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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구원의 역사를 완성되게 하는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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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누가 17:17,18) 

  신앙이란 믿는 이와 믿음의 대상과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 자신이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모습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역사이며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관계는 하나님의 배려와 은혜 속에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며 찬양은 이 관계의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을 더욱 깊이 이루게 하는 교제이며, 말씀은 그 관계성을 바로 세워주는 것이며 감사는 그 관계성을 성숙케 하는 헌신이며 드림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는 중, 10명의 문둥병자를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긍휼히 여겨 고쳐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제사장을 만나러 가던 중 깨끗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그들은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돌아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고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감사에 대하여 우리 신앙인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배울 수 있고 아울러 감사에 대한 깨우침을 갖게 됩니다. 

  1. 감사하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똑같이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사장에게 가다가 다같이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9명은 주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앞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받는 것에 비해 감사에 인색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열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한사람이 감사하고 열 번 은혜를 받으면 한 번 정도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은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있는 것처럼 “원수는 돌에 새기지만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이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감사하지 아니한 아홉 명의 문둥병자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천한 사마리아인이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갖춘 사람들에게는 감사의 삶이 없고 사마리아인과 같이 제대로 갖출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뜻밖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감사할 줄 모르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감사할 조건을 많이 가진 사람이 오히려 감사하지 못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할 수 없다는 것,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많이 가졌고 배웠다 하더라도 감사하지 못해 불행한 사람이 많은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감사가 적은 인간세계를 향하여 예수님은 본문을 통하여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한 명의 사마리아인과 같이 설사 부족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소수의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2. 믿음이 있어도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 간구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확신과 순종하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제사장을 찾아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인다는 것은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인데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확신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용기와 순종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중 9명이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이 아홉 사람은 모두가 유대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사람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만한 사람이 유대사람입니다. 이 유대사람들이야 말로 아브라함 자손들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들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 사람 전부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마음 가운데 꼭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잘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옛날 속담에 “외아들이 밥투정을 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을 많이 주는 귀하게 자란 외아들이 더 감사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이 감사할 줄 몰랐던 다른 형태는 받을 줄만 알고 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 당시 죽은 자 보다도 더 심각하게 취급된 문둥병에서 치유되는 은혜를 받고도 감사드리는 자가 되지 못함은 받기만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항생제 ‘스트렙토 마이신’을 발명한 와크스맨 박사가 노벨상을 타기 위하여 스톡홀름에 갔을 때, 의외의 방문객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그를 감동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젊은 아버지와 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기계공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들어온 어린 딸의 품에는 예쁜 카네이션이 다섯 송이가 안겨져 있었습니다. 그 다섯 송이의 꽃을 와크스맨 박사에게 드리는 어린 딸을 바라보며 젊은 기계공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꽃 한 송이는 각각 내 딸의 1년씩의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5년 전에 뇌막염으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 딸이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와크스맨 박사께서 발명하신 항생제, 스트렙토 마이신이 우리나라 스웨덴에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그 약으로 인해 나의 딸은 이렇게 살아날 수 있었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린소녀의 키스를 받은 와크스맨 박사는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다섯 송이의 꽃을 감격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노벨상을 탄 후에 신문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스웨덴 황제 구스타프 아돌프 폐하로부터 받은 노벨상 보다 다섯 송이의 카네이션이 더욱 큰 명예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는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 은혜가 당연한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장미꽃 다섯 송이를 드린 감사처럼 참된 감사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믿음을 가지되 감사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3. 감사는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믿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을 보며, 많은 사람이 감사의 생활을 잊음으로 그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의 위대함은 하나님을 믿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더욱 크고 바른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감사함으로 옷입혀진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하는 사마리아 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고 하셨습니다. 감사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곳에 더 깊은 믿음이 이루어지고 더 깊은 교제가 성취되고 더욱 큰 즐거움이 넘칩니다. 감사하는 부부에게 부부의 더욱 깊은 관계가 이루어지듯 말입니다. 감사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기도가 성취되도록 하고 더욱 기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합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이 넘쳐 서로를 자랑하는 것처럼, 자식이 부모에 대한 감사가 넘쳐 부모를 자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감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적이다” 라고 했습니다. 틸리케는 “감사하는 생활은 그것 자체가 벌써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수 있을 때 상대에게 자신을 겸손히 낮춥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감사는 겸손함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29).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5).

  한 사람이 목사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마귀와 예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멉니까?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며 또 우리에게서 떠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그 질문을 받고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깜깜한 방에서 불을 켜 보십시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집니다. 그렇다고 어둠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다시 불을 끄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빛과 어둠간의 거리는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나타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오는 시간은 순식간입니다. 마귀는 결코 구만리장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이 있으면 마귀는 그 즉시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마귀는 순식간에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빛이 떠나지 않고 늘 있으려면 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함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행복 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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