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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전신갑주 시리즈(6) (엡 6: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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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의 검, 글라디우스

기원전 205년, 로마의 위대한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군단을 지휘해 오늘날의 스페인 지방인 에스파냐를 원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군은 긴 칼을 들고 싸우는데 에스파냐 원주민들은 아주 짧고 양날이 선 검을 들고 나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볼 때는 아이들 장난감 같은 그 짧은 칼로 무슨 싸움을 하겠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먼 거리에서 싸울 때는 긴 칼을 휘둘러 그런대로 싸울 만 했는데 막상 백병전이 벌어져 바짝 붙어 싸우게 되자 에스파냐 원주민들은 로마군이 긴 칼을 휘두를 때 피하면서 로마군의 몸통을 그 짧은 칼로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우리도 저런 짧은 칼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검을 도입했는데 나중에는 모든 로마군이 그 짧은 검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화에서 보셨겠습니다만 이렇게 도입된 검이 바로 로마군의 상징이 된 '글라디우스'(Gladius)라는 짧은 검입니다.

상식 하나 알려 드리지요. 한문에 칼을 가리키는 말이 두 개가 있습니다. 바로 '검'(劍)과 '도'(刀)인데 두 칼은 엄연히 다릅니다. '검'은 양쪽에 날이 서서 찌르기도 하고 베기도 하는 칼이며, '도'는 한쪽에만 날이 서서 주로 베는 데 사용하는 칼입니다. 본디 로마군이 쓰던 긴 칼은 크게 휘둘러서 적을 베는 한쪽 날만 선 '도'인데 적과 어느 정도 떨어져 싸울 때는 효과가 있지만 칼이 워낙 길어서 한번 휘두르려면 사방 1미터 내지 1.5미터의 여유 공간이 필요하므로 적과 바짝 붙어 싸울 때 베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한번 긴 칼을 휘둘렀다가 다시 휘두르려면 시간이 걸리고, 휘두른 다음 방어에도 허점이 생깁니다. 그래서 로마군은 전술을 근접전으로 바꾸면서 이 긴 칼 대신, 짧은 검인 글라디우스로 바꾼 것입니다. 2주 전 설명한 대로 로마군은 방패를 길게 옆으로 위로 펴는 방진대열을 갖춰 적에게 접근한 뒤 투창을 던져 적군의 진형을 무너뜨린 후 곧바로 돌진해 백병전을 벌입니다. 이 때 적이 긴 칼을 휘두르면 로마군은 평상시 훈련을 통해 칼을 피하는 법을 연습했기 때문에 휘두르는 칼을 재빨리 피한 후 적의 칼 밑으로 파고 들어가 짧은 글라디우스 검으로 몸통을 찌릅니다. 이러한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로마군이 어디를 가서 싸우든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던 유대인들도 바로 이 로마군의 글라디우스 검을 늘 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6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께 그 시대의 어떤 기억이 제일 많이 나느냐고 물으면 늘 일본 순사가 차던 긴 칼 이야기를 하시곤 했습니다. 일본 순사나 헌병이 차던 긴 일본도는 그들이 가진 권력과 힘의 상징이었고, 우는 아이도 "일본 순사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두려운 대상이었습니다. 신약시대도 마찬가지로 로마군의 글라디우스 검은 모든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이 글라디우스 검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야, 로마군은 저 짧은 글라디우스 검을 가지고 적을 무찌르고 전 세계를 정복했구나. 전 세계 구석구석 로마군이 안 들어간 곳이 없고 이 로마군의 칼에 정복당하지 않은 민족이 없구나. 참 놀라운 일이다." 바로 그 순간 한 가지 놀라운 깨달음이 그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렇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 검과 같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저 검보다 더 강해서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고 온 세상 구석구석을 능력으로 정복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는 바로 말씀의 검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6:17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말씀의 검'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히브리서 4:12입니다. 함께 찾아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점에서 검과 같을까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다고 했습니까? '살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서점에 가보면 베스트셀러 코너가 따로 있습니다. 요즘 제일 많이 팔리는 책들만 모아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이 베스트셀러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5년? 10년? 아니요. 요즈음 베스트셀러의 수명은 기껏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2천 년 동안 항상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많이 팔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2천년 동안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수없이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이 정도면 이제 성경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성경에서 끊임없이 새롭고 귀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성경이 사람이 쓴 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운동력이 있다는 말은 계속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살아있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살아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고1 때 친구가 저에게 복음을 전해서 제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목사가 되어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은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제 자리에 머물러있으면 생명력을 잃고 죽게 됩니다. 여러분이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복음 증거자 되기 바랍니다.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감찰하나니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움직이면서 어떤 일을 합니까?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 로마군의 글라디우스는 양 날 선 검이라 찌르기도 하고 베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활동합니다. 어떤 활동을 하나요? 바로 찌르고 쪼개는 일을 합니다. 뭘 찌르고 쪼개는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관절과 골수는 육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므로 이 말은 인간의 영혼육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검이 우리의 영혼육을 찌르고 쪼갠다는 말은 마치 로마군이 양날 선 검 하나를 가지고 전 세계 어디든지 쳐들어가 찌르고 베어 정복한 것처럼 말씀이 우리 모든 인간에게 쳐들어와 찌르고 쪼개 변화시키고 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12절 마지막 부분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감찰한다는 말은 판단,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간의 모든 생각과 뜻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을 하필이면 양날 선 검에 비유했는가? 그것은 그 양 날이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쪽 날은 구원을 가르고 또 한 쪽 날은 심판을 가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양날 선 검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 다음 한 쪽 날로는 구원받을 사람들을 나누고 한 쪽 날로는 심판 받을 사람들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너는 어느 편에 설 것이냐? 구원의 길에 설 것이냐? 아니면 심판의 길에 설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말씀의 검 앞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오늘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서야 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나 자신에게 들어와 정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영혼육을 찔러 쪼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누구에게나 침투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나 자신에게도 들어와 역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이게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웬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올만도 한데 우리가 빈틈없이 무장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6:13~17에서 우리 성도들이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말씀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무장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진리와 의와 복음과 믿음과 구원과 성령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으로 무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욕심으로 무장합니다. 시기와 미움과 다툼으로 무장합니다. 믿음과 경건으로 무장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불신과 세상의 온갖 악한 것으로 자신을 감싸고 튼튼히 무장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빈틈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아무리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렇게 무장한 사람에게는 절대 들어가지 못합니다. 절대 그 사람에게 침투해서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절대 이런 무장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나를 활짝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의심과 불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죄악 된 자신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게 됩니다. 그래야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리고 쪼개지고 변화 받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 앞에서 말씀에 찔리고 쪼개지는 경험, 깨지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37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후에 방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데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렇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찔림이 생깁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 할꼬'라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말씀에 찔려야 변화됩니다.

누가복음 24:32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서로 말합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영혼육을 찌르고 쪼개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완악한 내 마음이 녹아지고 말씀 앞에서 참으로 회개하며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인류 역사 상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쪼개어진 체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말씀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검, 말씀의 검

이제 우리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온전하게 하나님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교회마다 무슨 행사나 프로그램을 참 많이 합니다. 물론 이런 행사나 프로그램 모두가 나름대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이런 프로그램이 절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찔러 쪼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교회를 변화시키고 우리 성도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눈부신 성장을 하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정체되고 점점 퇴보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영적인 리더십이 흔들려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교회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영적 위기는 어디에서 올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위기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6:17에서 왜 우리에게 그냥 말씀의 검이 아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것은 인간의 말씀일 뿐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성경과 씨름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을 전해야 하며,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 속에서 '아멘'으로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그래서 그 말씀 때문에 내 마음이 찔리고 뜨거워지고 쪼개지고 변화되고,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명력 있게 전파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없이, 주일만 되면 목회자는 습관적으로 설교하고, 성도들은 습관적으로 듣고, 교회당 문 밖을 나서면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죽은 말씀이요 성령이 아닌 사람의 말씀일 뿐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철저한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명력 넘치는 말씀이 성도들의 영혼을 파고들어 찔러 쪼개고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나만 말씀 듣고 나만 변화되면 안 됩니다. 오늘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전신갑주 6가지 중에서 유일하게 성령의 검만 공격무기입니다. 원수마귀가 끊임없이 공격해오는데 방어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나만 말씀 듣고 나만 은혜 받으면 방어로만 그치게 됩니다. 방어를 잘 했으면 이제는 백병전으로 붙어 싸워야 지요. 원수마귀가 우리를 단번에 쓰러뜨리려고 긴 칼을 휘두를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평상시 쌓아온 신앙훈련을 통해 그 공격을 막은 뒤, 내 손에 들려있는 성령의 말씀의 검을 가지고 마귀의 몸통을 찔러 이겨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속에 말씀의 뜨거운 역사가 넘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과 혼과 육을 찔러서 내가 그 말씀 앞에 쪼개지게 하옵소서. 생명의 말씀의 능력을 뜨겁게 체험하게 하옵소서. 말씀의 검을 들고 나가 싸우는 하나님의 용사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구하고 결단하기 바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열두 명의 제자만 데리고도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이 손에 말씀의 검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손에도 지금 성령의 말씀의 검이 들려있습니다. 이 검으로 나가 싸우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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