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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와 율법의 관계 (롬 7: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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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한 성도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식당을 하고 싶은데 목사님께서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 친정어머님께서는 음식을 잘 하셨나요? 했더니 잘 하시지는 못했다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하지마세요 라고 권면을 해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식당을 개업한 그 분은 결국 1년도 채 안 되서 장사가 잘 안되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음식이란 묘한 맛감이 있습니다. 처녀였을 때 음식을 못해도 친정엄마가 요리를 잘하신 분이었다면 결혼하여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친정어머니의 맛 감을 결국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재료와 시간속에서 깊은 맛을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음식을 잘 하시는 분들은 금식중에도 간도 안보고 대강 양념하는 것 같아도 음식이 맛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못하시는 분들은 저울에 달아 조미료를 넣어도 맛이 없습니다. 음식을 잘 하시는 분들은 목사가 심방을 가더라도 한 11시 20분정도 가면 그냥 가시게 할 수 없어 예배 마치고 있는 것 준비해 드린다고 한 20분정도 부엌에서 조리해서 가져온 것을 보면 몇 날을 준비해 놓은 것처럼 차려서 가져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목사의 심방으로 대접할 음식을 일주일 전부터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 할까 저 것 할까 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밖에 식당에서 대접하던가 목장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연합군상을 차려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 친정엄마가 해준 음식을 맛보며 자라온 아이들은 반드시 그 맛 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맛 감에 결국  그 아이의 요리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6개월동안은 잘 못합니다. 그러나 6개월 정도가 지나면 결국 친정어머니의 맛 감을 스스로가 찾아내어 요리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혼 6개월까지는 새 신랑이 무엇을 해준들 맛있어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에는 묘한 맛이 있습니다. 깊은 맛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또한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에도 깊은 맛이 있습니다. 맛을 알고 모르고는 하늘과 땅이 다른 것 만큼이나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맛을 알까요? 죄 때문에 실컷 한번 울어본 사람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죄 때문에 마음껏 통곡해 본 사람 말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앞에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중에 괴수로다 고백하듯이 말입니다. 주님앞에서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해 봤냐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로 인해 아파해 보고 울어보고 가슴을 쳐본 사람은 복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과 함께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 율법이 가져다 주는 축복입니다. 한참 되었는데요 로마서 강해 스무번째 시간에 롬3:20절을 강해하면서 율법이 가져다 주는 축복을 율법을 주신 목적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과 축복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통해 죄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통해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죄는 율법을 통해 자꾸만 사망으로 몰아가고 율법은 죄를 통해 자꾸만 생명으로 몰고 갑니다. 율법을 통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고 생명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역할을 율법이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원하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우리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율법을 통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두번째 목적은 죄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 될 수 없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는 법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간음을 하면서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런지도 모릅니다. 법은 무엇이 옳은 가를 선언할 뿐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율법은 죄 지은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정죄합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끌고 옵니다. 아 나는 죄인이구나 고백하는 순간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사형선고 앞에 서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세번째 목적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의 길을 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율법앞에서 죄인이라고 깨닫는 순간에 절망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내게 선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도구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율법앞에서 죄를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능하고 연약한 인간인가를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니 아버지의 도움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하나님이 없는 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땅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는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나는 저 사람보다 깨끗하다고 상대적인 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이 나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은 큰 복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 죄인임을 깨닫고 스스로 해결해 보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름대로 선을 쌓아봅니다. 고행을 해 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죄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력종교입니다. 성철스님이 결국 이 사실을 죽음 직전에 알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켜 그리스도에게도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실 율법이 마음씨 좋은 안내자는 분명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는 죄인임에도 그리스도에게도 오지 않는 자를 향해서는 사정없이 정죄합니다. 율법의 원칙을 가지고 더 크게 다가갑니다. 이러하니 율법이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죄와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러면서 본문은 율법의 절대역할을 또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면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b)

7절을 보니 그런즉 우리가 무슨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의 말에 있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면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합니다. 율법이 아니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셨다면 내 안에 탐심을 몰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니 사람들이 율법앞에 오해하는 것입니다. 율법앞에서 말씀앞에서 죄가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죄 아니 하나님의 터치앞에는 나 자신도 모르는 죄까지 드러납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을 율법이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처음부터 죄인이었으나 죄인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몸에 암덩어리가 있으나 모르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왠일인지 몸에 이상이 온 것 같습니다. 전에 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몇몇 병원에서 특별히 이상이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율법의사를 만났습니다. 의사는 X레이, MRI와 조직검사등 여러 검사를 통해 최종판단을 하더니 당신은 암이요 이대로 가면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면 의사가 문제입니까? 병원이 문제입니까? 율법은 죄 없는 사람을 죄인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몰랐을 때에는 평안에 평안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죄인임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낱낱이 드러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율법이 주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로운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주신 법을 지키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병명을 몰랐더라면 합니다. 차라리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율법의 부담입니다. 율법과 말씀앞에서 서보십시오. 도망 가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히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썬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는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과 같이 드러나느니라 합니다.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엇으로 입니까? 바로 말씀으로입니다. 율법으로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상관하지마 할 수 있지만 하나님말씀 앞에는 도망갈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아담처럼 숨어버리고 싶지만 그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앞에 벌거벗은 듯 드러나게 합니다. 말씀을 듣고 가면서 싸우는 부부들이 간혹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인데요 한번은 경찰서에서 출두명령이 있어 가보았더니 목사님을 고소하는 고소장이 발부되어 방문을 요청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무슨 사연으로 저를 고소했는가 했더니 글쎄 자신의 집을 목사님이 도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당형사가 목사님 정말 도청하셨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사연인즉슨 우리교회에 몇달 나오시는 분이 주일예배 때마다 말씀을 들어보니 자신의 가정사에게 대해 훤히 알고 있는 듯 말씀하시는 것이 이건 분명 도청해서 알고 있다 생각해서 고소한 것이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상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두는 벌거벗은 듯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죄를 죄로 볼 수 있게 합니다. 간음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많습니다. 다들 이러고 사는데 하고 적당히 넘어갈려 합니다. 간음죄를 지으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죄인줄 알면서도 죄를 절제할 힘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씀 앞에 사는 사람은 마음에서 간음하였어도 음욕을 품기만 하여도 이미 간음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보면 남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을 죄로 느끼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찔러 쪼개어 본성이 드러나게 합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제대로 알면 나도 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터치속에 죄를 향해 눈이 열려지면 통곡하고 할말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옷으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사람은 외적인 것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앞에 죄인임을 보고 알았기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크게 더 선명하게 만나길 원하십니다. 8절은 이야기합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니라(8b)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니라 합니다. 죄라는 놈이 계명을 이용하며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큰 죄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야 착하게 살 수 없어 자격없음이 짓누르는 것입니다. 죄는 결국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음에 죄인을 파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나를 상관하시는 자 앞에 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앞에 서는 순간 더 큰 죄인이 될 수록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죄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서의 복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옆에 누가 더 큰 죄인인가요? 여자성도님들 아주 은혜가 있는 것 같아도 아닌 것이 왜? 남편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더 큰 죄인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자분들 늘 남편위해 기도하다보니 스스로 정리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집 문제는 남편에게 있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입니다. 죄가 겨울 잠을 자듯 파면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말씀 앞에 죄성이 드러나 버리는 것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자기 고백을 합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내가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믿음이 제일 인 줄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를 핍박합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말입니다. 내가 살았더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여간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문제인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히고 고집를 피우고 합니다. 죽다말아서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설프게 죽다 살아나니 문제입니다. 닭이나 개도 잡다가 잘못잡아서 날뛰는 것들을 보면 온 동네를 휘집고 다닙니다. 어설프게 죽으면 그렇습니다.

계명에 이르매 말씀 앞에 서보니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죄는 살아나고는 죄인임을 보는 것입니다. 더 큰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도다는 죽는 것이 매력입니다. 죽으면 욕심도 미움도 말도 없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것이 되었도다(10)

10절에 무어라 합니까?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살라고 왔더니 계명이 말씀이 나를 죽였도다 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죽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15:31절에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나 죽노라 합니다. 눅9: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입니다. 그리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에는 살려고 왔지만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직 덜 죽어서 문제가 문제로 보이는 것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합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함이니라 합니다. 율법의 역할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나는 죄인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죄와 율법의 관계는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공생하는 것 같습니다. 왜요 우선은 목적이 같기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는 마귀로부터 왔는데도 어울리거든요 그러나 서로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죄는 율법을 통해 죄가 되어지고 율법은 죄를 통해 그 목적을 이루곤 합니다. 죄와 율법의 우선의 목적치는 같습니다. 죽음입니다. 죄는 율법을 통해 자꾸만 사망으로 몰고 갑니다. 율법은 죄를 통해 함께 사망으로 가는 것 같으나 율법은 결국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신앙는 더 큰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입니다. 신앙은 자격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자격으로 설 수 있습니다. 신앙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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