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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사 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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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그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사야 60:1-3

안전 콤플렉스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인은 ‘안전’을 제일로 추구합니다. 물론 노름할 때처럼 어떤 것에 ‘올인’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 보면 안전이 ‘가치 중의 가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집을 살 때도 안전한가를 먼저 봅니다.
동네가 안전한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자동차도 안전한 차가 제일입니다.
각종 보험을 드는 까닭도 안전제일주의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느 정도 ‘위험’을 안고 있어야 발전이 있습니다. 위기의식 없이 성취감을 맛볼 수 없습니다. 비즈니스 운영도 그렇습니다. 너무 안전제일주의로 나가면 큰 성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저 인건비나 남는 그런 소규모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늘 “월급 받아먹으면서 살 때가 좋았어. 이게 뭐야, 불안해서?” 그런 불평을 입에서 뗄 수가 없습니다.

건강.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때 ‘긴장’하게 됩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유지”라는 말에 어폐가 있지요. 수영할 때처럼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현상유지’ 자체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 위에 뜬 거위가 평화롭게 보여도 물 밑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물갈퀴질하지 않습니까?

건강은 ‘온실’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도 압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은 ‘안전’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설교는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된 여러분에게 하는 ‘제한적인’ 혹은 ‘특정한 상황에 맞는’ 설교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다 언제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볼 때, 안전 문제는 모든 이들의 관심사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정말 긴급한 상황 중에 있을 때조차 (아니, 오히려 그런 때) 안전 불감증이랄지, 태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설교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다 가졌습니다. 즉, 금문교회 여러분에게 초점을 둔 설교이며, 이 설교는 누구든지 들을 수 있도록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선교라는 주제에 맞추어 말씀 전합니다.
조금 주제에 맞지만 특이하게 강조해서 말씀드리자면, 선교는 기본적으로 “안전장치를 풀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도 안전을 확보한 상태로는 선교할 수 없습니다. 안전할 때까지 선교를 기다리기로 말하면, 누구도 선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콜롬비아에 여섯 번 갔다 왔습니다. 작년 어떤 선교사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지난 1년 동안 6,000번의 납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콜롬비아에서 3,000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콜롬비아는 인구 5천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몇 %가 될까요? 60억이라면, 콜롬비아는 120분의 1, 즉 1%도 채 안됩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자행되는 납치의 50%가 거기서 발생했다면, 보통 나라보다 몇 배나 위험한 나라입니까? 적어도 50배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는 콜롬비아를 갈 때 점점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처음 콜롬비아에 갔을 때, 몇몇 가까이서 나를 돕던 사람들이 콜롬비아의 위기상황(특히, 게릴라에 관하여)을 ‘과장’한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전혀 발생하지도 않았던 것을 무슨 ‘소설’ 쓰듯이 거짓으로 지어내어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에 내가 여러분에게 전했던 콜롬비아의 상황은 상당부분 근거가 없습니다.

그렇게 접어두고도, 콜롬비아는 위험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콜롬비아 선교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반복합니다. “선교는 원칙적으로 안전장치를 풀어야 가능한 사역입니다.” 이것저것 다 챙기고 쓰고 준비하노라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습니다. 철모 쓰고, 총알 어깨에 두르고, 창 들고 칼을 메고 그렇게 완전군장을 꾸리노라면 시간이 다 가고 맙니다. 선교는 그냥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는 선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두 달란트 가진 사람과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은 각각 두 배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이문’은 곧 전도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장사하다가 본전까지 잃어버릴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꽁꽁 싸매어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      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마태 24:24-25, 개역

이 사람의 정서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역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확신”이 없었습니다. 안전은 “자기가 확보해야” 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내린 평가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사람이 악하고 게으른 것은, 그가 안전을 제일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마땅히 네가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마 25:26-27, 개역

즉 은행에라도 맡겨 이자를 낳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은행이 망할까봐, 그렇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이 사람에 대하여 취하신 대책을 들어 보십시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리라.
      마 25:28-29, 개역

듣기에 따라서는 ‘잔인하신’ 말씀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정글의 법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1. 있는 것, 즉 받은 것도 지킬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라는 “사실 선언” 말씀과, 2.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주님을 의지하고 일하는 사람은 더 많은 것으로 풍성하게 되리라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5:30, 개역

보십시오. 이 종은 “안전제일주의”였습니다. 그런데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겼습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전혀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곳입니다. 아무나 이 종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원수 마귀의 손길이 닿는 곳입니다.

자기의 판단대로 안전을 확보하려던 “무익한 종”의 결국입니다.

네. 안전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때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지켜낼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입니다. 앉아서 꾸물거릴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시간 보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먹고 마시고, 입고, 공부하고, 모든 사랑을 받으며 살아오게 하신 것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가까운데 뿐 아니라 “온 세상”입니다. 특별히 지구가 하나의 작은 마을이 된 오늘, 우리는 선교의 사명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음을 실감합니다. 정말 나가면 다 ‘거둘 곡식들’입니다. 낫만 대면 열매를 셀 수도 없이 거둘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계를 다 가 볼 수 없습니다. 시간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영어가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 훨씬 넓습니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방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는 살아갈 도리가 없습니다.

요새 우리는 월드컵(World Cup)이나 윔블던 테니스 소식을 접합니다. 그런 것을 아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적어도 공동의 화젯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관계를 ‘트고’ ‘분위기를 바꾸는 데’도움이 됩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소식입니다. 어디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떻게 죽어갔는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도울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소식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왜”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걸 알아야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방지’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중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당장 샌프란시스코에 떨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하고 말 수는 없습니다. 북한은 왜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우주선 발사가 맞물린 시점에 미사일을 쏘았을까? 중국은 어떤 태도일까? 미국은 이에 대하여 어떤 자세로 나갈 것인가? 한국의 정부는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미주에 사는 우리는 도대체 무얼 더 알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필요하면 전문가에게 물어야 합니다.

왜 세계적인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만 ‘안전’하다면 나머지 일에는 신경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수입’과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하기도 벅찬 세상에, 북한의 미사일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의 비참함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더욱이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이 빗발치는 그런 나라들을 ‘방문’할 이유가 있을까?

오늘 주님께서는 “일어나라.” 하십니다. 안전한 공간, 방공호 같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어둠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은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거기가 우리 발자국을 찍어야 할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우리의 빛을 비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은 바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빛은 “주님의 빛”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60장은 “주님의 빛”이라고도 하고 “너희의 빛”이라고도 했습니다. 확실히 이 빛은 주님의 빛입니다. 그 빛을 받은 우리는 그 빛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빛”도 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소금이나 빛 같은 고귀한 성품을 ‘본래’ 품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아무런 ‘선함’도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소금’이며 ‘빛’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의롭지 못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이며, 거룩하지 못한 인생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씻어 주시고 구분해 주셔서 거룩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은 우리에게서 난 속성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본질입니다.

이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죽음 가운데서 살려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이제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신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석에 가만 두신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할 일”을 주신 것입니다.

환대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해 무슨 할 일이 없는가?” 찾게 됩니다. 정말 무슨 ‘봉사’를 기쁨으로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을 어찌할 수 없어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일을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온 세상이 다 ‘구원’ 받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개역

1. 콜롬비아
금문교회는 남미 콜롬비아에 선교하고 있습니다. 이 선교는 특수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a. 그 나라 수도 보고타에 개척한 교회를 지원합니다.
대지 구입비를 지원했고, 교회 운영과 목회자 생활비를 지원합니다.

b. 신학교 교육입니다.
보고타에서 한 시간 반 가량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후사가수가(Fusagasuga)에 자리 잡은 신학교입니다. 지난 2002년부터 일 년에 두 차례 방문해서 신학 강의를 합니다. 매번 대략 40명 정도의 원주민 학생들이 모입니다. 매번 갈 때마다 40 시간짜리 한 과목을 강의합니다.

또한 대학원생 네 명을 뽑았습니다. 각각 두 명씩 구약과 신약을 전공하는 학생들입니다. 이들은 이 신학교의 교수요원입니다. 나는 이들의 학교생활과 논문을 지도합니다. 아울러 우리교회는 이들에게 매달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장학금은 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지급합니다. 졸업해서 교수가 되면 장학금을 ‘연구비’ 명목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계속 지원합니다. 그들이 그 학교에 교수로 남아있는 한 지원을 끊지 않습니다. 물론 그 학교가 ‘자립’하게 되어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 사정은 달라질 것입니다.

거기다가 갈 때마다 약간의 옷가지를 가지고 갑니다. 주로 어린 아이들 옷입니다. 대략 이민가방 하나나 두 개에 채워 가지고 갑니다. 가난한 나라 콜롬비아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입니다. 최근에는 몇몇 성도들과 단체들이 보다 많은 물량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콜롬비아 선교는 ‘교회’와 ‘신학교’ 두 가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물론 재정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올해는 지난 2월에 이어 9월에 두 번째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2. 방글라데시
네 명의 어린아이들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접적 선교’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보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아프리카와 중국, 그리고 북한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교의 영역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장해 나가려고 합니다.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선교에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선교적 열정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기도하면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새삼 우리교회의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을 나눈 까닭은, 오늘 말씀의 주제가 “일어나 빛을 비추라!” 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공부
세계지도를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결국 하나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고 해도, 공통점이 훨씬 많습니다. 얼마간의 차이점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역사공부가 필요합니다.
“현재”를 이해하는 공부도 필요합니다.
‘언어’ 공부에 신경을 씁시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 스페인어, 2. 중국어 등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만 신경 쓰면 간단한 회화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로”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3년이 지나면 스페인어와 중국어로 간단한 설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 적절하게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말씀은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선교의 목적으로 공부한다면, 그 공부의 열매를 거두는 데 이 말씀이 힘이 될 것입니다.

1. 우리 중에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합격하고 좋은 점수를 받아 주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2. 우리 중에 경제활동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선교에 꼭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기업경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목적으로 공부하고 일한다면, 그 일 자체가 이미 “선교”입니다. 그 일 속에 하나님께 드리는 선교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열매를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서원을 갚을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합력하여 그 열매 거둠을 위해 기도합니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 같은 언어와 풍습을 나눈다고 해도, 커뮤니케이션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이며, 열정입니다. 비전이며 꿈입니다.

이 지역도 선교를 못 했는데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우리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선교와 해외선교는 ‘같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지역선교를 완벽하게 끝내고 해외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의 ‘시험’입니다.

모든 인종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선교하는 사람에게는 편견이 사라집니다. 오만이 사라집니다. “편견과 오만.” 이것은 정말 무서운 실체입니다. 이것은 밤하늘의 불꽃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편견과 오만은 실체입니다. 삶을 고립시키고, 파괴시키며,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전파는 곧 생명입니다. 사명(使命)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근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안 살 길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 자신”을 위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그 자체로가 아니라 “사명으로” 존재합니다.
우리의 빛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빛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 안에서 우리 존재 가치가 생겨납니다.

존재가치와 사역가치가 일치할 때 행복합니다.
나는 모든 금문인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어학 실력을 길러야겠습니다.

우선 영어를 잘 해야겠지요.
영어실력은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조금씩 해야 합니다.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연습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어쩌면 연습시간 자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는 “하루도 빠지지 않습니다.” 꾸준합니다. 전문가는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하지 않습니다. 꼭 한 시간씩 한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어도 그렇습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하게 하는 겁니다.

콜롬비아를 자주 가면서 “에스파뇰”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낍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아직도 몇 개의 단어만 알 뿐, 회화가 되지를 않습니다. 한번은 학생들에게 방언에 대해 이야기 했더니, John이라는 20대 초반의 학생이 쉬는 시간에 조용히 물었습니다.

“독또르 조. 당신은 방언을 한다면서 왜 에스빠뇰은 그렇게 못합니까?”

정말 “에스뺘뇰을 공부해야지!” 수도 없이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꼭 시작해야겠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만 하겠습니다.

또, 중국어에 대한 욕심도 남다릅니다. 책도 몇 권 사다놓았습니다. 학교에서 클라스도 들어갔습니다. 중국어는 영어와 스페인어와 함께 이미 세계 3대 언어입니다.

이제부터 나를 만나면, “목사님. 스페인어는 진도가 잘 나갑니까?” “니 하우마?” 그렇게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중국은 북한과 인접한 나라이기 때문에, 북한선교를 위해서도 중국어는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 스페인어와 중국어 강좌를 열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교적 열정과 사명을 가진 성도들이 지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세계 선교를 위한 사명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 가운데 거룩한 백성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세계지도를 펼쳐놓아야 합니다.

빛을 발해야 합니다. 세계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전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친 요한 웨슬레처럼, 우리는 온 세상을 다 우리의 관심 영역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는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국제감각을 날마다 갈고 닦아 나가면서, 선교의 비전을 조금씩이라도 실천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가장 먼저 시작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해야 할 것도 “기도”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쉬지 않는 기도는
1. 일어나는 일입니다.
2. 빛을 발하는 일입니다. 

위험을 ‘즐기는 것’은 살아있다는 기쁨에서 납니다. 시험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고, 비즈니스에서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납치될 수도 있고, 전도하다가 낭패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움츠러들지 맙시다. 그건 성도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싸워 이기는 과정” 중에 빛이 납니다.

SFTS 다니던 1980년 후반, 나이지리아 룸메이트와 1년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서 배운 영어입니다.

      How are you?
      OK, I am kicking!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운동장을 달리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공을 차며 달리는 중입니다. 숨이 턱에 닿더라도 내게는 “골인”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선교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이 끝까지 놓지 않은 소망의 끈이기도 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오늘도 달려가는 성도 여러분의 삶에 크신 은총을 빌어 드립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저희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생명에 걸맞는 사명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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