 정도의 사람에 불과하고, 단 5%만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은 어떨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심각한 영적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돌아오지 않고서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약간의 변화가 주어집니다. 주일에는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도 나오고 구역예배, 남성다락방, 부부다락방에도 참석하고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 가지고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회개만 할 것이 아니고 참 믿음을 가져야 하며 옛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를 이제 맺었다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주님의 기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이제 주님이라고 불렀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소제되고 수리된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철저하게 새 주인의 지배를 받을 때에 여러분이 변할 수 있고 여러분이 새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회개의 글을 소개합니다.

“주님, 우리의 괴로운 호소를 들어주소서. 자기 속에 갇혀 죄수가 되어 있는 흉한 꼴에서 건져주소서. 자기 자신의 소리밖에 못 듣는 우리의 귀, 자신의 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 자신의 아픔밖에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무딘 감각을 세련되게 해주소서. 주님, 우리를 이 욕심스러운 몸에서 해방시켜주소서. 내 창자를 얼마나 채울 것인지, 나를 남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온종일 연구하는 이 욕심스러운 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소서. 주님, 우리를 이기적인 마음에서 풀어놓아 주소서. 내 마음은 내 생각, 내 아이디어, 내 의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의견은 들을 귀가 없으니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해방시켜주소서.”

주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주님을 입술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고 행하고 있습니까? 악한 영은 보이지 않는 환경의 배후에, 내 인격의 배후에, 삶의 부분 부분에 믿는 자나 교회에 나오는 자일지라도 두루 삼킬 자를 찾으며 나의 약점을 잘 알고 그것을 틈타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그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으로 채움 받을 때에  악한 죄, 환경, 자신, 사탄을 믿음으로 이겨 나갈 수 있으며 그래야 바른 삶, 능력 있는 삶, 이기는 삶을 살며 믿음생활에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며, 참된 기쁨을 체험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의 부분에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성령의 통제를 받는 성숙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정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