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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사랑하는 자의 기쁨 (사 66:10~11, 요이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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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강한 것이 열두 개가 있습니다. 먼저 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은 쇠에 의해 부숴집니다. 쇠는 불에 녹아버립니다. 불은 물로 꺼집니다. 물은 구름 속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구름은 바람이 불면 날려버립니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날리지는 못합니다. 인간도 공포에 의해 비참히 위축되어 버립니다. 공포는 술로 제거됩니다. 술은 잠을 자면 깹니다.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조차도 사랑에는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가장 많이 행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많이 말하지만 참 사랑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랑도 점점 세속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드라마, 노랫말, 영화, 소설, 온통 사랑이야기입니다. 요즘 TV 드라마의 사랑 이야기는 좀 혼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사랑이나 주제가 썩 건강치 못해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판박이라면 더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이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 사랑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계단에 까지 온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계단에서 이제 천국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원리에서 보면 우주의 원리입니다. 동양에서는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우주를 설명합니다. 이(理)는 만물의 원리이며, 기(氣)는 생동의 원리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로고스(logos)가 우주의 원리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원리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만물의 원리이며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합니다. 창조하신 것도,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간관계를 이루는 근본적인 특성입니다. 인간의 정서라기보다 인간관계를 이루는 완전한 속성이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7-8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을 사랑이심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인간관계의 속성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수단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립하는 이유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부요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모두를 부자로 만듭시다. 우리 모두가 사랑에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랑은 새 계명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22장에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2:37-38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하십니다. 39-40절에서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십니다. 계명의 첫째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계명의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전체 계명입니다. 많은 율법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모두 종합하면 사랑입니다. 계명은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과 사랑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율법과 사랑은 별개가 아닙니다. 계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인도에서는 종교가나 학자를 일컫는 존칭으로 ‘스와미’라 합니다. 인도의 유명한 스와미인 스와미 쉬바나다는 제자들에게 “지성을 죽여라, 그러면 아니 그래야만 명상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네 지성 즉 지적인 면을 다하고, 네 마음 즉 의지적인 면을 다하고, 네 힘 즉 신체적인 면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정의를 다 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용서받으면서도 용서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므로 사랑의 빚을 갚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므로 용서를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합니다. 13:1에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천사의 소리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같은 크기의 소리라도 음악과 소음이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2절에는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능력과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능력, 사랑 없는 믿음의 역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3절에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사랑 없는 구제, 사랑 없는 희생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성령의 열매가 전혀 아닙니다.

  사랑만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은 좀 부족해도, 몰라도, 안 해도 다 감추어집니다. 탈무드에는 “사람은 세 가지 일은 감출 수 없다. 기침, 가난, 사랑이 그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드러납니다. 사랑으로 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성경에는 “은혜와 사랑”이란 말이 함께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바울을 위시한 여러 서신들에서 “은혜와 사랑”은 함께 등장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왜 함께 나타날 까요? 사랑은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고, 이미 가지고 있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랑을 서로 공급하고 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전혀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랑은 계명을 따르는 것이고 계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바와 같이 그 가운데 행하라 하심이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가장 강력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십니다. 모든 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진실, 핵심내용이 무엇일까요?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5:3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과 계명의 일치와 조화를 말씀합니다. 사랑은 곧 계명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것이 곧 계명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는 모든 율법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고 합니다. 사랑과 계명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보세요.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을 오래 참음, 온유, 성내지 아니함, 시기하지 아니함, 자랑하지 아니함 등으로 해석합니다. 사랑이 요구하는 이것들을 다 해보세요.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 하나만 해도 모든 율법을 다 이루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강력한 표현은 ‘서로’라는 말에 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6:32에는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선택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이치입니다. 요한복음 13:35에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제자의 삶이고, 동시에 선교의 수단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와가 “절 사랑하세요?” 라고 묻자 아담은 무관심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럼 누가 또 있나?” 이런 대답은 사랑의 답이 아닙니다. 둘만이 있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아무리 많아도 둘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흡족하게 해주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하와가 묻는 말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초상화를 멋지게 하나 그려놓고 싶었습니다. 그는 세계 제일의 화가를 청하였습니다. 대왕은 자신의 얼굴 전체가 다 나오도록 그려달라고 주문하였습니다. 화가는 상당히 당황하였습니다. 대왕의 오른쪽 뺨에는 큰 흉터가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화가는 고민하던 끝에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놓게 하여 손가락으로 흉터를 가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 사람의 약점을 가리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약점을 가리면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대하면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4:8에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허물도 죄도 다 덮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은 눈에 콩깍지가 씌어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당신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in you everybody), ‘나는 세상을 통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thru the world), ‘당신 안에서 나의 인생을 사랑합니다’(I love in you also my life)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골로새서 3:14에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권합니다.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해야 이 모든 것이 온전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온유와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용서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디스 와튼은 “빛을 발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촛불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불완전하고, 사랑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랑을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 사랑은 흉내만 내어도 세상이 엄청나게 변할 것입니다. 사랑엔 낭비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랑을 주님은 하셨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결론

  어떤 여자가 새로 남자를 사귀었습니다. 이번에는 편지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남자에게 “100일 동안 매일 밤 나를 찾아와준다면 결혼하겠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 남자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밤마다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찾아왔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나무에 금을 긋고 갔습니다. 99일째 되는 날은 폭풍우가 치는 날이었습니다. 이 남자는 이 날도 궂은 날씨에 여자의 집을 찾아와서 나무에 금을 긋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여자가 뛰어가서 “이제 됐어요.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우리 결혼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이 남자는 정색을 하며 “나, 아르바이트생인데요”라고 하였습니다.

  사랑도 상업화되고, 이기적이고, 진실성이 없는 삭막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하고 진실합니다. 이 사랑으로 사랑해야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눈동자가 45%까지 확장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점점 더 눈동자는 작아진다고 합니다.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눈동자가 커지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눈동자가 커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감동케 하고, 구원했던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고, 구원하는 기쁨이 늘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의 삶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품고, 화해하고, 세상에 소망을 주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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