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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리아 산에서 (창 2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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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점점 날씨가 여름의 절정으로 다가갑니다. 물론 아직 장마 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곧 무더위가 옵니다. 한국의 여름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더위입니다. 그래서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별일이 아닌 것에도 언성이 커지는 시기입니다. 이런 때에는 휴식과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무더위가 본격화되면 어김없이 휴가를 떠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면 가는 곳이 산과 바다입니다. 우리 국토의 70%가 산이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나라의 경우 어떻게 보면 휴가를 즐기기에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이렇게 집을 벗어나 산과 바다를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서 산과 바다, 자연은 예사롭지가 않은 곳입니다. 그곳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보여주는 산과 바다의 현장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산이 있고, 바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사건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여름동안 성경의 산과 바다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 이 시대에 산과 바다로 떠나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본문에 소개된 ‘모리아산’입니다.

  모리아산은 성경에서 에덴동산이후,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산입니다. 이곳은 본문에 소개된 아브라함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지만, 후대에 다윗이 즐겨 찾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곳이고, 무엇보다도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여기에 성전을 짓고 당대와 후대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은 어떤 곳보다 의미가 있는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 산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으며 이 시대를 살아야 할까요? 모리아 산하면 무엇이 생각날까요?

  우선, 순종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건이고, 여러 차례 언급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으로나, 이스라엘 공동체로나, 창세기의 말씀으로 보나 이 사건만큼 중요하고 큰 사건이 없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앞에 아브라함이 순종하는가, 아니면 불순종하는가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돋보이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 이삭의 순종이 빛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리아 산하면 가장 먼저 순종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원하시는 의도와 뜻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종의 원리가 잔잔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한마디로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등장은 순종과 불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고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이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순종하지 않은 죄였습니다.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시작된 인간의 역사에서 성경은 마지막까지 순종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여기 아브라함의 사건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축복과 은혜 앞에 순종하는 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사는 길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순종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자요, 주님을 따르는 자요, 주님을 닮아 가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많은 행동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순종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쩌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시는 순간부터 주님은 순종을 깊이 염두에 두신 것을 봅니다. 순종을 빼놓고 예수님을 말할 수 없습니다. 순종을 말하지 않고 주님의 모습을 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 시킨 것이고, 한 사람 주님의 순종으로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아담을 통해서는 불순종의 무서움을, 주님을 통해서는 순종의 축복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불순종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하나님은 순종을 그 어떤 것보다 좋아하십니다. 제사와 예배를 정성으로 드리는 것보다, 수양의 기름이나,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아니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특히 불순종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만큼 불순종은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늘 순종을 요구하심을 배웁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순종을 내 신앙과 삶에 그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다른 것이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순종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기에, 내가 처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순종을 마음에 담고 여름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둘째, 인정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은 12절입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특히 여기 이 말씀에서 ‘이제야’라는 말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비로소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아브라함의 생애에는 많은 우여와 곡절이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여정에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왔습니다. 쉽지 않은 인생 길,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뛰어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았고, 그의 인생에 놀라운 은혜가 이어집니다. 당대와 후대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니까 모든 과거의 아픔과 실패가 치유되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고, 이제 삶에 막힘이 없이 모든 것이 술술 풀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을 받는다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악하고, 약하고, 늘 실망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보면서 만족하십니까? 거울을 보면서 괜찮은 외모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화들짝 놀랍니까? 이만한 인품, 이만한 믿음, 이만한 사람이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나를 보아도 실망스러운 것이 참 많은 것입니다. 내가 나를 잘 알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나에 대하여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한없이 작아지고, 움추리는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이렇게 실망스러운데, 남이 나를 본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면 남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더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우리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지금 가장 크게 실망을 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면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면 자신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삽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인정받으면 다 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모든 인물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먼저 인정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인정하고, 오늘 우리가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도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패배자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정받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먼저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아 당당하고, 힘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본문은 순종, 인정과 함께 아브라함의 믿음이 또한 돋보이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성경은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이 절정에 달하고 있는 것을 알려줍니다. 처음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출발했지만 그리 큰 믿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했는데도 머뭇거리며 두려워했고, 가나안에 남아 있으라고 했는데도 애굽으로 이사하여 내려갔고, 아들을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초조한 마음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모두가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은 순간부터 달라집니다. 그의 믿음은 상승곡선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여기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을 드리는 일은 인간의 의지로서는 행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자연적인 관점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미쳤다’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 없이는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 없이는 해석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아들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믿음이 돋보이는 사건이요, 현장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여기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에 오직 믿음으로만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이삭 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만 대안이 없으니까 이삭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믿음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혹 자기가 실수를 해서 아들을 죽인다고 해도 대안이 없으니까 하나님은 죽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순간부터 이삭을 마음에서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이겨냅니다. 결국 믿음이 삶에서 놀랍게 약동하여 싹을 내어 열매와 결실을 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점점 믿음이 적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8장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참된 믿음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이 가까이 올 때에는 더욱 힘들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에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신자는 적습니다. 신자가 또한 이렇게 많은데 참 믿음을 가진 자가 적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향한 믿음이 커가야 하는데, 오히려 믿음이 얕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더욱 믿음이 요구되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능력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결국 우리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나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이나 경험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낙심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이미 믿음은 우리 안에 작은 씨앗으로 심겨진 것입니다. 이제 믿음이 약동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루이자 스태디’라는 여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믿음이 돈독한 사람으로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어린 딸을 데리고 롱아일랜드 바닷가로 해수욕을 갔습니다. 거기에서 남편은 어느 소년을 구하려다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왜’ 라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비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무릎을 꿇고 부족한 믿음과 슬픈 마음을 주께 아뢰었을 때 그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찬송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가가 340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입니다. 그녀는 의지할 곳 없는 과부 신세가 되었으나 믿음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약동하여 그녀의 삶에 역사한 것입니다. 이 일 후에 그녀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그녀가 지은 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복음과 믿음을 생각하고, 그녀를 추억하고, 추모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에 관심을 가지며 여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온전한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을 주소서, 얕은 믿음에서 깊은 믿음을 주소서, 미온적 믿음에서 뜨거운 믿음을 주소서, 죽은 믿음에서 산 믿음을 주소서, 약한 믿음에서 강한 믿음을 주소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변화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모리아 산에서 주신 교훈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순종, 인정, 그리고 믿음입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늘 우리에게 축복의 길로 제시하는 이 길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힘차게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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