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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 중에 거하면 (출 3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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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은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여행 오는 손님들을 어디 좋은 곳으로 여행을 시켜드려야 할 때가 자주 있는데, 그럴 때 빼놓을 수 없는 준비가 바로 자기 자신이 미리 직장 휴가를 낸다든지 해서 그분들을 안내해 드릴 시간을 마련해 두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제가 가게 되면 미국 구경 좀 시켜주세요.”라고 말할 때에는, 그 ‘미국 구경’과 함께 ‘미국 구경시켜 줄 당신’도 포함해서 요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손님들이 정작 미국에 왔을 때, “당신이 미국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여기저기 좋은 구경거리 있는 곳에 다 일정을 짜고 예약을 해 두었으니 당신 혼자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에게는 크게 실망스럽고 맥 빠진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 구경이 좋다지만 그것을 안내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내 자식이나 친구가 동행해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선 그 낯선 나라에서의 여행 자체도 어려울 뿐 아니라 여행의 즐거움부터가 반감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런 처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1절로 6절의 말씀에 그 상황을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바로 금송아지 우상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습니다.
  크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셨던 가나안 땅의 약속을 재확인해주시기는 하면서도 한 가지 변경사항을 추가하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든지, 또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먼저 보내어 길을 예비하게 하시겠다는 등의 약속은 변함이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가나안 땅에 대한 모든 희망과 기쁨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 기록된 “황송한 말씀”이란 ‘불행한 소식’(evil news)이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지 않으시는 가나안 땅은 더 이상 소망의 약속이 아니라 오로지 ‘참담한 소식’일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곧 “단장품을 제하고” 회개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과 동행해주실 것을 간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도대체 어떤 방법을 통하여 매일 같이 걸으며 그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첫걸음입니다.

  7절로 11절의 말씀에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중단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가 제일 먼저 시작했던 것이 바로 ‘회막운동’이었습니다.
  회막은 성막을 만들기 이전에 임시 성막과 같은 것이었는데, 모세는 이 회막을 진 밖에 두어 구별된 거룩한 처소로 삼았습니다.
  모세가 바로 이 시점에 그 회막을 만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교통하며 사는 자세를 새로이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회막’(tent of meeting)이란 이름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게 되는 장소’라는 의미인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7절에 보면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다 그 회막으로 “나아갔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자 할 때면 스스로 자기 처소를 떠나 하나님의 정하신 예배장소로 나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8절에 보면 특히 모세가 그 회막으로 나아갈 때면 모든 백성이 다 “자기 장막 문” 즉 자기 집 문 앞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았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대할 때 항상 경건한 예의를 갖추고 주의를 집중하는 자세를 지켜야 할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0절에 보면 그 회막에 구름기둥이 설 때, 즉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심이 나타날 때 모든 백성들은 자기 처소에서 “다 일어나 서서 경배하였다”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게 될 때 성도는 당연히 그 앞에 머리 숙여 최고의 경외를 올릴 수밖에 없음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회막으로 나아가며 회막을 바라보며 회막을 향하여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바로 모든 생활을 오로지 교회중심으로 살아야 할 성도의 자세를 단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 중심이 된 회막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대면”이란 말은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맞대고 이야기했다는 뜻은 아니라 그만큼 가까운 관계에서 긴한 말씀을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만나면 얼마나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까?
  또 사람이 자기 친구를 만나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회막을 통하여 모세와 그처럼 깊은 말씀의 교제를 나누시고 백성들은 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의 교통 - 바로 이것이 회막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계속 누리기 위해 가장 기초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의 생활 강령을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궁극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중심의 삶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발이 걸어올 수 있는 교회에 나아오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를 바라보며 성도가 그 마음과 뜻과 힘을 함께 모을 수 있는 교회에 모여서 경배하는 그 생활이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향한 첫걸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중심’으로 살아야 곧 ‘말씀중심’이 되고, 그렇게 ‘말씀중심’으로 살아야 진짜 ‘하나님중심’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떻게 신자의 입에서 교회중심으로 살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말이 나올 수 있으며,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라’는 명령이 어떻게 부담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진짜 문제는 만약 행선지가 틀린 배에 오르게 되면 아무리 그 안에 타고 있어도 엉뚱한 데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상교회들 중에는 ‘예수 십자가를 믿어야 산다’고 선포해주지 아니하고 그저 현대인들의 ‘가려워하는 귀만 살짝 시원하게 긁어주는 카운슬링의 설교’만 있는 교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생명의 복음은 전해주지 아니하고 그저 ‘세상구경’만 시켜주는 그런 유람선과 같은 교회에 타고 있다가는 주님과 동행하기는커녕 그대로 지옥직행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가 여러분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동네에, 여러분이 차나 전철만 타면 간단히 올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 편에서 여러분 곁으로 아주 가까이 다가와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천당으로 인도하는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만이 이 시대의 ‘구원의 방주’이며, 신자가 그런 참된 교회를 출입하며 사랑하며 섬기면서 자기 영혼을 위한 풍성한 양식을 받아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축복의 시작인 것을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판단을 내리는 것이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12절로 16절의 말씀에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1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 혼자서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행할 일을, 내일 갈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지 않는 가운데서는 아무리 광야여행에 별 차질이 없고 저 풍요로운 가나안 땅에 정말 정착하여 살게 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총 입은” 미래가 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길을 보여 주시지 않으시면, 모세는 당장 “나와 함께 보낼 자”가 누구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즉 먼 장래 가나안 땅 정복은 고사하고 지금 당장 당면한 문제조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실로 간절히 기도드리기를 “하나님, 제가 정말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자라면 제발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지 않으실 길이라면 아예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즉 아예 출발할 가치조차 없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야말로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천하만민 중에서 구별”됨을 얻은 표식이며 은총 받은 백성 됨의 증거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런 모세와는 달리 많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함 없이도 자기의 앞날을 자기가 알아서 찾아나갈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여 주시지 않아도 그저 가나안 땅만 보이면 무조건 그곳만 바라보며 돌진하려 하는 것입니다.
  저 앞에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보이기만 하면, 내 인생에 이루고 싶은 어떤 욕심이 마음속에서 멀리 떠오르기만 하면, 어찌하든지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한시바삐 달려가서 내 한 몸부터 억지로 비집어서라도 일단 끼워 넣고 보자는 마음에 앞뒤를 가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지 않는 목표라는 것은 아예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인도함을 받지 않고 자기 혼자의 욕망만을 가지고 대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은 이미 자기 인생 방향이 청소년 때부터 완전히 어긋나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여호와이레를 소망하지 아니하고 그저 몇 억 하고 액수만을 정해놓고 돈벌기에 혈안이 되어 사는 사람은 결코 ‘만민 중에서 구별된 은총 받은 백성’의 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지 않는 앞날이란 아무리 ‘가나안’이고 무엇이고 해도 아예 떠날 시도조차 필요 없는, 노력할 가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것인 줄로 알고, 자신에 세운 목표를 위하여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항상 직접 차를 몰고 출입해야 하는 미국생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경우가 자주 생기는데, 그런 경우에 남녀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들에게 길을 가르쳐줄 때에는 약도를 그려주는 것을 선호하지만, 여자들의 경우에는 그림보다는 ‘몇 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어디서 우회전을 하고 어떻게 생긴 건물이 보이면 거기서 좌회전을 해서’ 하는 식으로 말로 설명해주는 것을 더 잘 이해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녀 누구에게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약도를 그려주고 거기에다 설명도 덧붙이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도는 그 지도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성경은 모든 신자들에게 일반적,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신앙생활의 원칙을 선포해주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그 처한 형편과 처지를 따라서 개인적으로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성경을 읽고서 기도를 드리면, 성령께서는 그 기도하는 성도가 그 말씀을 가지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일대일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을 배운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아니하면, 손에 약도는 들고 있어도 읽을 줄 모르는 눈뜬장님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 인생이지만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그 응답을 받음으로써 매사를 바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 하나님의 자상하신 동행을 날마다 누리면서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각자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몸소 체험하며 사는 것이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17절로 23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참으로 당돌한 요구를 했습니다.
  이미 회막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등 실로 긴밀한 하나님의 동행을 체험하고 있는 그가 한술 더 떠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청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사람 생각에는 하나님의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동행해주심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같은 요청을 듣고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모름지기 죄인된 사람이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을 직접 대한다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은 마치 땅 속에서만 살던 벌레가 햇빛에 노출되면 곧 죽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이 지나가기까지 모세를 당신의 손으로 덮어두심으로써 그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 대신 그 “등”만 보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아마도 뒤에 남겨진 영광의 잔상과도 같은 것이라 짐작됩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하는 것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앞에 지나가게 하시는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과 또 그와 함께 반포되는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즉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일어나는 어떤 선한 역사를 체험하고 그 선한 일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이름이 반포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인 줄로 깨닫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몸소 뵈옵는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한 형상”이란 어떤 모양이 아니라 윤리적인 속성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볼 수 없는 대신에 영적으로 그의 사랑, 자비, 선하심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잠시 하나님의 “등”의 영광을 목격하는 것보다, 그의 전 인생을 통하여 순간순간마다 선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써 훨씬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해 주시는 명백한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와 꼭 같은 맥락으로 시편 34편 8절에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얼마나 확실하고 똑똑하게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사람보다도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맛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각자가 일상생활을 통하여 매사에 주님의 선하신 섭리를 체험하고 그때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떠올리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순간들입니다.
  그전이라면 우연이라고 여겼을 일, 그전이라면 그저 재수 좋은 일이라고만 판단했을 일들을 볼 때마다 이제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으로 볼 줄 알게 될 때, 그것이야말로 실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곁에 모시며 동행하는 삶을 즐기는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큰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에는 물길이나 암초의 위치 등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장조차 배를 몰기가 위험합니다.
  그럴 때에는 입항하기 전에 도선사(導船士)가 탑승하여서 선장 대신에 키를 직접 조정하면서 그 선박을 안전한 수로로 인도합니다.
  선장이 그저 해도만을 보면서, 혹은 무선으로 안내만 받으면서 배를 모는 것보다는 아예 도선사가 몸소 동승해서 직접 인도해주는 것이 백번 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동행을 그렇게 체험해야 합니다.
  그저 설교 듣는 것만으로 끝나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도만 보고 끝나는 것과 매일반입니다.
  또 말씀을 받고 기도생활까지 한다고 해도 만약 거기서만 끝나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자세한 개인적인 안내까지 받고도 정작 배를 항구에 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는 그처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받은 그 귀한 은혜의 기회를 스스로의 삶을 통하여 ‘맛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 지난 주일에 받은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구나.’라고, ‘아, 지금 벌어진 이 일이 바로 내가 드렸던 기도의 구체적인 응답이구나.’라고, 말씀과 기도에 대하여 ‘체험적인 재미’를 반드시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 그저 지도만 그려주거나 전화로만 설명해주는 것으로 끝내는 분이 아니라, 아예 우리 곁에 동승하셔서 그 방향타를 친히 붙잡아주고 계시는, 실로 든든하기 짝이 없는 ‘안내인’(pilot)이신 것을 날마다 실제로 느끼고 맛보면서, 그래서 더 감사하고 의지하면서 끝까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가나안 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축복의 대명사였으며 온 인생의 최고 최종 유일의 목표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은 결코 더 이상 축복의 땅이 아니라 오직 저주의 땅이며 그 광야행군은 아무 기쁨도 소망도 없는 피곤과 고생만 가득 찬 길이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모시지 않고 자기 혼자 마음대로 걸어가려 하는 오늘의 인생길이나 내일의 목적지야말로 제 발로 걸어가는 멸망의 지름길인 것을 우린 한 순간이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 좋은 곳에 놀러갈 때에도, 사실은 그 ‘좋은 곳’보다는 그 곳으로 지금 함께 가고 있는 ‘좋은 동행자’ 때문에 그 여행이 진정 즐거운 것입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가면서도 자기 믿음직한 애인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할 때부터 이미 그 마음은 콩닥콩닥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몸은 피곤할지라도 자기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졸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내는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하나님의 동행이 없는 인생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교회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것 다 충분한 것 같아도 사실상 자기 ‘집’도 마련하지 못한 가난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세하게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응답이 없는 사람은 평생토록 자기 혼자서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살 수밖에 없는 외롭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온기, ‘여호와이레’의 체험이 없는 삶은 설사 평생을 오락과 휴가만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고 사는, 정말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이 재미 모르고는 진짜 신앙생활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날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 오늘 하루와 내 앞날의 갈 길에 대하여 인도하심을 받고,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삶 - 참으로 육안으로 친히 뵙는 것 이상으로 더 가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복된 삶을 날마다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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