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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냄 받은 자 (마 10: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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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입양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생모를 찾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려진 존재들이었습니다. 보호시설에 보냄을 받게 되고, 입양기관에서 해외 양부모님들을 소개해서 그 양부모님에게 보내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생모를 찾겠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보내진 존재입니다. 스스로 자생한 존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매우 확실하게 증거하고 강조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 짐승 한 마리도, 곤충 한 마리도, 이 역사 속의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보내신 자를 아는 것

  칼 바르트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만날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우리가 보냄을 받은 자라면 보내신 자를 알아야 합니다. 보내신 자를 만나야 합니다. 내가 나를 아무리 알려고 해도 나를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나를 보내신 그분을 알면 됩니다. ‘내가 왜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를 알려면 나를 보내신 그분을 알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연구할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지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읽어 가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줄 아노라” 이 말씀 앞에 그는 잠자던 믿음이 폭발했습니다. 그 말씀을 접하자 루터의 가슴 속에 성령의 불길이 솟아났습니다. 그는 그 말씀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루터는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책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서 성경책을 날마다 펼치면서 말씀을 읽고, 듣고, 이 말씀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되도록 성경을 펴고 사십니까? 아니면 한 주간 동안 이 책을 덮어 놓고 사십니까? 가정예배를 드리려 할 때 성경책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그런 모습으로 성경을 천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얼마나 열고 삽니까? 이 말씀 속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 말씀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을 알 길이 없습니다.

  부르심과 보내심

  마태복음 10장은 소명장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을 다루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제자들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쫓아내며 약한 것을 고치시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마디, ‘부르셨다’ ‘주셨다’ ‘보내셨다’를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주님이 부르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자가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능력,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보내시는 분입니다. ‘가라’고 보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calling' 부르신다는 것, 'giving' 주신다는 것, 'sending' 보낸다는 것, 세 가지가 본문에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 가지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로 보냄 받았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보내심의 현장입니다. 나는 왜 이 가정에 사는가? 혹시 여러분의 가정을 비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현실을 비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은 하나님이 보낸 장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 많은 교회를 두고 오늘 이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이 이 교회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업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이 보낸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calling, giving, sending 이 은혜 안에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워라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에 “내가 너희를 보내니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양은 이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양은 날개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 발톱도 없고, 독을 피우는 무기도 없습니다. 양은 어리석고 순합니다. 그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시는가? 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가? 죽으라고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리가 우글거리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보내면서 당부를 하십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뱀이라는 동물이 왜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가? 보기 좋고, 인상 좋고, 어감 좋은 동물이 많은데 왜 하필 뱀인가? 말만 들어도 섬뜩하고 기분이 안 좋은데 왜 뱀을 들어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는가? 여러분, 뱀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뱀 같이 되라가 아니고 뱀같이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뱀은 상당히 열악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뱀은 발이 없습니다. 여러분, 발 없이 걷는다는 것, 이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합니까? 뱀은 온 몸으로 기어가는 불리한 동물입니다. 신체구조상 유리한 것이 없습니다. 그 약한 곤충도 다리가 있는데 뱀은 다리가 없습니다. 뱀은 팔도 없습니다. 뱀은 신체가 막대기 같은 몸 하나뿐입니다. 막대기 같은 몸 하나로 뱀은 나무에도 잘 올라갑니다. 물에 던지면 수영도 잘 합니다. 그 막대기 같은 몸을 가지고도 못하는 것이 없고, 못 가는 데가 없습니다. 그것이 뱀입니다. 이 뱀이 생태계에 적응하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다리가 없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멋지게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이 뱀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한 팔다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불평하고 원망하고 삽니까? 뱀을 배우십시오.

  제가 잊혀지지 않는 인상이 하나 있습니다. 70년대에 부산에 있는 국군통합병원에 어떤 성도의 일로 제가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은 그 당시만 해도 팔과 다리를 잃은 전상자들이 치료받는 병동이 따로 있었습니다. 한 병실에 들어가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곤충도 팔, 다리, 날개를 빼고 보면 아주 비참합니다. 사람이 하반신을 잃어버리고 거기다 팔까지 잃어버리고 나무토막처럼 누워있고 앉아 있는 그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인상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뱀은 팔 다리가 본래부터 없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잘 살아 갑니다. 우리는 다 가지고도 왜 그렇게 넘어지고 쓰러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들은 나가면서 주머니에 용돈을 수북하게 넣어 가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 너희들을 잡아갈 것이다, 너희들을 공회에 넘겨줄 것이다, 임금 앞에 너희들을 끌고 갈 것이다, 핍박자들이 너희들을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활동하시는 너희 아버지 성령이시니라, 그러므로 두려하지 말아라. 이와 같은 당부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울 때 뱀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열악한 신체구조를 가지고도 생태계에 잘 적응하고 있는 뱀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이리가 우글거린다고, 이리를 보지 마시고 이리를 이기는 지혜를 발휘할 줄 아시기 바랍니다.

  순결하라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비둘기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먹기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안 먹는 것은 배가 고파도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둘기의 생태랍니다. 이것은 성도가 지녀야 할 믿음의 순결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함께 가져야 서로 가치가 있습니다. 지혜롭기만 하고 순결이 없으면 교활해집니다. 순결을 가진 지혜라야 겸손합니다. 지혜가 없이 순결하기만 하면 무능해지고, 남에게 속임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순결이라야 용감하고 정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순결을 요구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이것을 지니고 이리 가운데 가도 거뜬히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가서 부딪히라, 너희들이 가는 그 현장에 너희들을 끌고 가고, 잡아가고, 너희들을 핍박하는 손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내가 있느니라, 거뜬히 이기게 하느니라. 이것이 우리를 보내신 자의 당부입니다.

  보냄 받은 우리들은 우리를 보낸 그 분의 당부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이 당부를 놓쳐버리면 보냄 받은 자들은 당황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무거운 압박들, 짐들, 고통들, 수많은 질고에 시달리며 온갖 땅위의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가는 그 곳에는 이리들이 있는 곳이다. 온갖 것들이 인간들을 괴롭히는 이리로 변장을 해서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장에서 지혜롭고 순결한 보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당당한 보냄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성도의 가정에 늦둥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아버지의 나이가 52살입니다.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만 아버지를 반항합니다. 아버지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잘 다니던 교회도 한 번 빠지고, 두 번 빠지고, 교회생활도 불규칙하고 이렇게 빗나가고 반항을 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달래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윽박질러도 안 듣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사님께 상담을 했습니다. “이놈이 저런 모습인데 내가 가만히 보니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저렇지 않을텐데요.”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의 믿음 없음을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학교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주인공이 이 성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사연을 알아보니 단순한 학생들 싸움이 아니고 알고 보니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아주 신나는 싸움을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을 했었던가 봅니다. 그 예수 믿는 사람을 비난하고, 교회도 비난하고, 하나님도 비난하니까 이 아이의 마음속에 있던 믿음이 발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아이들 앞에서 복음을 변호하고 당당히 맞섰지만 이길 리가 없습니다. 상대방 쪽에서 자기의 말을 들어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주먹질을 하고 결국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아이는 현장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족합니다.

  현장의 용기를 발휘하라

  우리는 이리가 있는 그 현장에서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리가 없는 데서 큰소리치지 말고 이리가 물려고 하는 거기서 지혜롭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대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일날 일등신자가 되려하지 마세요. 평일날 현장에서 일등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일날은 다 일등입니다. 주일날은 다 믿음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평일날 하나님이 보시는 진정한 인격자로서 우리가 충성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의 설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충만 자체를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다.” 즉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은혜 받고 살아가면서 성령 충만한 성도로 살아갔다는 모습이 사도행전에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면서가 아니라 성도들은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분들 앞에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사역했음을 머레이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보냄 받은 자는 보내신 자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늘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존중하면서 보냄 받은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보냄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은 소명장, 혹은 사명장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소명을 받은 자요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책임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신비로움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기자들이 끊임없이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과학자로서 성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이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기자들이 열 마디를 물어도 겨우 한마디를 하는 정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유창한 대중 강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침묵하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과학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S=X+Y+Z라는 공식입니다. S는 success 성공입니다. X, Y, Z는 영어 알파벳의 맨 끝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강조하려면 ‘하나, 둘, 셋’ ‘A, B, C’ 이렇게 앞에부터 정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X, Y, Z 끝에 것을 가지고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아주 필요한 교훈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설교자, 목사, 사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분의 말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과 많이 통하고 있습니다.

  성공의 비결 첫 번째 X는 말을 적게 하고 실천하라. 그러면 성공에 이른다. 두 번째 Y는 삶을 즐기라. 네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라. 일 자체를 즐거워하라. 세 번째 Z는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살라. 저는 세 번째를 영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아인슈타인이 생각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과학자로서 과학의 진리를 생각하고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고 검토하는 의미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일하고 바쁘게 사십시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보내신 그 분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까지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그분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분을 만나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뵙는 말씀을 먹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현대인들이 들어두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줄 모릅니다. 온통 속력만 낼 줄 알지 속력을 멈추고 생각을 할 줄 아는 것에 매우 서툴다고 봅니다. 우리가 고난이 올 때도 그 고난만 붙잡고 씨름하지 말고 그 고난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내어 놓고 그분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괴로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감정을 중단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곁들여져야 합니다. 이 아인슈타인의 교훈은 일반적인 교훈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고 증거이고 실천입니다. 우리는 삶을 즐겨야 합니다. 내가 하는 삶을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자요, 우리는 하나님께 은사를 받은 자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보냄 받은 존재입니다. 보냄 받은 존재는 보내신 자를 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보내신 그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알려면 나를 보내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아무리 거울을 붙잡고 씨름을 해도 하나도 수정이 되지 않습니다. 거울 속에 있는 내 얼굴에 무엇이 묻어 있다 해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아무리 닦아도 되지 않습니다. 내 실체를 닦아야 합니다. 내 실체의 얼굴에 묻은 것을 제거하고 거울을 보면 거울 속의 나도 제거가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보내진 존재입니다. 스스로 솟아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내신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보낸 그분을 잊어버리든지 그분을 등지든지 그분을 무시해 버리면 나라는 삶의 존재는 산산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내 존재의 목적이 있고 내 존재의 가치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그분을 알 때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보낸 그분의 의도를 알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고 나를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삶 속에서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보냄 받은 자로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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