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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느 13: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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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비서라는 외경에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나옵니다.
  예수님 초림하시기 얼마 전에 유다인들은 안티오쿠스 4세라는 이방 임금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가 유다인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말고 자기네의 이방신을 섬기도록 강요했을 때, 신앙이 투철한 일부 유다인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면서 맛다디아라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고 반란군을 조직하여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곧 군대를 보내었는데, 그들은 일부러 안식일을 골라서 그 유다인 반란군의 한 진지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 전투가 시작되자 유다인들은 단 한 명도 무기를 들고 대항해서 싸우지 아니하고, 천 명의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떼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 전투행위를 하는 것은 안식일 성수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맛다디아와 잔존 동지들은 방침을 바꾸어서 앞으로는 적군이 안식일에 공격해 와도 저항하여 싸우기로 결정을 내리는데, 그러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전멸밖에 없을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카비서는 정경이 아니므로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유다인들이 그 얼마나 안식일 성수를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반영해주는 이야기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다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처럼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안식일 성수를 철저히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처럼 율법 준수에 열성적이었던 유다인들 중에서조차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에 쉽게 빠져 들어가는 일들은 빈번했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받고 돌아온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공사가 완성된 후에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 바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 짧은 공백 기간 중에 유다인들은 영적 긴장이 풀리면서 몇 가지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안식일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것을 발견한 느헤미야는 즉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일대 개혁운동에 착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어진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주일성수를 바로 하기 위해 깨닫고 실천해야 할 자세들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차원 높은 것까지 차례로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주일 성수는 사람의 육신적 욕심과 직결되는 까닭에 신자가 된 이후에도 가장 범하기 쉬운 계명입니다.

  유다인들도 바로 이것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게 되었었습니다.
  본문 15절과 16절에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술틀"이란 포도주틀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것을 발로 밟아 포도즙을 짜는 것과 "곡식단"을 운반하는 것은 바로 농업행위였으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가지고 와서 "식물을 파는" 것은 상업행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을 "경계"한 이유는, 그 어떤 형태의 생업이든지 간에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제4계명이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가장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죄는 비단 물건을 파는 쪽뿐 아니라 사는 편에서도 저질러졌는데, 이것은 특히 "두로 사람"들의 상업행위에 의하여 더욱 자극되었습니다.
  '두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북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로서, 고대사에서 포에니키아인으로 불리고 있는 그 지방 사람들은 당시 근동사회의 국제무역업에 있어서 최대의 교역체제를 형성하고 있던 뛰어난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상품들 또한 유다인들의 구매의욕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고급품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물고기"라고 한 것은 바로 지중해에서 잡힌 바닷고기를 가공한 건어, 훈제 생선, 또는 염장 생선 따위를 두고 한 말이며, "각양 물건"이란 그 두로 사람들에 의하여 수입된 각양 희귀한 외제품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런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 팔 때, 유다 백성들은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소매상인들은 그런 좋은 수입품들을 다른 경쟁업소에 빼앗기기 싫었을 것이며,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역시 보기 드문 외제상품을 구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준수가 온 민족의 국시요 각 개인의 좌우명과도 같았던 유다인들마저 바로 그처럼 돈 더 많이 벌고 싶은 욕심, 좋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들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게 되었던 것은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도 꼭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신자가 된 이후에도 다른 여러 계명들 중에서 유독 제4계명을 가장 잘 범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는데도, 좁은 생각으로 판단할 때에는, 주일을 바로 지키면 내 육신생활에 여러 가지로 손해가 되고, 조금만 어기면 많은 이익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당장에라도 주일 하루 더 가게를 열어놓으면 입금장부에 돈이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이 더 올라가게 된다는 계산이 오늘도 많은 교인들의 머릿속을 주장합니다.
  모처럼 연휴로 이어지는 주일에 가족끼리 어디 놀러가지 않고 교회에 오면 마치 부부사이에 큰 문제나 생기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향상에 큰 손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혹은 학생들이 주일날 공부하지 않으면 무슨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예사로 주일예배를 거르곤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신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조차 주일 범하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그 요인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주일성수는 신자가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가게 문을 열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 중에 어느 쪽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일에 시험공부 때문에 성경공부 빼 먹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학교 성적 중에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일에 교회봉사하는 것보다는 밀린 집안 청소나 빨래를 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교인이 평소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를 변명의 여지없이 증명해주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예배자들만 특별히 더 가난해지게 만드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주일성수 충실히 하는 바람에 대학에서 떨어지고 집안에 불화가 생기게 만드실 분이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그처럼 치사한 사람처럼 함부로 여긴다는 말입니까?

  주일성수는 하나님과 자기 육신의 소욕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가장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내어줍니다.
  열 가지의 계명들 중에서 다른 것들은 다 잘 지키면서도 유독 이 제4계명만 자기 신앙생활에 제일 취약점이 되고 있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 정말 하나님을 믿기는 믿고 있는지부터 다시 한 번 겸손하게 점검해보시고, 일단 주일부터 성수함으로써 자신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첫 단추부터 바로 꿰매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주일을 범하는 악습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죄악과 징벌에 빠지는 영적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그런 범죄행위가 그들의 조상 적부터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악화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17절과 18절에 보면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범하다'는 말은 '거룩한 것을 평범하게 여기거나 함부로 사용하는 행위'를 두고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어떤 악한 일을 안식일에 저질러야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안식일을 보통날과 같이 범상하게 지내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유다의 귀인들을 불러놓고서 "너희 열조가 이같이 안식일을 범했고 이제 너희도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책망하는 것은, 유다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시작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모스 8장 5절에 보면 유다의 조상들은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라는 불평을 했었습니다.
  즉 '빨리 안식일이 지나가야 밀을 시장에 내놓고 팔 텐데.'라는 조급한 심정으로 안식일 온종일을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그들 조상들의 그런 죄는 예루살렘 함락 직전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는 더욱 악화일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선지자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렘 17:19-27)하다가 끝내는 망국의 징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여기서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하고 유다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고국으로 귀향하는 은혜를 입은 유다인들은 당연히 그들 조상의 잘못을 거울삼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그 악습을 또다시 재판(再版)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이제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라고 하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너희들은 과거에 우리 민족을 망하게 했던 바로 그 조상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이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열조가 안식일을 범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더욱더 악화되어 끝내는 민족 전체가 망하고 말았던 그 필연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또다시 재현시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일을 잘못 지키는 것은 가장 습관화되기 쉽고 점점 더 악화되기 쉬운 범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라도 주일을 범하는 어떤 습관이 일단 정해지면 그것은 매주일 반복해서 저지르는 죄가 됩니다.
  또한 그러다보면 결국 점점 더 큰 문제에 있어서도 주일을 함부로 범하게 되는 것이 곧 뒤따라오는 패턴이 되기 십상입니다.
  주일예배만 겨우 드리고 SFC성경공부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조만간 걸핏하면 예배까지도 간단하게 빼먹게 될 것이고, 주일에 식당에 가서 밥 사먹는 것을 예사로 하게 되면 결국 주일에 멀리 놀러가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처럼 주일을 범하는 것은 세대가 교체되면서 더욱 악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선조 세대가 주일 지키던 모습들을 오늘날과 비교해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부모님들의 주일성수 방법들 중에는 좀 율법적이고 지나친 것도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분들의 마음 중심은 어디까지나 진실하고도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날 주일성수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들을 찾고 있는 우리들의 본심을 솔직히 판단해 본다면, 그런 신앙의 선조들보다는 훨씬 더 느슨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추세라면 이제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 가서는 과연 주일성수라는 것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게 될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겨우 유지나 될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일성수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각자가 개인적으로 어떤 '마지막 선'(bottom line)을 그어놓아야 합니다.
  그런 선을 교리적으로 정하려고 한다면 율법주의가 될 것이므로,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신앙양심의 소리에 따라서 그 최후의 선을 분명히 설정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일에는 아예 학교공부를 하지 않겠다.'라든지, '나는 주일에는 장보러 가지도 않겠다.'라는 식으로, 주일성수에 대한 자기 자신의 방어선을 그어놓고, 만약 거기서 한발 더 뒤로 물러서면 바로 더 큰 신앙적 타락과 영적 몰락의 낭떠러지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단호하게 그 선을 지켜야만 합니다.
  이처럼 주일을 조금씩 어기기 시작하면 개인적으로나 세대별로나 더 큰 죄에 빠지며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될 뿐인 것을 늘 염두에 두고서, 주일성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해이해지지 않도록 늘 스스로를 채찍질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일성수는 형식적으로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온전히 지켜야만 완성됩니다.

  놀랍게도 느헤미야는 바로 이 점에까지 신경을 써서 유다 백성들의 안식일 성수 생활을 개혁시켰습니다.
  19절 이하 21절에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 / 장사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 두번 예루살렘성 밖에서 자므로 / 내가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저희가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문"은 아시다시피 고대사회에서는 그 성의 상업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시장도 되는 장소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상거래의 기능을 안식일 동안은 완전 정지시키기 위하여 "어두워갈 때에" 즉 유다인들이 하루 24시간을 따지는 계산법에 따르면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그 시점부터 성문을 닫아걸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치를 취한 이후에도 일부 상인들이 성 바깥 성벽 바로 밑에서 야영을 하면서 안식일을 지내는 것을 느헤미야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의 목적은 두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인들은 안식일에 상품을 가지고 성 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용무를 핑계로 성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아보겠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안식일 24시간 동안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대신에 안식일이 끝나게 되기만 하면 일분도 허비하지 않고 즉시 성안에 들어와서 장사를 시작하겠다는 속셈일 수도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런 의도로 성 밑에서 야영하는 상인들을 향하여 '한번만 더 그러면 붙잡아 넣겠다'고 경고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쫓아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한 번 한다고 말하면 꼭 하는 사람인 줄을 그 상인들도 잘 알고 있었던지라 그들은 그 이후부터는 "다시는 안식일에 오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그들을 쫓아내었습니까?
  사실 성벽 밑에서 야영하는 그 자체는 결코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가 형식적인 안식일 성수에는 아무 하자가 없었다 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인들이 성 밑에서 기다리면서, 누가 우연히 나오는 길에라도 물건 하나 사 사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혹은 장사할 수 없는 안식일이 어서 빨리 지나가고 성문 열릴 시간만을 기다리는 마음 자체가 이미 정신적으로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까 아모스서에서 나왔던 유다 조상들의 악한 마음, "안식일이 언제 빨리 지나가서 우리가 밀 장사를 계속할꼬"하던 심보와 꼭 같은 정신적인 범죄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정말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자 한다면 우리의 외면적인 주일성수만으로 다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주일날 가게 문을 닫아놓고 교회에 나와 앉아 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자신이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고 아까워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주일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예배당 좌석에 앉아 있어도 속으로는 '어서 예배가 끝나야 집에 빨리 가서 월드컵 중계를 10분이라도 더 많이 볼 수 있을 텐데.'하고 마음의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교인은 그 주일예배에 아예 빠지고 아침부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비교할 때 문자 그대로 오십보백보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외식적인 페인트 모션에 속아 넘어갈 만큼 그렇게 만만한 신이 결코 아니십니다.

  아무리 주일을 24시간 내내 지키고 교회당이라는 장소까지 지켜도, 그 마음에 억지로 지키는 것은 여전히 주일을 범하는 죄입니다.
  기독신자가 주일을 그렇게 무슨 '죽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처럼 지켜서야 하겠습니까?
  목사가 주일성수의 명령을 설교하고 전도사가 심방해서 권면하고 심방장과 구역장들이 주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손을 잡아 이끌어서 겨우 나오는 것은 초신자 때에나 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예수 믿는다는 사람의 평생의 주일 패턴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매사에 우리의 '행위를 살피시는' 동시에 우리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 드렸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예물'을 같이 보시고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으며, '아벨과 그 예물' 역시 같이 보신 후에 그의 제사는 받으셨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점수를 매기실 때에는 그 생활 즉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동시에 그 신앙 즉 그런 행동의 원인이 되는 마음자세, 이 두 가지를 항상 동시에 보시지 결코 하나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그저 외면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꺼운 마음으로 지키며, 날짜만 따지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온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킬 줄 아는, 주일성수의 온전한 수준에까지 꼭 이르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끝 22절에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안식일이 거룩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을 때 느헤미야는 그것을 개혁해내려는 의지를 끝까지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안식일 성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로 아껴주심'을 받게 되는 축복의 원리인 것 또한 그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중에 교역자 수련회를 다녀오면서 우리교회의 어느 강도사님 한 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이 분이 원래 다른 교단 신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알고 어떤 계기로 우리 교단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연이 참 기구(?)했습니다.
  그 강도사님이 그 다른 교단의 신학교를 다니면서 그 교단의 어느 교회에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의 유력한 어떤 집사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담당하던 고등부의 어느 한 학생이 주일을 자주 빼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당연히 그 학생에게 심방을 가서 주일성수를 잘해야 한다고 본인으로서는 간곡하게 권면을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에 그 교회 목사님이 이 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찾아갔더니 그 목사님이 하신다는 말씀이, '네가 뭔데 그 학생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라고 오히려 자기를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분은 큰 충격을 받고서 물론 그 교회 전도사직은 곧 사면을 내었고, 그 상처로 인하여 아픔을 겪던 중에 어떤 아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 교단에 속한 어느 교회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첫 출석하시는 주일에 마침 그 목사님께서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하는 설교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은 그 교회를 통하여 결국 우리 고려신학교로 오시게 되었고 덕분에 우리교회는 정말 좋은 강도사님 한 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인들에게 주일성수를 가르치기는커녕 그렇게 하는 부교역자를 오히려 야단치는 목사까지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 정도이니 교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십계명의 다른 아홉 가지가 중요하고 절대적인 명령이라면 이 제4계명 역시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는 사실상 주일 지키기 훨씬 더 쉬운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주말연휴가 확장되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가 완전보장된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넉넉한 돈과 시간을 노는데 쓰느라고 바빠서 오히려 주일을 더 쉽게 범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5일제 근무가 확산되면서 특별히 연휴가 있는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인들의 주일예배 출석률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이 현대 교인들이 실로 얼마나 '악하고 게으른' 것입니까?

  하나님을 제쳐놓고 육신의 소욕을 먼저 따르는 악습이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아홉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꼭 지켜야만 할 이 제4계명을 너무나도 쉽게 어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일성수에 대한 작은 범죄가 일단 시작되면 그것은 점점 더 악화되어 다른 죄들을 계속 낳게 되고 결국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그 더러운 곳으로 되돌아가는' 타락으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형식적으로 날짜만 겨우 지키면서 주일성수를 한다고 자부할 때, 그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마음과 정성과 뜻으로는 '거룩한 것을 범하는' 죄를 사실상 매주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정말 '즐겁게 안식할 날'로 정해주신 날이며,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반갑고 좋은 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 날은 '천하만민 다 보좌 앞에서 참 되신 삼위일체 거룩타 부르는' 예배의 날로 100퍼센트 사용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아예 특별히 구별해 놓으신 날입니다.
  주일을 지극히 소중히 여겨 '성문을 지키며.' 주일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면서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바로 그런 성도를 '아껴' 주시고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매주일 하나도 남김없이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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