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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잊지 말아야할 주님의 은혜 (시 10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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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의 중요한 지혜입니다. 옛 친구의 이름, 그와 함께 공유한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않으면 삶이 훨씬 풍성해지고 인간관계도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그 점을 깊이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향해 말을 건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우리는 이렇게 종종 자신에게 당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물론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지력을 발동하고 사고의 세계를 스스로 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을 무시하면 은혜를 받는 삶을 산다고 해도 신앙생활은 훨씬 가난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주님의 은혜엔 어떤 것이 있습니까?

1.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3a, 8-10)

'주님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6)'. 제일 먼저 기억해야할 은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현대인들에게 별로 감동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적대감조차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예컨대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은 죄의식이란 병리적 신경증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죄란 인간이 사회화되어가는 과정에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가정의 부모님, 학교의 교사, 교회의 목사와 교사 그리고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에 접하면서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의 실체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마치 구구단의 진리성과 유사합니다. 어린이는 구구단을 부모님과 교사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6×6=36이라는 수학적 진리의 실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실체를 부모와 교사를 통해서 배운 것뿐입니다. 이런 설명은 도덕법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최근 한 연쇄살인범이 잡혀 첫 공판이 열렸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것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고 범행동기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인 충동을 느낀다. 독방에 갇혀 있어 살인을 못해 우울하고 조바심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살해한 뒤 죽은 사람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피해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 적은 전혀 없다'고 심정을 밝혔습니다. 그는 사회로부터 배운 죄에 대한 개념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죽는 게 두렵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을 죽였으니까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토로했습니다. 마음 깊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양심과 도덕법은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죄를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서 규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특별히 해친 적 없이 성실하고 자신에게 정직한 삶을 살아간다면 죄인이란 말을 들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를 살펴보면 죄란 그 보다 더 깊은 차원의 상태를 말하는 것임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유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가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삶을 망친 아들은 누가 봐도 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집에 머물러 있던 형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아버지와 함께 가업을 잘 돌보며 성실하게 삶을 살았습니다. 그를 죄인의 범주에 넣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집에서 풍악소리가 들려 오는 것입니다. 사연인즉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 왔다고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을 달래러 나온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친구와 함께 파티를 열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었는데 몸파는 여인과 함께 놀며 가산을 탕진한 자에겐 살진 송아지 파티를 열어 주시는 것입니까?' 그는 비록 외형적인 삶에 있어서는 동생과 달랐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형 역시 아버지의 마음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빗나가 자기 중심적 사고와 삶에 빠진 것을 죄라고 합니다. 모든 비도덕적 행동들은 바로 그런 죄의 구체적 표출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죄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해결의 길을 찾는 사람과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도피하는 삶을 사는 두 종류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후자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연쇄살인범의 경우처럼 모순된 삶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전자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 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8-13절에서 시인은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주님을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이는 시인의 개인적 경험에서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바입니다. 특히 8절 말씀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축제를 여는 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출 34:6).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셨습니다.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모릅니다. 또한 죄대로 다 갚지 않으셨습니다. 분노를 금방 푸십니다. 하여 자신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십니다.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치워버리십니다.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부모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세상과 우주가 이렇게 존재하며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주님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세상에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까?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범죄, 가족간의 범죄, 사회 구성원간의 범죄, 계층간의 범죄, 나라 사이의 끔직한 범죄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이 당장에 멸망하지 않고 이렇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무력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무력함에서 우리는 우리를 참고 인내하시는 깊은 사랑을 발견합니다(벧후 3:9)'.

그 사랑의 절정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외아들 예수님에게 사람의 모든 죄를 덮어씌우시고 의로운 심판을 하셨습니다. 대신 죄인은 예수님의 보혈을 보시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은 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실패를 경험하고 죄를 짓고 넘어집니다. 그래도 정죄나 송사는 결코 없습니다(롬 8:1, 33-34). 우리는 '이 죄만큼은 주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을 꺼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오늘 시인은 분명히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딱 한가지의 예외가 나옵니다. 성령의 역사를 노골적으로 마귀의 역사라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외하면 어떤 죄를 범해도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의 신분을 결코 잃지 않습니다. 다만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달라붙어서 이 사랑을 의심케 만듭니다.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함으로 죄의식에 빠뜨려 무너지게 만들려고 합니다(계 12:10). 이에 절대로 넘어가지 말고 과감히 사단의 공격에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리 강한 사단의 세력이라도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언제나 용서받은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2.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십니다(3b)

이 대목에 다다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으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모든 병을 고쳐주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설마 본시편의 저자로 추정되는 다윗 자신이 밧세바를 통해 얻은 아들이 병들자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했는데도 죽은 것을 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삼하 12:13-23). 다만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근본적으로 모든 병을 고쳐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조를 위한 일종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왜 모든 죄는 말씀하신 대로 다 용서해주시는데, 모든 병은 다 고쳐주지 않으실까요? 죄와 병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죄인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병의 경우는 항상 그렇지 않지요. 병이 낫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신앙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다윗의 경우 아들의 병을 낮지 않게 하심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처절하게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경우 몸의 가시 즉 사단의 하수인을 자기 몸에서 제거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주님은 응답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거기엔 특별한 뜻이 있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받은 바 많은 은사들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약한 가운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 진정으로 강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2:1-10).

이렇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실 수 있고 또 원하십니다. 우리는 병이 걸리면 일단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낫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 전 길을 걷다 번개처럼 그런 생각이 제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 지금 세상을 떠나는 것도 좋은 일이겠구나! 주님의 얼굴, 심장 손을 희미하게만 느껴도 이렇게 좋은 데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바라기는 이런 생각이 언제나 제 가슴 깊이 살아있으면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쉽게 포기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병이 그 소명을 완수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 까진 병을 낫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를 주님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3년 동안 병고침의 사역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요즘은 의학이 많이 발전해서 이런 은혜를 사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라도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육신적인 병만 낫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주님과 더 친밀해지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치기 어려운 병을 만났을 땐 본인 뿐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약 5:14-16). 주님께서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질병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병고침의 은혜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3. 생명을 풍성하고 힘있게 해주십니다(4-5)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해주신다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4).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셔서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 믿음과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의심의 여지없이 성취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감사한 일입니까? 죽음처럼 인간을 슬프게 하고 허무하게 하며 두렵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음은 인간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죽음을 미화하려는 이들이 종종 있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막상 죽음 앞에 서면 죽음은 어쩔 수 없이 슬픈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죽으면 잠시 주님과 함께 낙원에서 쉬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낙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얼굴을 어렴풋이 보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분을 더 확실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좋지 않습니까? 물론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붙들 때 우리는 죽음의 슬픔과 두려움을 이기고 영원한 삶에 대한 놀라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어찌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백성은 죽은 다음에만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도 풍성하고 힘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평생에 좋은 것으로 흡족히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5a). 좋은 것을 기복신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구약에선 물질적 축복을 많이 강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주님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두시고 축복하십니다. 구약의 축복에 대한 말씀을 근거로 해서 개인주의적 기복신앙을 구축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약에 들어오면 물질적 축복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물질과 영혼을 아우르는 통전적인 축복으로 발전됩니다. 우선 하나님나라의 의를 구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단순한 삶, 자족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합니다. 개인주의적 풍요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마 7:11; 눅 19:13). 사도행전에 잘 그려져 있는 것처럼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는 물질적 풍요 자체를 거부하는 삶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물질을 함께 나눔으로 고루고루 잘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오늘 시편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제자들의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주십니다(5b). 적대적 환경에 눌려 있다가도 다시 힘차게 일어나 담대하게 주님의 부활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비록 나이가 들어 육신은 연약해져도 그 모습이 패기가 있고 젊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억압받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를 베푸십니다(6-7)

7절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주님의 정의로운 길을 모세에게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왕 바로 치하에서 노예로 살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당하시는 것을 보고 모세를 해방자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전폭적 지지와 후원을 받는 모세의 강력한 리더십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자유민으로 해방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확실하게 보호하는 하나님의 정의가 담긴 율법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고 당시 대표적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 외국인 노동자들을 억압하면 선지자들을 보내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그래도 안 듣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십니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님을 통해서도 이어져 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명을 주십니다(마 6:33). 지금 우리 시대에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정의를 베푼 사람들에겐 영생을 정의를 저버린 사람들에겐 영벌을 주실 것입니다(마 25:31-46).

주님의 은혜는 이렇게 다양하고 포괄적입니다. 어느 한 은혜에만 편중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모두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오늘 시인처럼 우리 영혼에게 다짐합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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