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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신 3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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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그마치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나중에는 노예생활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을 보면 그들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거기다가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한다고, 아이를 낳을 때 여자아이면 살려주고 남자아이면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려졌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학대당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감격과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우리도 이제는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내 나라, 내 이름으로 살아 갈 수 있다.”
이 감격과 기쁨으로 이집트를 떠난 그들을, 모세가 인도한 곳은 바닷가였습니다. 거기다가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 오고 있는 겁니다. 앞은 바다라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집트의 바로 군대들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그만한 군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꼼짝없이 붙잡혀 뒤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아마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면 그동안 겪었던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온 거 아닙니다. 출애굽기 12:35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이집트 사람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요구하였고, 36절에 보면,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요구대로 다 내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서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주고 싶어 준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사람에게 환심을 사도록 하셨기에 그리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 돌아가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요. 차라리 이집트에서 그냥 종살이 하며 살았던 게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전에 그랬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가 일이 더 많아졌잖아요. 그동안 벽돌 만들 때, 그래도 짚은 공급해 주었는데, 이제는 직접 가서 짚을 모아 와야 하는 수고가 더 늘었잖아요. 그러니 이제 이집트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 차라리 그냥 있었던 것만 못하게 된 거지요.

그런데, 그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래서 울고불고 난리치는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달려오는 이집트 군사들을 멈추게 했습니다. 넘실대는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뒤늦게 쫓아온 이집트 군사들이 그 바다로 들어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으려 할 때 물이 모여 들어 군사들을 모두 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금과 은 그리고 의복을 취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다 앞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바다를 갈라 당신의 백성들을 건너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뒤쫓아 온 이집트 군사들을 물에 수장시키신 분도 하나님이 십니다.
그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출15:1)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님이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련다.”(출 15:2)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고, 광야 40년의 긴 세월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40년 광야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을 때, 모세는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
“하나님은 반석, 하시는 일마다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은 올곧다. 그는 거짓이 없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의로우시고 곧기만 하시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께 맞서 악한 짓을 하니, 수치스럽게도 너희는 이미 그의 자녀가 아니요,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이다. 어리석은 백성아, 이 미련한 민족아,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께 이처럼 갚느냐? 그는 너희를 지으신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희를 만드시고 일으키신 분이 아니시냐?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여 보아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세대를 생각하여 보아라. 너희의 아버지에게 물어 보아라. 그가 일러줄 것이다. 어른들에게 물어 보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해 줄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면 무엇을 말해줄까? 아버지들이 어른들이 말해 줄 것이 무엇일까?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 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10-12절)
옛날이야기입니다. 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지금 들추어 내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지나간 일을 들추어 자주 이야기하는 사람은 현제가 영 재미없거나, 미래에 대한 소망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과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과거 없는 오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개구리든 올챙이 시절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여 보라고 합니다. 아버지나 어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기 아버지와 어른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 어려운 시절을 격어 본 사람들입니다. 광야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른들로부터 그 아득한 옛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 아버지와 어른들로부터 우리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들어 보라는 겁니다. 그 아버지와 어른들로부터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시고 인도하셨는지 들어보라는 겁니다.

이집트의 종살이 광야 40년의 고생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았음에 행복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오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이제부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내 집을 갖게 됩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서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건 광야에서 천막치고 살고, 늘 만나면 먹던 그런 때와 비교할 수 없는 호강입니다. 그럴 때, 그렇게 등 따시고, 배부를 때,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우리 때는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 그거 아닙니다. “우리 때는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었다. 늘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감사하며 살았다.” 이겁니다.

신명기 8:12이하,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는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물론 배불리 먹는 것, 좋은 집을 짓고 사는 것,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재산이 늘어나는 것, 그것이 잘못 된 것 아닙니다. 그건 죄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의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신 겁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될 때, 그렇게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을 때, 혹시라도 그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17~18에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당신들에게 힘을 주셨음을,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재물을 모았다고, 그것이 내 능력과 내 손으로 모은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까? 그것이 교만이라는 겁니다. “내가 벌어서 내 마음대로 쓰는 데 왜 괜히 그러느냐?”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 벌었는데 누구한테 감사하라는 거냐?” 이런 생각들이 다 교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안 믿은 사람들이야 그런 생각으로 산다면,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가 없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하나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이란 것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생명을 주셨기에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감사 할 수 없다니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은혜로 살아간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능력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식으로 삽니까? 언제 하나님이 나에게 힘이 되신 적이 있느냐는 식으로 삽니까?

옛날 미국에서 흑인 노예를 매매하던 도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흑인을 싣고 가던 백인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욕을 하면서 흑인 한 명에게 칼을 던졌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백인 신사가 그 칼을 얼른 손으로 막아서 그 흑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주어서 그 흑인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흑인은 너무도 고맙고 감격해서 그 백인신사를 따라가 한 평생 일하며 돕겠다고 간청했습니다. 백인신사는 그 간청을 수락하고 그 흑인노예를 데리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하던 이 흑인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태해지고 가끔은 불순종하거나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백인 신사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자기 손의 칼자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의 고개가 수그러지고, 열심히 일했다는 겁니다.

보세요. 손에 상처 입도록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평생 희생하고 봉사합니다. 때로는 짜증나고, 일하기 싫고, 불평할 일이 있지만, 그 손의 칼자국만 보아도 다시 감사가 생겨 봉사합니다.
여기, 바로 여기, 이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해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생명 얻고,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면서 왜 그 은혜, 그 사랑을 잊어버립니까? 그 손과 발에 나타난 못 자국을 왜 외면하십니까?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을 왜 보고도 모른 척 하십니까? 왜 이 십자가를 보면서 그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못 보십니까?
전설에 의하면, 삭개오는 가끔 말없이 집을 나갔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그 아내가 몰래 뒤따라 가 보니, 전에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뽕나무에 가서, 물도 주고, 나무도 어루만지면서, “이 나무 위에서 내가 예수님을 만났지.”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곤 하더라는 겁니다. 우린 왜 그런 감격을 잃어버렸습니까?

아주 어렸을 때 봄 되면 동네 어른들이 화전놀이라고 해서, 산 넘고 먼 길 걸어서 유원지에 놀러갑니다. 그래서 따라갔어요. 별로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먼저 돌아옵니다. 길은 멀고 산길을 걸을 때 무서움에 쩔쩔매는데, 저만치 아버지께서 자전거 타고 절 찾으러 달려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눈물부터 쏟아지지요. “왜 먼저 갔느냐?”는 야단은 야단이 아니라 사랑이요, 힘이지요.

여러분!
저 문으로 들어올 때 어떤 마음입니까? 사는 게 너무도 힘들고, 너무 어려워, 지치고 지친 마음과 발걸음으로 들어서는데,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힘드니?”하고 여러분을 안아주시는 그런 감격이 있습니까?
한 주간을 사는 게 신나고 즐거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 오자마자 “하나님, 한 주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그런 감격이 있습니까?
그 사랑, 그 은혜, 그 도와주심과 인도하심이 있기에,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그런 감격이 있습니까?
특별히 오늘 맥추감사절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드린다고 예배하는 우리는 감사헌금 봉투에 얼마나 넣으셨나요? 여러분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세요? 그 헌금 봉투 안에 정말 여러분의 감사가 담겨 있나요?

작은 글 하나 읽었습니다.
한 영국인이 요크셔 해안에 아름다운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해안 한쪽에는 커다란 바위가 바다를 향해 불쑥 나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영국인은 딸을 데리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얘야, 위를 올려다보아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래를 내려다보아라.” 아버지의 말대로 딸은 하늘이 비춰지는 바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이번엔 저 앞을 내다보아라.” 딸은 수평선에 가물거리는 먼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뒤돌아서서 아름다운 육지를 바라보아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내 딸 도로시야, 이처럼 높고, 한없이 깊고, 끝없고, 넓고,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란다.”
이 말을 들은 딸이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높고, 깊고, 끝없이 넓다면, 우리는 그 한 가운데서 살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높고, 깊고, 끝없이 넓은 하나님의 사랑 그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하나 그분이 만들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하나 그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산에 가면 공기가 있고, 들에 가면 공기가 없나요? 어디든 공기가 있듯이 어디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고 하신 겁니다. 우린 하나님의 사랑,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모두 다 그렇지만 저 역시 한 번도 돈 걱정 안하고 산적이 없어요. 입고 싶은 거 다 입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쓰고 싶은 거 다 쓰는,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살았는데도 늘 힘들게,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늘 감사한 것은, 그런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겁니다. 시편 23: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는 이 찬양의 의미를 압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가 무엇인지,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저는 압니다. 제 삶 가운데서도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여 보아라.” 지난 일들을 돌아다보라는 겁니다. 그 어려울 때, 그 고난의 때를 돌아다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오해 마십시오. 그때를 돌아다보고 신세 한탄 하거나 그때를 돌아다보고 그때처럼 허리띠 졸라매자는 것 아닙니다.

신명기 8:2,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광야 40년, 그 힘들었던 순간들, 그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것은 옛날에 대한 회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순간순간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남께서 하신일이 힘이요, 소망이 되는 겁니다. 광야 40년,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인 여러분과 저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 당신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여러분과 저를 앞으로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거고요. 그래서 감사는 우리 삶에, 우리 신앙에 힘이 되는 겁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기억이고요, 감사는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진정한 감사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함에서 나오는 겁니다.
지하식당에 내려가 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야! 너무 좋다.”는 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없어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최근 건축헌금 1천만원 하신 가정이 있어요. 그래서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을 뜨겁게 한 것 있습니다. 건축헌금 5천원 하신 분이 계십니다. 액수 갖고 말하는 거 아닙니다. 그 마음 가지고 말하는 겁니다. 보통 생각들, “그래도 건축헌금 하려면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은 돼야지.” 그래서 결국 못하는 겁니다. 액수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늘 기도하기를, “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런데 감사 할 줄 몰라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기도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게 아니라 내 힘으로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 도와주세요.”하고 또 기도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며, 동시에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또 한 번의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시작이 되는 겁니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과의 전쟁(삼상 17장). 이스라엘 군대는 모두 피해 숨었는데,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이 목동 다윗입니다. 대단한 장수인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소년입니다. 그러니 사울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너는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
다윗이 대답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아버지의 양떼를 지켜냈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 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 가서 그놈을 쳐 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37절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울이 다윗에게 싸움터로 나가도록 허락합니다. 그랬어요. 다윗이 블레셋 그것도 골리앗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재산이 늘더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이제까지 당신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오늘 이렇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여러분을 찾으셨고, 슬픔과 고통과 염려가 가득한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만나, 감싸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주셨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는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세계를 받아 그 날게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이 홀로 여러분을 인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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