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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실인생으로 살지 말자 (갈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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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여행을 갖다온 몇 쌍의 신혼부부가 여행사에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혼여행이 너무나 기대에 못 미치는 부실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숙박도 약속대로 지키지 않고, 여행 스케줄도 약속대로 지키지 않은 부실여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공교육이 부실하다고 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과외가 끊이지 않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각 종 공사들이 부실공사로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변의 환경은 제도나 도덕성이나 모든 면에서 부실한 흔적으로 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일본의 온천이 70%가 가짜다, 그리고 세균오염으로 7명이 죽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이렇게 부실한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집니다.

  기업도 우량기업이 있고 부실기업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위기적인 부실은 우리 인생의 부실입니다. 인격의 부실입니다. 사람이 믿을 수가 없다, 사람이 부실하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위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실인생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실인생이 되지 말라는 성경의 훈계는 매우 단호하고 우리에게 철저함을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아주 극한 책망까지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위로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아주 논쟁으로 했습니다. “우리가 전한 말씀 외에 천사가 전한 말이라도 그 말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가 너희를 타락하도록 하느냐? 왜 너희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 이렇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한 어조로 책망을 했습니다. 그렇게 부실화된 교회의 신앙을 향하여 갈라디아서는 6장에 와서 부실 인생이 되지 말 것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네 자신을 돌아 보라

  첫째로 “네 자신을 돌아 보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강조됩니다.

  첫 번째 뜻은 자신을 깨우는 것입니다. ‘잠자는 나를 깨워라’ ‘근신하라, 깨어라, 기도하라’ 이런 말씀이 전부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과 연관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잠자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깨워야 합니다. 근신해야 합니다.

  인터넷에 있는 변형시조를 읊어보면 “까마귀 검다하여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많은 사람들은 남의 속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겉 희고 속 검은 백로의 위선을 비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자신을 가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 뜻은 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강자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내 약점은 허물이 아닙니다. 내 약점은 보완해 가야 합니다. 약점은 약점으로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그 약점을 다스려야 하고, 관리하고, 우리 자신을 강자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네 자신을 돌아 보라는 것은 잠자는 자신을 깨우면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며, 강한 자신으로 만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왕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피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후림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시므이라는 악당이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때 군대장관 아비새가 칼을 빼들고서는 왕에게 아룁니다. “왕이여 허락하소서. 내가 저 놈의 목을 단칼에 베어 오겠습니다”고 간청할 때 다윗은 사무엘하 16장10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제 심장에 몽둥이질을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 고난의 순간에 자기를 저주하는 한 백성의 저주를 받으면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꾸짖고 계신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도망가는 그 불행은 다윗 자신이 원인제공자입니다. 그가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가 신하를 죽였습니다. 그의 무시무시한 범죄로 인하여 다윗 가문에 환란이 왔고, 하나님이 보응하시는 그 손길을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향한 비난과 내가 견디기 어려운 어떤 상황에 처하면 자기를 돌아보는 것보다는 남을 향하여 화살을 꽂습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일깨우지 않으면서 잠자는 자신을 팽개치고, 망가진 자신을 팽개치고 남을 향하여 행동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실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두 번째 권면은 4절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각각’이라는 말과 ‘자기의 일’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일이라는 여기에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사명’과 ‘책임’입니다. 자기 사명을 인식하라는 것이고 사명에 따는 책임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사명과 책임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남편의 책임, 아내의 책임, 이것은 남편의 사명과 아내의 사명에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자기의 일을 감당하는 인생으로서 성실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기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부실인생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가장 불행한 인생은 제3의 사람에게 자기의 인생을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3의 사람이 아니면 나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사명은 성스럽고 책임은 우리에게 보람을 줍니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사명은 책임이 따를 때 열매를 맺고 우리에게 유익과 보람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들이 가장 즐겨본 영화가 ‘하이눈’이라고 합니다. 케리 쿠퍼와 그레이스 켈리가 나오는 이 영화는 명화 중의 하나입니다. 역대 대통령이 이 영화를 많이 즐겨본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그 스토리가 아주 단순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고뇌의 결단과 내가 이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여행을 포기하고 자기의 목숨을 걸고 그 결전에 임하는 사명을 다하는 책임 있는 희생이 이 영화의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아마 대통령들이 이 대목을 그렇게 좋아한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고뇌에 찬 결단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최종결단을 해야 하는 사람이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안일과 개인의 기쁨을 버리고 마을로 돌아오는 보안관과 같은 사명감, 그리고 그 마을을 지켜내는 책임성이 대통령의 덕망이 아니냐는 메시지입니다.

  그는 결국 전투하여 이깁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악당들을 다 물리치고, 자기 가슴에 붙어있는 보안관 마크를 떼 내어 바닥에 던지고는 그 마을을 떠납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 모든 영광을 국민에게 돌리고 떠나가는 의연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담긴 지도자의 고뇌, 결단, 사명, 희생, 책임과 같은 메시지가 미국 대통령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평론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야 사람이지 사명을 저버리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 하나님의 자녀이지 자기의 십자가를 팽개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의로운 결심, 그것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할 줄 아는 사명과 책임의 사람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부실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세 번째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면 먼저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남에게 속기 전에 자신이 속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전에 자신이 마귀에게 먼저 팔린 것입니다. 사람이 남을 속이면 자신을 속이게 되고 하나님을 속이게 됩니다. 이것은 다 연관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대로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보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불의하면 불의한대로 주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진실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곳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는 주유소이고, 하나는 주차장입니다. 차 운전을 하지 않을 때는 주차장에 넣어야 되고 연료가 떨어지면 주유소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주유소라고 정의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하늘의 연료를 공급받는 날입니다. 이 날이 주일날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나라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연료를 공급받은 차는 출발을 해야 합니다. 주유소에 주차하기 위해 가는 차는 한대도 없습니다. 주유소에서 주차를 하면 그것은 큰 사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차장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머물러 있는 차가 한대도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 받고 은혜 받은 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은혜 받고 출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받고 우리는 출발을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주차해 있는 차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습니다.

  견인차 주차장에는 평균 20%의 차가 주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아예 찾아가지 않는 차가 7%라고 하는데 이것이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구색 상 가지고 있는 차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연료를 공급받고 열심히 일하는 차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법 주차한 차와 같은 그런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낙심하지 말라

  네 번째로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하다가 낙심합니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헛된 일을 하다가 절망을 합니다.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 하다가 낙심하는 것은 당연히 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자는 하나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인간이 낙심하는 형태를 보면 결과를 보고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고난 당하는 그 결과를 보고 낙심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의미를 욥이 가르쳐 줍니다.

  욥은 열 자녀를 잃었습니다.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저주를 하며 떠났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자리에서 욥은 이런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욥기 23장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기 세 가지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당하는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고난 때문에 낙심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그 과정 속에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아, 하나님의 의도가 있겠구나. 주님이 내게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이렇게 하시는가? 내 고난의 앞길을 하나님이 아신다.’ 그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단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를 더 좋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고난을 주시는구나’ 고난의 동기와 과정이 살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우리가 이기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결과만 보고 사람들은 다 넘어집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부실공사의 문제입니다. 땅 위에서나 땅 아래서 공중에서나 부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한국을 부실천국이라는 별칭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집 한 채 헐고, 기초공사 하고 콘크리트 치고 슬라브 치는데 70일 걸리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입니다. 왜 부실공사를 합니까? 그것은 부당이득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규를 다 지키면 이득이 없으니까 법규를 어기면서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실공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48m의 다리 난간이 내려 앉았습니다. 32명의 아까운 목숨이 한 순간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에 준공이 된 다리입니다. 불과 16년 전인데 준공된 이후에 그 다리는 점점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랐을 뿐입니다. 그 다리는 16년 동안 무너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인생도 진행형이지만 부실인생도 진행형입니다. 갑자기 부실하게 되지 않습니다. 언제가 갑자기 부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축복의 진행형으로 살자

  오늘 여러분의 삶은 축복의 진행형입니까? 아니면 부실의 진행형을 방관하고 있습니까? 어느 쪽으로 여러분 인생은 가고 있습니까? 내 속에 성실인생의 진행형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부실 크리스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실한 것은 양이 많을수록 문제입니다. 부실한 것은 숫자가 많을수록 문제입니다. 부실한 청지기는 숫자가 많을수록 그 교회는 위기를 당합니다. 확실한 청지기, 성실한 청지기, 충직한 청지기가 있는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요 능력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부실이 없어야 합니다. 거기서 교회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부실현상이 너무 많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부실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부실현상을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을 냉철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깨우십시오. 여러분이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부실이 많습니다. 자기의 일을 살피십시오. 사명감을 새롭게 새기십시오. 그리고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희생하십시오. 속이지 마십시오. 은혜를 안 받고 산지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은혜 받은 것처럼 속이지 마십시오. 기도를 안하고 있으면서도 기도를 하는 성도답게 말하고 표현하지 마세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못하면 겸손해야 합니다. 못하면서 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을 가식합니까? 우리 주변에 부실공사 한탕해 가지고 운 좋게 발각 안 되고 평생 호의호식하는 악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사람을 속이고 정부를 속여서 호의호식하며 살더라도 하나님은 언제가 그 부실인생을 심판하실 때를 예비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부실을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인생이 성실할 때, 내가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살 때 우리는 더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부실이 많은 속에 진품은 더 빛납니다. 어떤 분이 글을 썼는데 자기가 세계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한국 사람만큼 명품 좋아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명품은 이태리 가서 찾아볼 것이 아니라 서울의 유명 백화점 비밀 코너에 가면 세계가 놀라는 명품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 백화점만 해도 굉장한데 그곳에 비밀 코너가 있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명품 가졌다고 명품 인생이 될까요? 명품이라는 것은 영적인 개념으로 보면 잠시 후에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명품 가지고 인생의 보람을 얻는 인생은 잠시 후에 쓰레기 인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치를 부여할 그야말로 의미 있는 골동품이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의 의미를 증거해 줄 내 인생의 진정한 골동품이 있어야 하고 소중히 해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것을 가지고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부실성도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유감스럽게도 부실교회도 많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부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집을 새로 지었다고 우량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에 오고 가는 교인이 우량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실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성실한 교회로 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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