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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자의 날 (눅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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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나라의 이해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들이 들어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이 질문은 단순히 때에 관한 질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를 알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물음도 포함된 질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 때가 되었음을 확실히 가리키는 표적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를 들어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 이스라엘의 적들의 멸망이라든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출현이라든가 하는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현상이나 사건 같은 것을 생각하며 어떤 표적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간결한 세 문장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대답 중 첫 번째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육안이나, 의학적 진단이나 물리학적 관찰이나 천문학적 관찰 같은 방법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임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첫 번째 말씀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니까 여기 있는지 저기 있는지 보려고 찾아다니는 헛수고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특정한 공간에 위치하는 성격의 나라가 아님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가장 중요한 말씀이며 앞선 두 말씀의 참 의미를 드러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너희"라고 하신 것은 좁게는 바리새인들을, 넓게는 모든 군중들을 가리키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나라에 직결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너희 앞에 서있는 나와 함께 이미 와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신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봐야 할 것에서 보지 않고 자꾸 다른 것에서 보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한 질문은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가 되었음을 확실히 가리키는 표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그 유일한 표적은 지금 너희 가운데 있고 너희 앞에 이렇게 서있는 나 자신이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당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보고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라"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보는 사람은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보겠지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찬송가 495장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열쇠이고 주인이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가장 확실한 표적을 보고도 계속해서 무슨 표적을 구하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면서 예를 들어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 이스라엘의 적들의 멸망이라든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출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나님나라의 대적 원수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며 승리를 거두셨고,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야요 참되고 영원하신 왕으로 자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가장 크고 참된 표적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20-21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22절 이하에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자의 날)로 바뀝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문제와 인자의 날이 언제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크게 보면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2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와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고, 22절 이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신 것이 그 차이입니다.

  (인자의 날)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그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날은 또한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믿는 이들에게는 복된 날이 될 것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재앙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은 결정적인 분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눅12:51-53)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영원히 복 받을 이들과 영원한 형벌에 처할 자들 사이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분리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본문 34-35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22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하나님나라에 관한 가르침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인자의 날은 누구나 어디서나 알아볼 수 있도록 확실하게 올 것이고, 그 전에 그 날을 예견하게 해줄 징조는 없을 것이므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말들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23-24절을 봅니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하신 말씀의 뜻은 인자의 날에 그의 영광이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온 누리에 빛날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자의 날이 아무도 예기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갑작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올 것이며, 그 날이 닥칠 때에는 이미 대비할 여유도 돌이킬 가능성도 없는 너무 늦은 날이 될 것이므로, 언제 그 날이 오더라도 반겨 맞을 수 있는 믿음의 준비를 지금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26-31절 말씀이 그 날의 상황이 어떠할지를 생생하게 미리 보여줍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인자의 날에 지붕 위에 있던 사람은 세간을 가지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 것이고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라 하신 것은 준비 없이 있다가도 재앙을 피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자의 날과 그 날의 심판과 재앙은 순식간에 임하리라는 것을 강조하며 그 날이 닥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끊임없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데에는 아마도 숨은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숨은 동기란 최후의 심판날을 짐작할 수 있는 표적을 알기만 한다면 그 확실한 날이 되기 전까지는 최대한으로 마음 놓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다가 그 날이 오기 직전에 회개하여 심판과 재앙을 면해보고자 하는 간교함일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날이 어느 날일지 알려진다면 미리 미리 평소에 주님 맞을 믿음의 준비를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준비는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고 신나게 멋대로 놀며 살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시거나 그대로 내버려 두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적 삶으로부터 도망치듯 즉시 빨리 돌아서는 것입니다.  망설이거나 최대한 미루며 지낼 일이 아닙니다.  옛 삶과 세상의 것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뒤돌아보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잃어버리고 멸망하는 길입니다.  32절에서 예수님께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 하신 것은 그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날은 예견할 수 없는 때에 불시에 임할 것이며, 따라서 그 때를 미리 알게 해줄 표적을 찾아 여기인가 저기인가 따라다니지 말라고 그토록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그 불순한 관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또 물었습니다.  본문 37절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독수리들은 시체가 있는 곳을 어김없이 알고 모여들듯이 인자가 다시 오실 때는 온 세상이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올 것이며, 그 날에는 어김없이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고, 그들의 먹이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채 인자의 날을 맞은 자들의 주검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제)에 관한 약간의 귀띔은 해주셨습니다.  첫째는, 적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5절을 봅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둘째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2절을 다시 봅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 이제는 언제라도 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 사이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서 가능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사역 안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여건이 악화되고 불안정하고 불안하다 할지라도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와 주어질 영광 안에서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며 끝까지 인내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어려움 때문에 악한 현실과 타협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아무리 지금 이 세상의 것들이 좋아보여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야 할 우리의 눈길과 발걸음을 뒤돌려 이 세상으로 향함으로써 유황불 가운데서 멸망하는 소돔을 빠져나오다가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고만 롯의 처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하고만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신 길로만 가야합니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 인자의 날이 우리 모두에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 날이 우리에게 심판과 재앙의 날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 하신 후 이어서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목숨을 보전하고자 한다는 것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서의 부와 즐거움을 너무 사랑하며 그 애착을 끊지 못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이기적인 삶을 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그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잃을 것이고, 주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으며 이웃을 위해서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경외와 신뢰와 순종을 드리는 것이 올바른 관계입니다.  사람들과는 서로 사랑으로 나누며 섬기는 것이 올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서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인자의 날은 그 나라를 완성하시는 주님의 날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언제나 준비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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