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큰 진노 중의 은총 (나 1:2-15)

  • 잡초 잡초
  • 239
  • 0

첨부 1


지금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날이 늘 흐리고 자주 비가 내립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루, 또는 몇 시간 햇볕이 나면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 햇볕이 유난히 밝아 보입니다.

‘오 맑은 햇볕 너 참 아름답다’라고 시작되는 외국 가곡을 부르고 싶어집니다.
십이 소선지서 가운데 하나인 나훔서의 1장에는 그런 느낌을 주는  부분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2장에도 한 군데 있습니다.

나훔서는 앗수르 제국의 서울인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는 성경입니다.
나훔서의 시작인 1장 1절 앞부분을 보세요. “니느웨에 대한 경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은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니느웨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훔서에는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2절을 보세요. 질투, 보복, 진노,  8절을 보세요, 진멸, 흑암, 9절 보세요, 재난,  12절 보세요, 멸절…, 나훔서는 계속해서 이런 강한 말들로 이어집니다.
그런 가운데서 1장 3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7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5절에는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산 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장 2절에는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들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장마 가운데 맑은 날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대부분 유다를 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절과 6절에는 진노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나훔서에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큰 진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유다를 향한 은총이 보석처럼 두어 군데에서 반짝이고 있는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참한 멸망을 선포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은총을 말하는 성경입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큰 진노 가운데서도 은총을 입은 자들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훔서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나훔으로부터 150여 년 전 이전에 요나가 니느웨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일이 있습니다. 

요나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 4) 외쳤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왕과 모든 주민들, 심지어는 소와 양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추상적인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관념적이고 습관적인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실천적인 회개였습니다(욘3: 8).
결단의 회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욘3: 10).
그런데  지금은 나훔을 통해서는 철저한 멸망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2장 6절과 7절을 보세요. 니느웨의 멸망은 왕궁이 소멸되고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고 시녀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비참한 멸망이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예언자를 통해서는  내가 그들을 어찌 아끼지 아니 하겠느냐고 하시고(욘4: 11), 한 예언자를 통해서는 9절을 보세요, 온전히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훔서는 요나서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편이 좋아야 정말 좋은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전편이라면 천국은 후편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전편은 좋았으나 후편은 이렇게 비참합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무엇 하러 보냈습니까?
하나님은 변덕쟁이입니까? 일구이언 하시는 분입니까?
약 주었다가 그 다음에는 못 고칠 병을 주는 분입니까?

문제는 니느웨가 믿음을 바탕으로 한 도성이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침략을 일삼던 나라였습니다.
유다의 형제국가인 북왕국 이스라엘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나훔서 3장을 보세요. 니느웨를 “피의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짓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않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무수한 시체…,

싸움을 좋아하는 도성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생생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나훔은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묘사력이 뛰어난 문학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이방도시였습니다. 요나 때 일은 한 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때의 그 회개운동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때 물이 솟구쳤다가 잠시 후 아주 말라버린 사막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니느웨는 요나서 1장 2절의 표현과 같이 다시 악독한 성이 되었습니다.
니느웨 주민들은 요나가 방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일은 잊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대해 유다는 믿음이 바탕이 된 나라였습니다.
유다도 잘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때때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미약하지만 그래도 믿음의 냇물, 말씀의 냇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중심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믿음을 멀리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생활을 하고, 그래도 믿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 믿음을 간직한 사람,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 설교를 맡은 전도사님이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심에 믿음이 자라잡고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믿는 사람은 달라!’ 하는 소리를 듣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큰 진노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라는 자기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대신 아이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 아이가 이스마엘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가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주어 내보냈습니다.
이들 모자는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죽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하갈은 아이를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너의 아들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이스마엘의 후손은 오늘날 아랍 족속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밝게 하시어서 샘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21: 17).

하갈이 아이를 바라보며 울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 내어 울며 부르짖었더라면, 자기의 억울하고 힘든 처지를 호소했다면 ‘하나님이 하갈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다’고 기록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하갈이 소리 내어 운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 모자는 살게 되었습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이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떡 보다 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요나서 2장 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하나님은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어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어느 지점에 토해냈는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두 번째로 니느웨에 갈 때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나서 3장 2절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욘3: 3)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걸어서 금방 도착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니느웨 가까운 곳에  요나를 날라다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잠수함을 타고 여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마8: 23~27).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가운데 하나인데 기적은 하나님의 비상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도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비상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바라보며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부르짖으세요. 진노 가운데 은총 입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으세요. 더 큰 은총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어 큰 진노 가운데 은총을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약하고 소수인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니느웨는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대제국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나훔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신흥제국 바벨론이 일어나서 앗수르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유다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변방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진노의 대상이었고 유다는 은총의 대상이었습니다.
진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강성한 다수가 아니라 은총의 대상인 소수에 속해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훔서를 보면 진노의 메시지가 대부분이고 은총의 메시지는 아주 조금입니다.
나훔서는 모두 마흔다섯 절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은총의 메시지는 넉 절 뿐입니다.
나훔서에서 진노가 주류라면 은총은 비주류입니다.
비주류는 항상 서럽지요.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분들은 비주류에서 벗어나 주류사회에 끼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나 은총을 받는 비주류는 아름다운 비주류입니다.
여러분,  이 사회에서 비주류인 것을 서러워하지 마시고 아름다운 비주류인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바람직하지 못한 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소돔에 살 때 그 곳 주민들의 방탕한 삶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믿음이 바탕이 된 사람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소돔을 찾아온 두 천사를 잘 대접한 일, 소돔 주민들이 자기 집에 손님으로 온 두 사람을 끌어내서 성폭행의 대상으로 삼으려 할 때, 그것도 동성관계의 성폭행을 하려고 할 때 자기 두 딸의 희생을 감수하며 손님을 보호하려고 한 일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돔 주민들로부터 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창세기 19장 9절을 보세요.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고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유관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