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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겠는가? (롬 8:3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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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겠는가?
본문- 로마서 8: 31- 39

오늘 아침 우리는 바울사도께서 31절, 32절, 33절, 그리고 34절을 통하여 반문하신 4개의 질문을 통하여 그 질문속에 담겨진 귀한 의미를 생각하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질문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요구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그것은 예배를 위한 요식행위가 아닙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000을 믿사오며, 믿사오며, 믿사오며 하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것을 확신하는 고백까지 하고 마칩니다.

예배자로써의 가장 중요한 고백을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토미 테니라는 분이 쓴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 책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 그렇습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부분들은 탁월합니다. 수많은 성경공부나 평신도 훈련 프로그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지 않으시는지 등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누구를 통하여 어떤 말씀들을 기록하게 하셨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아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토미 테니는 우리에게 다시금 질문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 뿐 아닌가?" 이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정말 네가 하나님을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호세아서 6장 3절의 말씀처럼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그 분 알기를 갈망하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네게 주셨으니..."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만이 권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7월1일로 제주도가 특별도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모든 부분들이 도지사의 자율적 통치권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는 서울특별시장보다 더 창조적 자리가 아니가 생각됩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만이 권한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만이 그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권세를 너희에게 주노라" 오늘 질문은 반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도와 주시는데, 누가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적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가끔 교회 앞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훈을 받습니다. 거기서도 권력을 행사하는 무리와 기가 죽어 따라야만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엄마나 아빠가 와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 순간에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지요. 지금까지는 기가 죽어서 꼼짝을 못하고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던 아이가 갑자기 목소리가 달라지고, 태도도 달라지면서고 이렇게 말합니다. "야, 나 이제 너희들하고 안 놀아..." 몇 분전만 해도 상상치 못했던 용기있는 행동이 서슴없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들보다 훨씬 힘이 쎈 엄마나 아빠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바뀐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사탄마귀의 세력에 눌려 살았습니다. 죄의 종 노릇하며 기죽어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외냐하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사탄 마귀인들 우리를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엘라골짜기에서 블레셋과 대면하고 있는 처량한 이스라엘을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나와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데, 그 내용의 대부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 백성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장군들도, 수많은 군사 어느 누구 하나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갔던 다윗이 그 장면을 목격합니다. 사울왕도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누구든지 저 골리앗만 물리쳐 주면 내 사위를 삼고, 이 나라의 절반을 떼어주겠다고 공약을 걸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공약에 눈이 어두워 나간 것이 아니라 거룩함의 분노가 있기에 골리앗을 대면하려고 결단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돼요. 다윗은 내가 양을 칠 때 악한 짐승들이 양을 강탈해 갈 때 쫓아가 물매로 그들을 물리치고 양을 빼앗아 온 경험이 있다며 자신에게 출전의 기회를 달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사울왕은 결국 어린 다윗이 나간다고 할 때에 안쓰럽지만 그 기세에 눌려 결국은 허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입었던 갑옷과 투구를 벗어 주지만 맞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 왕은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울왕의 그 체격에 맞는 갑옷을 다윗이 입을 수 없었습니다. 평소 목동의 그 모습 그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외모는 초라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의 중심을 사로잡고 있는 확신이었습니다. 골리앗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에서 그럴 듯한 장수가 나와야 할 터인데, 이건 청소년 하나가 막대기 하나와 물매 하나 달랑달랑 들고 나오는데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이놈아, 내가 한 칼로 너를 쳐서 네 몸뚱아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새들의 밥이 되게 하리라..." 그렇게 열을 받아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 때에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보면, 다윗이 고백한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외형적으로는 열세해 보였고 부족해 보였지만, 그 중심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신뢰는 골리앗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이 분명한 신앙고백적인 자세가 그로 하여금 강하고 담대한 삶을 만들어 준 줄 믿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로써 승리하리라고 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다윗의 확신이 오늘 여러분의 확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23년전에 평안의교회를 개척하고자 했을 때, 본교회 장로님보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천 명이 넘는 교회로 부흥할것이라고 고백하자 그 장로님이 "아휴, 전도사님. 요즘은 40명만 모여도 자립하는 거에요. 한 100명이면 몰라도 천 명이 무슨 애들 이름인가요?" 이러시더라구요. 애석하게도 그 분은 우리 평안의교회가 천 명이 모이는 걸 못 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성도여러분,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괜히 큰소리치는 공포탄이 아니라 믿음의 응답을 삶을 통해 증거함으로써 보여주는 거예요. 그 당시 지하 18평에 아내와 둘 밖에 없는 미약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을 허락하시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신것 처럼 제게도 주신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간증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전도할 때에도 가장 좋은 전도 방법은 우리의 말 주변이 좋은게 아니라, 내 삶의 축복됨과 승리함을 간증하는 것인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이랬거든, 내가 이렇게 이렇게 전도 받았을 때, 내가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고, 내가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 어렵게 만들었는데,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 너 나 보면 알잖아? 그것이 산 증인이요, 그것이 승리의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오직 산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32절 두 번째입니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그냥 조그만 선물 하나만 주어도 고마워서, 그냥 내가 어려울 때 도움만 주어도 감격해서, 그러나 우리 부모들이 자식을 위한다고 해도 생명을 줄 수 없잖아요. 자식이 죽어가는데 생명은 주지 않더라구요. 부모가 돌아가시는데, 자식이 아무리 효도해도 부모에게 생명을 주지는 않더라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그 분이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은혜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 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어떤 감사를 가지고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감사는 신앙의 온도계라고 말합니다. 어휴, 또 맥추감사절이야? 감사해야지 뭐. 내가 집산데, 한 3만원 넣을까? 권산데 5만원 넣으면 되겠지? 그런 체면이 오늘 여러분의 감사절기에 감사헌금을 준비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오늘 1부 예배 때 헌신자 예배 때는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말씀을 드렸거든요? 그런데 3부 예배때는 우리 일반인을 위한 예배기 때문에 그렇게 세게 말씀은 못 드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사가 체면치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까지 감사절기에 체면치례를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감사는 날마다 날마다 성장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부모님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녀들, 오늘 주님께서 내게 주신 건강들, 내게 주신 직장과 사업들, 내게 주신 좋은 친구들, 내게 허락하신 좋은 평안의교회, 좋은 평안의성도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감사의 조건인지 모릅니다.

이 조건만 가지고도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들, 오늘 본문 말씀 36절에 보면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던, 죄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들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시고,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믿음만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는 이 세상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요, 더 큰 감사의 제목인 줄로 믿습니다.

감사할 것이 없다구요? 경제가 어려워서요? 환경이 어려워서요?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목을 보면 만입이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다 감사할 수 없노라고 오늘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그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3번째입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고소하겠느냐?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감히 고소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하겠느냐? 그런데 여러분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문제로 도전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세력 바로 사탄마귀의 세력입니다.

그 사탄마귀가 일곱가지 무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그 일곱가지 무기가 35절에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환란이라는 무기, 곤고와 핍박과 기근이라고 하는 무기, 적신과 위험과 칼이라는 무기로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된 삶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어요.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원치 않지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IMF를 환란이라고 말합니다. 큰 일본의 고베지진이 났을 때 그것을 우리는 환란이라고 말합니다. 그 환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정을 잃고, 경제적인 바탕을 잃고 고통 속에서 신음합니까? 그러나 주님은 환란을 만난 우리에게 요한복음 16장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만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곤고입니다. 곤고라는 말의 뜻은 좁은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상으로는 우리의 여유없는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얼마나 사람이 답답하고, 우리가 삶의 반경이 좁아집니까?

무슨 모임에 가도 기가 죽고, 무슨 일을 하려고 그래도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굉장히 우리가 작아지는 것이 느껴지지요? 그런 여유없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탄마귀는 우리를 빗나가게 합니다.

맥추감사 너한테 무슨 맥추감사? 배부른 소리 하지마. 입에 풀칠도 못하는 네가 무슨 감사야? 자꾸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고, 벗어나게 만드는 거예요. 너 지난 번에 교통사고 났잖아. 너 지난 번에 큰 어려움 만났잖아. 너 주식투자 했다가 망했잖아. 너가 지금 무슨 감사야? 자꾸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예요. 이 곤고함이 우리로 하여금 연약하게 만들어 주는 사탄의 공격의 무기입니다.

핍박입니다. 이 핍박이라고 하는 것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미워하고, 방해하고,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핍박을 말할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 로마의 성도들은 지하 카타콤으로 내려가면서도 터키 중부의 성도들은 갑바도기아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그들은 핍박에 굴하지 않았어요.

기근입니다. 경제적으로 배고프고, 목마름입니다. 나오미는 이 기근을 만나서 모압땅이라고 하는 이방의 땅으로 갔다가 두 아들과 남편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땅, 가나안까지 가는 결단을 했지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 때 애굽으로 갔다가 아내를 잃을 뻔 하고, 큰 망신을 당하고 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의 삶이 기근이 닥칠 때, 애굽을 내려가거나, 모압으로 내려가는 어리석은 결단을 하지 않기를 바래요. 끝까지 견디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 신앙을 지키는 이 믿음의 자리, 이 자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을 갈 때에도 제일 먼저 무엇을 선택합니까? 시장이 가까운 것을 택해요? 학교가 가까운 것을 택합니까? 역전이 가까운 것을 택합니까?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섬기는 이 제단에서 가까운 곳이 바로 애굽에서, 모압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의 선택인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까지도 기근에 애굽까지 내려갔다가 망신 당했어요. 아내도 잃을 뻔 했습니다.

적신입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 적신이라는 의미는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던 복음전도자 바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끊임없이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우리의 삶의 부분들을 우리에게 도전의 문제로 내어 놓습니다. 네가 지금 교회를 나갈 만큼 그렇게 한가하냐? 네가 지금 주일 날 문을 닫고서 예배를 드릴 만큼 그렇게 한가하냐?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때때로 그 도전과 유혹을 못 이겨서 주일날 문을 열고, 일을 하고, 주일날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요. 사탄마귀는 쾌재를 부릅니다. 뒤에서 박수를 치면서 좋아합니다.

위험입니다. 정직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의외로 많은 고통들이 다가옵니다. 여러분 박주영 선수가 골을 한 번 넣고 기도 한 번 하면, 수만수천의 악성리플들이 박주영의 기사에 달라붙지요? 박주영선수 스무살 밖에 안되는 어린 젊은이지만, 그는 배짱이 있습디다. 내 신앙고백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누가 뭐래도 관계하지 않는다. 그 악성리플들을 절대로 보지 않는데, 그 네티즌들이 악랄하게 악성리플을 쓰는 사람이 한심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는 칼입니다. 이 칼은 죽음과 전쟁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사랑 안에 살려고 하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는 물리적인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이 칼을 들이대면서 그래도 믿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도 신앙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 썰물 때 배가 따라가지 못해서 대동강변 뻘에 쭉 박혀버렸습니다. 양 쪽에서 조선의 군사들이 화살을 쏘아대다가 결국은 불화살을 쏘아대면서 배가 전소했습니다. 불이 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대동강변으로 뛰어내렸는데, 뭍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족족 칼로 목을 베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성경책을 한글로 번역해서 로스선교사가 번역한 그 성경책들을 가지고 그 쪽성경을 나누어 주면서 이거 읽고 예수 믿으라고 전하다가 그 한 관원에 의해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고위관리가 이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쳤습니다. 한참 후에 우리 땅에 복음이 들어왔어요. 놀랍게도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친 관리의 집 동네에 교회가 들어왔어요.

그리고 그 교회에 가서 그 교회를 개척한 선교사님에게 무릎을 꿇고, 내가 그 토마스선교사를 죽인 장본인입니다. 그 때는 자랑스럽게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례받고, 주의 사람이 된 줄로 믿습니다. 좋은 성도가 되었어요.

때때로 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신앙의 순교를 요구하지만, 끝까지 견디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39절까지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선포하시면서 살아가시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능력의 하나님, 하늘과 땅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도전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는 그 신앙의 중심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맥추감사주일에, 이 감사절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끊을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하며 이 사랑, 미 믿음 주님 앞에 드립니다. 열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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