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미지근한 신앙은 가라 (계 3:14-22)

  • 잡초 잡초
  • 698
  • 0

첨부 1


1. 부유한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70 km 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 요즈음은 에스키 히사르(Eski-hisar)라고 불린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가는 무역로와 버가모에서 남쪽으로 가는 무역로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hia, 성경상의 부르기아)의 수도로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발전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에 매우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주후 60년에 지진이 나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라오디게아가 로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재건한 것을 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도시에는 은행이 발달하였으며 유명한 의학 학교도 있었다. 특히 귀에 바르는 약과 눈에 바르는 안약은 이 도시에서 생산하는 유명한 의약품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셀리우코스 왕가의 안티오쿠스 2세가 그의 부인 라오디오스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 불렀다.
라오디게아는 근처의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 이라 불리우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수차례의 지진으로 인하여, 이 도시의 유적은 대부분, 땅 속에 파묻혀 지금은 황무지화 되어있다.
이 라오디게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아마 에바브라가 전도하여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골 4:12 참조). 그런데 이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심한 책망과 징계의 말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권면과 아울러 약속의 말씀도 주셨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14절]입니다.
“아멘이시요”는 ‘참되다,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고후1:20] 처음과 나중이 되신 분으로 심판의 주가 되실 분입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는 하나님의 뜻, 즉 구약의 예언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의미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온전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일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이”는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주님입니다.[요1:3, 골1:15]

2.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 치리라"(계 3:15~16)

골로새서에도 라오디게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골 4:16, 2:1, 3:13~15) 특히 마지막 절의 문안인사에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 교회가 세워 졌음을 알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다”는 것이었다(15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데는 재미있는 지리적인 배경이 있다.
라오디게아 북쪽으로 10 km 쯤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Hierapolis)라는 도시가 있었다.
여기에는 지금도 유명한 야외 온천이 있는데, 이 온천수는 평평한 고원 지대를 흘러서 라오디게아 맞은 편에 떨어졌다.
그런데 처음 히에라볼리에서는 뜨겁고 미네랄 성분이 많던 물이 수로를 타고 흐르는 사이에 식어서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미지근한 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사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차다’는 것은 영적으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신선한 힘을 공급해 주는 것을 뜻하며, ‘덥다’는 것은 열심을 내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그래서 교회가 신선하게 되든지 뜨겁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희랍어의 ‘차다(프쉬크로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바람은 19절에 있는 대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심은 덥게 되는 것이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하려면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치우든지 하라”고 했을 때 부모의 본심은 ‘열심히 하는 것’이며 ‘치우는 것’은 본심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3.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교회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이렇게 미지근한 교회가 되고 말았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17절에 있는 대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자기 만족에 빠진 교만한 교회였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교회였다(17하).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향하여 권면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사실 이 말씀은 권면이라기보다 책망에 가까운 말씀이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역을 통해 부요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로 연단한 진짜 금을 사서 진짜 부자가 되라는 말이다.

그리고 “흰 옷을 사서 입어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까운 같은 겉옷(trimita)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만든 안약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짜 안약을 사서 발라 자신의 참 모습을 보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징계하시는데 그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라오디게아교회는 칭찬 한 마디 듣지 못한 채 혹독한 책망을 받지만, 그것도 주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4. 사랑하는 자를 책망함

그 다음에 또다시 주님의 권면이 나온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래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고 하신다(히 12:6 참조).
따라서 책망과 징계도 사랑의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징계가 없으면 죄의식이 없어지고 예사로 죄를 짓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을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책망과 징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또한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곧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것이다. 별다른 수가 없다. 열심을 내고 회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길이다.

5. 문밖에 서서 두드림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이 구절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본 구절의 의미는 ‘불신자’에게 영접을 권유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다.

우리 주님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원문에 의하면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계속’ 두드리신다고 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끈질기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전파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이다.

6. 축복된 교제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신다(20하).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축복된 교제를 말한다. 주님과 함께 가지는 친밀한 교제를 말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친밀한 교제가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며 즐겁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가시면 우리는 허전하고 외로우며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자기의 아집과 교만한 마음과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복된 삶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이 나와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절) 우리 주님을 잘 믿고 승리하는 자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올리브나무와 떡갈나무, 소나무는 각각 원대한 꿈을 가지고 각자 특별한 존재가 되겠다는 큰 꿈을 품고 있었다.
올리브나무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상자가 되어 그 안에 온갖 보물을 담는 꿈을 꾸었다.

어느날 나무꾼이 숲의 수많은 나무 중에서 그 올리브나무를 선택하여 베었다. 올리브나무는 아름다운 보석 상자가 될 기대에 부풀었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가 되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꿈이 산산조각 났다. 자신은 가치가 없고 천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떡갈나무도 위대한 왕을 싣고 바다를 건널 거대한 배의 일부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나무꾼이 자신을 베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무꾼이 자신으로 조그만 낚시배를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떡갈나무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 사는 소나무의 유일한 꿈은 언제까지나 높은 곳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섭리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번개가 치더니 소나무를 쓰러뜨리면서 그 꿈을 빼앗아 버렸다. 얼마후에 나무꾼이 쓰러진 소나무를 가져다가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렸다.

세 나무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다. 세 나무의 꿈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리아와 요셉이 아이를 낳을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마구간을 발견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구유에 누였다. 이 구유는 바로 그 올리브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올리브나무는 귀중한 보석을 담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셨다. 올리브나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셨다. 어느 날 예수님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크고 멋진 배가 아닌, 작고 초라한 낚싯배를 선택하셨다. 이 낚싯배는 그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떡갈나무는 위대한 왕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계획이 있으셨다. 이제 떡갈나무는 만왕의 왕을 태우게 되었다.
또 몇년이 흘렀다. 몇몇 로마 병사들이 그 소나무가 버려진 쓰레기더미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다. 이에 소나무는 곧 땔감 신세가 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병사들은 ㅅ나무를 작은 두 조각으로 쪼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소나무에 예수님이 매달리시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보여 주고 있다.
세 나무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여기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 나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신다. 마음의 숨은 생각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피할 수도 없고 거짓으로 속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가 아닌지? 착각 가운데 살아온 나의 인생은 아니었는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문을 열자.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자. 다른 사람의 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거기에는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하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또다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축복스런 주님의 교제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큰 권세와 영광에 함께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빈다. (위홍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