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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인생의 출발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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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삶이라고 하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우리의 날들을 보냅니다. 아침에는 붉은 해가 솟기도 하며 저녁에는 붉은 노을이 지기도 합니다. 같은 붉음을 보지만 하루가 시작되는 신호일 수도 있고 하루가 마감되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건너편 유리창에 비친 하늘과 구름을 보기도 합니다. 부지런히 달려가는 자동차의 분주함과 정물상태의 각종 사물들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움직이는 것과 고정이라는 대비가 조직되어져 엮어져가는 한 마당입니다. 때로는 달려가고 때로는 쉬어가는 삶의 모습들, 그 가운데 우리는 기쁨이라고 생각하면 웃고 슬픔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고는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한 순간 기쁘다 또는 한 순간 슬프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평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탈색되면 기쁘다고 생각되는 것이 슬픔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슬프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쁨의 근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영원히 색깔이 바라지 않고 영혼의 힘과 육신의 힘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역사일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오신 여러분들은 삶의 여울에서 잠시 목을 축이는 물을 깃기 위하여 물을 한 두레박 푸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추구되어지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생명의 생수를 얻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이 자리에 초청되어 오신 분들은 아마 이러저러한 사정을 겪어서 이 자리에 오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옆에 계신 분의 초청을 받아서 오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초청하셨기에 그분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의 부름을 받아 그들의 삶에 새로운 출발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며 우리도 주님 앞에 부름 받은 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이루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에 사역 중에 마지막 준비인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시몬 즉 베드로, 안드레, 요한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제자들을 부르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문득 다가가셔서 초청하셨고 그들은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오는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이들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주님의 초청에 응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삶의 새로운 여정이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은 오늘의 본문 내용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라는 것은 어느 날 문득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삶으로 구성되어져 간다라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내게 이것이 최고의 가치였었는데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 가치 기준과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이것이 내가 사는 삶의 의미이고 최고의 가치야’라고 생각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건에 따라 불변되는 것도 있으나 때로는 여건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 체계가 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인생의 대전환, 역전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시몬, 안드레, 요한, 야고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들의 삶의 모든 구조를 다시 편성한 사람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들의 삶에 추구하는 가치를 새롭게 바꾼 사람들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오늘 18절의 말씀대로 바다의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21절의 말씀대로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깁고 고기를 잡아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그들의 삶을 유쾌하게 해야 할 무엇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주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밤새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몰아 부칠 수 없습니다. 고기를 잡는 것은 그들의 삶에 환희이고 인생의 기쁨이고 풋풋한 삶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삶의 활력소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떠나게 됩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아무런 보장 받을 것이 없는 삶의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며 절제할 수 없는 강한 소망의 끌림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삶을 구획 짓고 새로운 삶의 장면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제까지 애써 이루고자 한 일상을 마감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새로운 일, 새로운 세계, 새로운 꿈과 가치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상사에게도 인정을 받았고 그는 업적도 좋았고 인간관계도 좋았습니다.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사유가 없는데 직장에 사표를 냈다고 합시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대우에 불만이 있나봐. 직장에 회의가 있나보지? 자기 사업을 새로 시작하나봐. 더 좋은 직장으로 가겠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면 그는 그가 잘하고 있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시몬,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그가 하고 있는 물고기 잡는 일 과 준비하는 일에서 갑자기 그 모든 것을 놔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았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좇음으로 확고하게 얻을 수 있는 기쁨과 무엇인가 은혜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확신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도 분명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남의 밭을 소작합니다. 남의 밭을 소작하고 있는데 그 밭을 갈다가 큰 보물단지를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놀랬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 그는 그 보물을 발견한 것이 그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밭의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 밭에서 캐낸 보물은 그 밭의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그는 그 보물을 찾은 것도 잠시이고 마음속에 또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보물을 다시 묻고 밖에 나가서 자기의 집을 헐값에 팔고 모든 가재도구를 헐값에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그 밭을 사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리석다, 미쳤다라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이 농부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침내 돈을 급히 마련해서 그 밭을 샀습니다. 그 밭이 누구의 것이 되지요? 농부의 것이 되면 그 밭에 감춰진 보물도 농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천국을 발견한 사람이 이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자녀 되고 주님의 기쁨과 은혜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나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요 축복의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빌립, 마태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 가운데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투신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계획을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명령하시고 순종하신 응답입니다. 오늘 초청받아 오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오늘 어쩌다 사람에게 초청받아 이 자리에 왔어’가 아니라 주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을 부르시되 여러분 옆에 있는 분들을 통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분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주님의 계획과 은혜에 의해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만나 보장 없는 말 한마디를 툭 던지고 그들은 도박처럼 우르르 일어나 그들의 삶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 계획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의 자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를 부르시고 산상수훈을 이루시고 공생애의 길을 가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 마태복음에 파노라마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준비의 마지막 장면으로 제자들을 부른 것은 예수님의 원대한 구도 속에 이미 계획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은 우발적인 감정의 고조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내가 감정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 삶이 그와 같이 섭리되어지는 것입니다. 자동차들이 분주히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굉음을 내며 지나갑니다. 초록, 빨강, 흰색, 검정, 승용차, 버스, 트럭, 여러 종류, 여러 모양, 여러 색상의 자동차들이 달려갑니다. 이른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질주합니다. ‘한 명이 속도를 높이면 어깨에도 팔과 다리에도 신경이 더 쓰이고, 앞을 바라보는 시야에도 더 긴장할 테지’ 하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달려갑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을까?’, ‘누구를 만나기 위한 길인가?’, ‘무엇 때문에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를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목적이 무엇이며,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무엇 때문에 가는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들의 방향 전환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이루어진 변화라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체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물론 이 사람이 농부이면 “네가 사람을 경작하는 농부가 되게 하리라”, 물건 파는 사람이면 “네가 사람을 유익한 소출로 남기는 상인이 되게 하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우리를 이해시키고 있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계속해서 물고기를 잡았다면 당대에 끝났을 것입니다. 돈을 벌었을지, 가난했을지, 잘 살았을지, 못살았을지 그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2천년전에 살았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잘살았는지 못살았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고기 잡는 일을 그만두고 주님을 좇아 훈련을 받고 제자가 되어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 사도로서 역할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나라, 교회, 주의 나라를 이루었기에 그들은 2천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이름이 회자되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삶과 사역의 세계로 초청을 받고 그와 동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무슨 가치인지 알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내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의 의미와 주님이 나를 불러주신 의미와 감사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라는 것을 처음 배웠습니다. 그 전에는 길거리 영어간판을 보아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영어를 배우고 나니 ‘아, 이 말은 이런 뜻이구나’라는 것을 알고, ‘이 집은 무엇을 하는 집이구나’라는 정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내 눈 앞에 써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독하지 못하니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내 눈 앞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개되어도 내가 눈이 열리지 못해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에 대한 눈이 떠져서 내 눈 앞에 하나님의 세계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일 때 ‘아하, 하나님의 세계가 이렇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구나’라고 우리는 느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주님을 소유하셨습니까? 그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하셨습니까? 그 은혜 속에 살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우리 성도님들은 주님을 만나시고, 주님의 은혜의 세계를 눈으로 보시고 마음으로 보시고 그것을 누리시고 체험하시길 소원합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들의 삶의 방향을 선회할만한 가치와 권위가 있는 도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따를까 말까 초조하게 기다리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 한 마디에 그들은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해변을 다니시다가 시몬,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부르시니 앞뒤 가리지 않고 좇아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성경 다른 구절을 보게 되면 시몬,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어떻게 좇았냐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11절을 보면 베드로가 게네사렛 호수 즉,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습니다. 요즘 우리가 바닷가에 가보면 깊은 밤까지 고깃배가 불을 켜고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다에 훤하게 불을 밝히고 고기를 잡는 고깃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전문직업이 어부인 베드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없는 날이구나’ 어깨가 쳐져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 밤 고기를 잡아야지 팔아서 아이들 옷도 사주고 양식도 사고 또 필요한 것도 살텐데 오늘 밤새도록 잡아도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으니 어찌하누’ 하고 마음속에 실망이 가득하여 그의 일을 털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배에 타시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 그물을 내려라” 그런데 예수님은 고기 잡는 데에는 문외한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출신이셨습니다. 그런데 목수출신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가 순종했습니다. 깊은 데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을 끌어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친구를 불러서 두 배에 가득 실었습니다. 그리고 육지로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인사드릴 차례인데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물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죄인이라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으니 주님께 대접해드리겠습니다”라는 것이 정상적인 인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지 않고 무릎을 꿇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은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능력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육신에서 영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영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그와 같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와 같은 영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영적으로 파악을 하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요청은 모두가 그러합니다. 오늘 교회에 초청된 모든 분들은 하나님 앞에 초청받은 분이라고 여기셨기에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은 좇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기적을 보았고, 어떤 이는 진리를 깨달았고, 어떤 이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포기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우리를 부르실 때 올까말까하는 초조히 기다리는 부르심이 아니라 확신에 찬 담대한 요청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기쁨을 제공해 줄 능력이 있으시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때 우리에게 기쁨과 은혜를 제시해 줄 은혜의 계획이 있습니다. 주님의 초청은 전혀 다른 초청이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에게 망설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초청했을 때 “나는 돈이 많아서, 부자이기 때문에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장가를 가야하기 때문에 갈 수 없습니다.” “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그것을 보러 가야 합니다.” 하며 그의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봅니다. 초청하는 세계에 대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좇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세계에 동화되어 예수님을 좇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과 다른 어떤 일이 들어오면 그것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연 속에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구름 떼처럼 몰려듭니다. 그러나 해가 질 녘에 그들은 다 떠납니다. 예수님은 비감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장 67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많은 사람이 구름 떼처럼 내 주위에 모였지만 그들은 해가 질 녘에 다 갔느니라.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느냐?” 그 때 베드로는 담대히 고백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음에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영생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해가 져도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깨달은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의 곁을 떠날 수 없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의 삶에 새로운 삶의 구조를 이루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분명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변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에게 변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20절을 보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22절을 보니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곧’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결단이 순간적으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삶의 획기적인 변화, 이것은 시간이나 부대여건에 중요하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비교우위 속에서 결정한 것에는 망설이지 않게 됩니다. 망설이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망설이는 순간 우리는 선택의 판단기준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결단을 내리게 하는 동인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분명한 전환을 이루는 획기적인 요인이 있다면 우리는 두 말하지 않고 방향을 선회하게 될 것입니다. 고민하지 않습니다. 망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감사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결단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5절과 26절을 보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상 주심을 바라보기 때문에 주의 백성과 고난을 선택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력을 받았으니 이것은 더 좋은 보화를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변화의 기회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원컨대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계,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고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와 같은 것이 우리의 마음일 때 우리는 소원 속에 주님을 따르게 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무한한 삶의 가치를 발견한 자의 도전의 모습입니다.
권투선수가 세계 챔피언전 타이틀전 도전권을 얻었다면 아마 그의 생애에서 너무너무 행복할 것입니다. ‘내가 드디어 세계 챔피언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 수많은 복서들이 이 세계 챔피언을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데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새벽부터 도로를 뛸 것이며 끊임없는 스파링을 할 것이며 끊임없는 훈련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권투선수에게 직접 들은 얘기인데 연습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평상시 체중에서 자신의 표준 체중으로 권투에 나갈 수 있는 체중으로 체중을 감량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보통 평상시에서 10Kg이상을 빼야 통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챔피언인데도 먹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누리지도 못하는데 챔피언 오래 하는 것이 뭐가 좋으냐고 얘기하는 챔피언도 본적이 있습니다. 체중 통과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권투를 참 잘하는 사람인데 어떤 경기에 올라가서 너무 무기력하게 팔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지는 사람들 있습니다. 대부분 체중조절에 실패해서 마지막에 체중통과하지 못하면 게임에도 못 올라가니 억지로 무리하게 빼서 링에 올라갈 때 기진맥진한 상태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체중을 빼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사우나에서 계속 침을 뱉는다고 합니다. 침 한 번 뱉으면 1g씩 준다고 합니다. 1g 줄이려고 침을 뱉는데 침을 열 번, 백 번 뱉습니다. 백 번 뱉으면 100g 주는 것이니 말입니다. 끊임없이 뱉어서 나중에는 혓바닥이 갈라진다고 합니다. 정말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감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챔피언의 영광과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 먹지 못하고, 수도 없이 땀을 빼며 침이라도 뱉어 체중을 빼고 마침내 경기에 올라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와 같은 영광의 길을 위하여 하나님의 고난과 슬픔과 눈물을 겪는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라보는 영원한 영광의 소망이 생길 때 우리 주변의 어려움이나 우리 주변의 여러 가지 나를 유지했던 모든 것들이 지극히 작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길을 간 사람을 보면 결국 그들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길을 보았기에 골리앗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순간 모래알 같은 미디안의 대군들을 향하여 300명의 용사를 갖고 횃불과 항아리, 나팔만을 가지고 담대히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나는 어린아이라 갈 수 없습니다”고 말했지만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고 박진감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인가 내 삶을 투신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길을 제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가 움직일 만한 분명한 세계를 우리 눈앞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길을 본 사람, 하나님의 영광의 길을 본 사람은 달려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이전에 추구하던 구가치는 벗어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선택하여 좇아가게 됩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는 바다와 배에 그물을 던져두고 그리스도를 좇았습니다. 버린 입장에서 보면 버린 것이지만 새로운 그리스도의 세계를 찾은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무엇인가 잡게 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잡으려니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덜 중요한 것은 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2+2+2+2+2는 몇입니까? 10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이렇게 계산하는 것입니다. 덧셈밖에 모르니 말입니다. 그러나 2학년 쯤 올라가서 구구단을 배우면 2×5는 10이라고 간단히 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를 때 하나님의 세계를 볼 때는 “하나님의 세계가 어디 있어?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왜 하나님의 세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의아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아는 세계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밖에 느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셔야 우리는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세계를 내 세계로 포함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와 권능과 은총은 분명히 우리 앞에 열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라고 했습니다. 벌써 수천 년 시대에 살았던 모세의 시대에 70, 80을 살면 오래 산 것입니다. 아마 100세를 산들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이 70, 80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생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한된 삶이라면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우리의 남은 삶을 투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밥 먹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니지 않습니까. 입고 쓰고 누리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내 삶에 참된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찾아 우리의 삶에 혼신을 쏟아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 모인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미 예수를 믿는 분이라면 우리는 삶의 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길을 또 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 약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축복하시고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는데 인간들은 하나님과 약속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들을 낙원에서 추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것이 죄이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형벌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시기에 인간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를 너무나 가엾이 여기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피를 흘리고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을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길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상처를 받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어린대로, 자라는 과정 속에서 상처받고, 어른이 되어서는 어른이 되는대로 무능해서 능력이 없어서 또 남과 비교해서 또 내가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가운데 또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상황 속에서 내 자신에게 또 사람에게 관계 속에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받은 인간의 심정 속에 여러 가지 생채기가 나니 그 결과 일어나는 것은 내 상처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워서 다른 사람을 가해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다른 사람에게 가해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다 그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느냐입니다. 잘 치유한 사람은 보다 더 원활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원대하게 대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더 각박하게 대할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상처 난 심령,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나이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우리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모든 심령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과 위로와 은혜의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저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볼 때마다 늘 느낍니다. 갈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밟아서 발자국으로 울퉁불퉁합니다. 그림도 그려두고 글씨도 써두고 모양도 파놓곤 합니다. 바닷가에는 파도가 늘 칩니다. 파도가 한 번 들어왔다가 내려가면 울퉁불퉁했던 모래사장이 깨끗하게 편편한 도화지 같이 되곤 합니다. 사람들은 또 그곳에 발자국을 냅니다. 또 상처들이 납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또 파도가 들어왔다가 내려갑니다. 그러면 또 편편하고 깨끗하게 됩니다. 저는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슴에 파도처럼 한 번 쓸고 나가면 우리의 상처 난 모든 가슴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씻겨지고 치유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가슴을 한 번 만져주시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슴을 한 번 쓸고 가시면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서 상처받고 아프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고 상처 때문에 신음하고 고통 하던 우리들의 모든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치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내 자신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비교 속에서 상처받고 이루지 못한 꿈, 깨진 꿈 때문에 상처받고 삶의 이러저러한 모든 일들 때문에 마음 상해하는 우리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우리 삶에는 그 모든 상처를 치유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건장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 장대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초청받아온 형제님들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여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영광의 길을 갈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실이 아니며 하나님의 새로운 소득이요 은혜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들에게, 자매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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