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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창 32: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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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야곱 같은 인격도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완벽한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야곱이 있고 신약에는 베드로가 있어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된 베드로가 사랑스러운 것은 그가 우리와 동일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기꾼 인생 야곱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야곱과 싸웠던 사람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야곱입니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원 뜻은 ‘발뒤꿈치’라는 뜻이지만 의역하면 “사기꾼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야곱과 그 형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같은 날 태어났는데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이 뒤따라 나왔는데 야곱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이유는 자기가 먼저 나오기 위해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이름이 ‘발뒤꿈치’ 곧 야곱이라는 이름입니다(창25:26). 아무 지각이 없는 태아가 이런 욕심을 부리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름을 붙여준 그 부모들도 특이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유명한데 야베스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야베스를 고통스럽게 나았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런 고대인들의 태도는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앙에서 기인합니다. 긍정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운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그대로 야곱은 다른 사람의 발뒤꿈치를 잡으며 사는 사기꾼 인생을 살게 됩니다. 특히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합니다. 장자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권을 말합니다. 하루는 형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기진맥진해서 돌아왔습니다. 마침 그때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팥죽 좀 달라하니 형의 장자권과 바꾸자고 합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삽니다(창25:33). 두 번째는 이삭이 나이가 들어 마지막 축복의 기도를 장자인 에서에게 해주려 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형 에서인 것처럼 분장시켜 장자의 축복권을 대신 받게 합니다. 그때 속은 것을 안 에서가 분노하며 하는 말이 이러했습니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창27:36)

형제간의 갈등은 성경의 중요 주제중 하나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질투해서 최초의 살인을 행했습니다. 오늘 야곱과 에서의 갈등이 그렇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았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 동생인 에브라임이 더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형제 간의 갈등은 성서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대 우리 가족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애들도 그렇지만 형제간에 왜 그리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자는 자기 권리를 지키지 위해, 차자는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웁니다. 이 두 관계에서 장자는 가진 자입니다. 장자가 모든 권리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그 당연한 순서를 바꿈으로써 장자가 경계하도록 만듭니다. 복음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 특권을 없습니다. 오직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분한 형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계획합니다. 이를 두려워 한 야곱은 형의 눈을 피해 자기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멀리 피신을 갑니다. 야곱을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외삼촌 라반도 야곱 못지않은 사기꾼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훈련시키실 때는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야곱은 라반의 딸 중에서 동생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을 얻기 위해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첫날밤에 삼촌 라반이 보낸 것은 언니 레아였습니다. 레아가 아름답지 못해 시집 못갈 것을 염려해 먼저 보내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까지 얻기 위해 야곱은 7년을 더해 도합 14년을 봉사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삼촌 집에 총 20년을 머무는데 라반은 열 번이나 야곱을 속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나며 밧단아람에서의 20년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창31:38-41)

야곱은 밧단아람 학교에서 삼촌 라반으로부터 지독한 인격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연단시켜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듭니다. 한 사람이 위대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언약이 사람을 만듭니다. 형 에서로부터 사기를 쳐서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 축복에 맞는 인격을 갖추도록 야곱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아내들과 열두 자녀와 재산을 소유한 한 가문을 형성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형 에서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에서가 고향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사람을 보내서 동정을 살피게 합니다. 그 사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야곱은 두려워졌습니다. 형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데 이것이 자기를 해치기 위해서 오는지 환영하기 위해서 오는지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이 때도 역시 야곱은 자신의 약삭빠른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를 두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만약 한쪽을 치면 다른 한 쪽은 도망가려는 계산입니다.

야곱의 교묘함은 이런 위기의 때에 기도를 잊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32장 9-12절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기도 중 가장 긴 기도입니다. “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9-12)

과연 야곱다운 기도입니다. “일전에 베델에서 하나님 저 축복하시기로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대로 오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그 핵심은 “형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하는 입니다. 그때 베델에서도 야곱은 이기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나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내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아주 이기적이지만 야곱의 강점은 그래도 하나님께 매어 달린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기적인 기도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기꾼이라도 기도할 수 있는 권리는 있습니다. 착한 사람의 단점은 착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죄송해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매어 달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야곱은 역시 도로 야곱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난 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야곱은 이번엔 뇌물 공세로 갑니다. 염소 양 약대 소 나귀들을 모두 세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에서의 무리가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의 종 야곱이 주인 된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입니다’하고 말하라고 시킵니다. 연거푸 세 번의 예물을 받도록 한 것이지요. 물질 공세엔 사람들이 약하지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렇게 모든 안전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기도도 했지요, 인간적인 계획도 세웠지요. 그러나 그래도 불안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야곱의 불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밤중에 모든 아내들과 자녀들과 소유물들을 강을 건너보냅니다. 그리고 혼자만 강 저편에 남았습니다. 야곱은 왜 남았을까요?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면 기도하기 위해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야곱의 불안감을 잘 보여줍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라고 밝혀집니다. 이 사람이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는데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는 야곱의 자아나 야곱의 생각이 완강함을 보여줍니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넘어뜨립니다. 환도뼈는 엉덩이 아래 대퇴부 뼈로 생식기와 관련된 중요한 부위이며, 힘의 근원입니다. 환도뼈를 쳤다는 것은 야곱의 인생 방식을 꺾었다는 상징입니다.

악착같이 자기만 믿고 살아온 인생이기에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남을 속여서라도 얻어냈던 사람입니다. 야곱은 완벽하고 자기 계획에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형 에서의 손에 의해서 그동안에 쌓아왔던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질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이 순간에 그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도뼈를 치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물질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하고, 건강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자식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하고 자존심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합니다. 형편없이 무기력한 인생을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두 손 들고 하나님께로 나옵니다. 오늘 야곱이 그렇습니다. 무기력한 인생이 된 야곱은 하나님께 “내게 축복해 달라”(26)고 간구합니다. 저는 이제야 야곱이 제대로 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기도를 했지만 자기 머릿속에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드리는 형식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코너에 몰렸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상태로는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린 아이처럼 무기력한 가운데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도뼈를 꺾이는 경험을 하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몇 년 전 현대 아산의 회장 정몽헌씨가 자살을 해서 사회에 그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분의 유서에서 이런 글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행동하는 저를 여러분이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정 회장이 어리석다고 말한 행동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하기에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지 않고, 자신이 감당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연약해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실수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려 하면 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환도뼈가 꺾였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응답하여 야곱에게 정말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야곱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야곱입니다” 다른 말로 “사기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이제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바뀐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에는 자기 힘을 의지했다면 이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과 승부를 하는, 하나님과 겨루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묻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들에게 계시된 것은 출애굽기 3장의 모세 때에 처음이었습니다. 이때까지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등으로 불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싸움이 마칠 무렵 날이 밝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이 장소를 브니엘이라 부릅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 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몸소 싸웠다는 것이 한편 송구스럽기고 하고 한편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야곱은 그 태양을 마주보며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걷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날 아침 모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위력입니다. 이제는 진정으로 형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형님을 형님으로 인정합니다. 33장 3절을 보십시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처음부터 야곱을 죽이려 왔는지 환영하려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얍복 강에서 씨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합니다. 에서가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내 동생아’라는 말에서 이미 화해는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10절입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두려워했던 형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 전날 밤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 에서의 얼굴에서 전날 밤 씨름하던 하나님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자 인간과의 화해는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 생각과, 내 욕심대로, 내 방식대로 살아가다가는 우리는 벼랑 끝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는 믿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자기 힘과 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존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평화를 주시고, 사람을 상대해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야곱은 평생 환도뼈를 절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불편한 다리를 통해서 매일같이 이 믿음의 진리를 배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목표가 우리 영광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이루는 방식도 내 생각과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기력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인생이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삶입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평온케 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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