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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길, 자기 곳 (삼상 26:13-25, 고전 15:50-58, 눅 4: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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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는 “고문(拷問)”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옛 중앙정보부나 그 후신인 안기부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으로 불구가 되어버린 사람들, 심지어 죽어서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위 민주주의국가라고 하면서도 집권자들이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서 반대자들을 무지막지하게 고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고문은 원래 일제가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애국자들에게 사용하던 수법이요, 일제는 그것을 옛 제정(帝政) 러시아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 비인간적인 고문 수법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몽둥이로 마구 패는 것은 기본이고, 손가락 끝에 철봉을 끼워 손가락을 졸라 맨 후 천장에 매달고 채찍으로 때리기, 대나무 못을 손톱과 발톱 사이에 박고 튕기기, 못을 박은 널빤지에 맨 몸으로 눕히기, 온 몸에 기름을 바른 후 인두와 담뱃불로 지지기, 참대나무를 양쪽에서 잡고 위에서 아래로 몸통을 훑어 내리기, 추운 겨울 날 몸에 물을 끼얹고 그대로 얼려 얼음기둥 만들기, 입을 벌려 혀를 빼낸 후 담배 연기 불어넣기, 물젖은 종이를 얼굴 전체에 발라 질식시키기, 입에 재갈 물리고 머리털을 선반에 잡아 맨 후 앉을 수도 설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세워두기, 사흘간 굶긴 후 보는 앞에서 저희들끼리 만찬 벌이기 등등 기술이 수 십 가지도 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나 애국지사들은 이런 죽음보다 더 혹독한 고문에도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당시 이런 고문에서 살아남은 선우 훈이라는 분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는 고요한 마음으로 결박을 지고 형장 아래 꿇어앉았다. 스데반이 돌 탕에 맞아 죽을 때 바라보던 하늘의 열린 문을 바라보면서 ‘이 영혼을 받으소서’ 간절히 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예 개심(改心) 못하는 놈 때려죽이고 / 예예 개심하는 놈은 살려내어서 / 고관대작 부귀영화 누리게 한다. 예예개심 할 수 없는 이내 몸이니 / 형장 아래 결박지고 꿇어앉아서 / 쳐 죽이는 모둠 매를 기다립니다.  스데반이 바라보던 열린 저 하늘 / 내 주 예수 서신 것을 바라보면서 / 내 영혼을 받으소서 기도합니다.”

오늘 사무엘 서 본문에 “다윗은 자기 길을 갔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옛 신앙의 선배들, 그리고 우리 애국지사들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기 길을 갔습니다. 끝까지 애국의 길을 갔고,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갔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과 애국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자기 길을 간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까지 건재하고,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에 예레미야 선지자도 역시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선지자로서의 자기 길을 외롭게 걸어갔습니다(렘28:11). 그리고 눅4: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첫 번째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거기 모였던 유대인들이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끌고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가서 거기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를 지나서 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자기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열어놓으시고 보여주신 그 길, 우리 각 사람이 걸어가야 할 우리 나름대로의 “자기 길”을 걸어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이 길은 좁으나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험해서 많은 사람이 찾지 않지만 “내가 길이요”라고 하시면서 이 길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주님의 길만을 고집스럽게 따라갔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러나 영생으로, 천국으로 통하는 길은 오직 “내가 길이요”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 마지막 말씀은 참 의미 심장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표현입니다. 삼상26:25절 하 반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 가니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자기 길”이라고 할 때 “길”은 “way”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자기 곳”이라고 할 때 “곳”은 “home”을 썼습니다. 한 사람은 계속 길을 추구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그 앞에는 늘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옛날 미지의 세계를 찾던 사람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집으로 간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발전하지 못하고 전진하지 못하고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니 남들이 새 길을 찾아나가는데 자기 혼자 늘 집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는 그만큼 퇴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 앞서 가시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아서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며 달려가도 곤비치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길을 가면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만년에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쳤다”고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다윗은 어째서 그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어째서 다윗과의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겪고 나서도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집안에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6월 4일 성령강림주일부터 “목적이 이끄는 40일”이라는 대장정을 걸어왔습니다. 이 일은 미국의 한 젊은 목사 릭 워렌을 통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릭 워렌은 이것을 자기 마음속에서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행13:36 말씀을 통하여 영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Living Bible은 이 부분을 “다윗은 그 생애동안 하나님의 목적대로 섬겼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동인(動因)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릭 워렌은 우리 개인도, 교회도 오직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저술한 유명한 책 2권 중 한권이 「새들백 교회 이야기」인데 이 책의 원래 제목은 「목적이 이끄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좌충우돌 식으로 프로그램만 벌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권이 우리가 그동안 살펴 온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다윗이 자기 길을 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그 “자기 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분명했을 때 세상의 그 무엇도 그가 가는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님의 목적대로 따라가는 다윗을 아무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적이 이끄는 삶" 교재 가운데서 “삶의 원동력”이라는 제목으로 살핀 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을 주장하는 동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을 때 그는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골리앗과 대결해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주변의 끈질긴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물리칠 때 당하게 될 엄청난 위험을 예견하면서도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사람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 내렸습니다. 다윗이 걸어간 자기 길은 단순히 자기 이해관계에 따른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길,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다윗은 순종했고 승리했습니다.

3. 그러면 자기 집으로 되돌아간 사울의 삶을 주장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이미 살펴서 잘 알듯이 사울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습니다. 그리고 악령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일신의 안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니 하나님도 없고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다윗, 자기 사위일 뿐만 아니라 충성된 신하 다윗 한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온통 국력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도 망하고 가정도 망치고 나라마저 초토화시키고 말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난 것은 진정한 목적에서 이탈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설정한 목적은 엄청나게 잘못되었고, 그 잘못 설정된 목적을 따라 가다보니 그 마지막은 멸망이었습니다.

다윗이 오직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았듯이 이제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성전을 주시면서 행여 그릇된 건물 신드롬에 빠지는 것을 막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새 성전에 들어가면서 먼저 우리 신앙을 새롭게 하시려는 우리 주님의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에 의하여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번번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 보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사소한 일,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거기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만 헌신할 뿐입니다. 거기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시고 우선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믿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촛대를 옮길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들었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서 성장해 갈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또 기대합니다. 지난 40일을 겪게 된 여러분은 신앙체질이 그리스도 체질로 바꾸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분위기가 성령 충만의 분위기로 달라지게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우리 각 사람과 교회의 성장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은사도 주셨고 직분도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이것이 무슨 계급장입니까? 그래서 군림하고 주장하려고 하십니까? 주님은 “나는 섬기기 위해서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낫지 못하다”고 했는데 주님이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면 우리가 어찌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합니까? 더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더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5)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민족이 왜 실패했습니까? “나 뿐이라”고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쁜 것이 무엇이냐 “나 뿐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과 함께 내가 체험한 구원,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복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하시고 “너는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바른 목적을 지향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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