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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으면 기적을 봅니다 (요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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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39)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
(요 11:40)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
(요 11:41)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요 11:42) 나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
(요 11:43)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시니,
(요 11:44)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앞이 캄캄해 지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이 들면 깨는 것이 무서울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이용하여 허황된 바람을 불어넣어 속이고 돈을 빼앗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전에 어떤 집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몸이 앞아 큰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도 치료의 방법이 없다는 낙심천만의 말을 듣고 나와서 가족들끼리 어쩌면 좋으냐?고 서로 위로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이런 병을 잘 고치는 한의원을 아는데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환자를 생으로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답니다. 집사님이 지혜로와서 분별을 잘 해서 그렇지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 재산을 많이 손해보고 더 몸이 빨리 무너지는 예도 많습니다. 집사님도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안될 것을 뻔히 알지만 그래도 혹시 하고 매달리고 싶더라는 것입니다.

사이비종교, 이상한 기도원 간판 걸고 비슷하게 사람을 미혹하는 집단이나 개인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누구도 낫았고 누구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받았다고 하면서 미혹하여 혼미한 영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또 어떤 집사님이 암에 걸려서 치료중에 있는데 한 때 우리 교회에 나오다가 떠난 두 분이 찾아왔답니다. 찾아와서는 위로하며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며 능력이 많은 분이 있는데 기도받으러 가자고 끌더랍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우리 목사님에게 기도받고 성도들이 기도해주는데 궂이 거기까지 쫓아다니고 싶지 않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회복을 약속하셨으며 목사님께서 심방와서 주신 말씀을 통해 주께서 거듭 같은 말씀으로 확신을 주셨다. 나는 말씀을 붙들겠다. 생명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인데 주님께 맡기겠다. 라고 거절했답니다. 그분이 정말 다시 보이게 되더라구요. 위기속에 던져지면 누구라도 분별력이 떨어지고 아무거나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침착하게 분별하여 아닌 것은 한 마디로 딱 거절하는 용기에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은 수준이 있습니다. 적어도 집사님이 되면 이 정도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붙잡아야 할 것은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기적으로 가득차 잇습니다. 기적을 빼 버리면 성경은 겉 표지만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기적과 기적을 가장하여 거짓으로 속이는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무게중심을 누구에게 두는가?를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진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기적의 주체이십니다. 그래서 삼위의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시키고 의지하게 만들면 그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가짜는 사람이 주체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큰 능력을 받아 권능을 행한다고 현혹하여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며 예수님께 향하고 있는 시선마저 흐리게하면 가짜입니다. 오로지 그가 능력을 행하였기에 돈을 얼마를 가져오라고 대가를 강조하면 틀림없는 가짜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가짜들이 판을 치고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현혹하는 일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정말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적은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기적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게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위기를 만난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기적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손을 내밀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시면 슬퍼하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었던 마르다에게 주께서 40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하신대" 네, 여기 보면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믿으면 보리라 라는 두 가지 동사가 나와요. 믿으면 보리라.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보여주십시오. 좀 내 앞길이 잘 될 것 같은 것을 좀 보여주십시오.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을 내게 보여 주라. 하나님이 살아 있는 증거를 내 눈앞에 당장 보여 주면 믿겠다. 그러나 주님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믿으면 보리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미래의 영광, 내일의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둡습니다. 캄캄한 오늘이라는 삶의 현장 그러나 저 건너편에 주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눈, 이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뭐라 그랬어요?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보이지 않는 미래 그러나 내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의 미래, 밝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께서 오늘 열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으면 그 영광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우리의 삶의 조건 속에서도 절망을 거부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 재기의 출발점입니다. 기적을 낳는 위대한 출발점이 될 수가 있어요.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기적을 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시각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의심이 가득한 눈, 육안으로 보여지는대로만 받아들이는 눈을 내려놓고 새눈을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눈, 하나님이 새롭고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을 기대하며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적이 우리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믿음과 함께 무얼 강조했어요? 순종입니다. 순종.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믿음으로 꿈꾸는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현실로 체험하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이 있습니다. 순종. 성경에 나타난 그 기적의 사건들을 연구해 보면 흥미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 다 행하시지 않아요. 어떤 한 부분을 딱 남겨 놓으십니다. 그리고 이건 네가 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도 그런 사건이 나타나는 돼요. 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 자 죽은 사람 살리는 것,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여기 38절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말씀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유대인들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죠. 그리고 굴 앞에는 큰 돌이 막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기왕 기적을 행할 바에는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적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렇게 명령하실 수도 있습니다. 돌아 굴러라. 나사로야 나와라. 돌이 싹 굴러가면서 예수님이 싹 걸어 나오시면 얼마나 드라마틱하겠어요. 돌이 굴려지고 나사로가 나오면 얼마나 멋있는 장면이겠어요. 그런데 이 돌을 옮겨 놓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렇죠? 너희들이 할 수 있잖아 그건. 옮겨놓으라. 그리고 할 수 없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 그 부분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책임 그 부분을 감당할 때 그 다음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주께서 역사하십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땡돌이가 시험을 치르게 됐답니다. 문제지를 받아보니 아는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교수가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을 기억한 땡돌이는 답안지에 주기도문, 10계명 등을 잔뜩 써 넣은 뒤 `잘 부탁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얼마후 교수가 답안지를 채점해 돌려주었습니다. 땡돌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안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답니다. `회개하라.`

이상해요 하나님이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다 하지 않고 어떤 부분을 꼭 남겨두셔요. 그건 네가 하라. 돌은 네가 옮겨 놓으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부분을 주께서 감당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감당할 때 때때로 그 순종의 부분이 고통스러울 수가 있어요. 희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때 나머지를 책임져 주시고 부활을 주시고 기적을 주시고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다면 현재 외양간에 소도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으며 밭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기다림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멘토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려 줍니다. '희망'이란 궁극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곧 앞으로 곧 올 것을 말합니다.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성취와 응답만큼 중요한 축복은 기다림의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응답이 없기 때문에 조급하게 믿음을 버리고 사랑을 깨며 희망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기다림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에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련과 고통이란 곧 기다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몇 천 년 동안 인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려고 2천년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사야서 30장 18절에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사랑은 기다릴 줄 아는 것이고, 희망은 기다림의 기술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살리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 사랑, 기쁨 등을 경험시키려고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나사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더 유하시고 유대로 가셨으니 나사로를 포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단지 응답의 시간이 우리와 맞지 않을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독, 눈물, 고통 안에서 더욱 괴로워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지만 나사로의 경우는 죽음에서 살려주셨습니다. 복의 깊이가 다릅니다. 15절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이 말씀은 '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지 않은지 알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계산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등품이 아니라, 특상품이라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정리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시간을 세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멈춘 게 아니라, 계속 흐르며 계산되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이 끝냈다고 하나님께서도 끝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죽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판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과 부활로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사로는 죽음에서 일어났고 기적이 발생하였습니다. 성도의 생애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을 불러오는 주체는 살아게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재료로 삼아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기대하는 열린 눈을 가지고 사건과 환경과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또 믿음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잘 듣고 즉각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시간을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열린 눈과 순종과 기다림이 있는 곳에서 주님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치유의 기적, 소생과 회복의 기적, 변화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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