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복을 찾는 신앙의 신비 (룻 1:1-14)

  • 잡초 잡초
  • 223
  • 0

첨부 1


<행복한 사람에 대한 평가백서>가 있어 소개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하답니다. ①남이 잘될 때 샘내지 않는 사람 ②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기쁨으로 나누는 사람 ③아름다운 자연을 가슴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 ④타인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보다 칭찬하고 축복할 줄 아는 사람 ⑤비난당할 때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온유한 사람 ⑥지난날 과오에 집착하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믿음으로 용기 있게 나아가는 사람 ⑦식사를 대할 때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 ⑧어떤 처지에도 자족할 줄 아는 사람 ⑨절박한 순간에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 ⑩언제든지 아멘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 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평생<행복 하고 싶은 것>이 소원인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예쁜 나비 한 마리가 가시덤불에 걸려 버둥대는 모습을 보고 가시를 헤치고 들어가서 그 나비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나비가 갑자기 천사로 변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녀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며 귀에다 몇 마디 말을 속삭이고는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후 이 소녀가 자라서 주부가 되고 할머니로 변해가면서 늘 행복하고 생기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고 부러워했습니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했어도 전혀 삶에 대한 후회도 없는 기쁜 얼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는가를 묻자 그때서야 그 옛날 천사가 자기 귀에 속삭였던 말을 공개했습니다.“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늘 도움을 주는 사람, 그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존재가 되라. 그러면 당신은 언제나 행복하게 살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찾습니다.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될 사람을 찾을 뿐이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 남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참으로 다양합니다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첫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넷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 인간상 중에 어떤 사람이 가장 악한 인간상일까요? 바로 기독교인이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의도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철저히 그 모든 선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흙덩이에 불과했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었더니<생령>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야 했고 또 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졌다는 사실은 행복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영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로 진정한 행복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적 만족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행복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예수님의 행복 론>을 아십니까?“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예수님의 행복 론입니다.

자 그럼 이제 생각해 봅시다. 인간에게 왜 불행이 오는 것입니까? 불행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원인을 여러 가지로 찾아보려고 합니다만 그 근본은 바로 영혼의 문제에서 떠날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신앙의 문제가 희미해 질 때 불행은 여지없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은 룻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마는 그 시작은[나오미]라는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발견 할 수 있고 그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는 방법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나오미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이 살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는 모압이라고 하는 이방 땅으로 이사를 갑니다. 물론 이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이방 땅이라고 못 갈 곳은 아닙니다. 심방을 하다보면 커다란 절간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부부가 다정스럽게 찍은 사진을 걸어 놓은 집이 있습니다. 교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면 더 좋겠습니다마는 성도들도 산에 등산을 가면 절에 들어가 보기도 한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그걸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나오미가 이방 땅 모압에 이사 간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기가 문제입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세상을 의지하고자 하는 그 숨겨진 내적 동기가 문제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고 좀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난 곳이 이방 땅 모압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 매달려 해결해야 할 일을 눈에 보이는 만족을 찾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기대했던 행복을 모압에서 찾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모압에 기대를 걸었고 남편에게 의지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아들입니다. 그런데 며느리를 얻으면서 나오미는 또 한번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신7:3-4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방여인을 며느리로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나오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현실적인 타협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들의 결혼을 통해 잃어버린 행복을 다소나마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오미는 또 다시 그 아들들마저 죽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인간적으로 의지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오미의 불행이자 오늘 우리 인간들의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생각과 세상의 보이는 것을 좇아간 나오미의 불행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흉년은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흉년은 있게 마련입니다. 갑자기 직장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고민의 날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경제적 흉년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관계의 흉년을 겪기도 합니다. 메마르고 삭막한 부부관계를 경험하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교회 속에서 경험하는 성도의 관계는 이상이 없나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갈등이야말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긴장과 어둠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실로 큰 흉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신체적 흉년은 어떻습니까? 건강이 나빠지고 늘 연약한 건강 문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흉년보다 더욱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영혼의 흉년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적 생활은 어떻습니까? 말씀이 모자라다고 느끼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기도가 메마르고 마음속에서 찬송의 샘이 메말라 버리는 그런 상태로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봉사니, 전도니 아무리 떠들어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려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교회나 들락거리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흉년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혹시 채우지 못할 만족을 갈구 하여 오늘도 모압을 찾아 늘 방황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흉년이 오고 환란이 오더라도 절대로 떠나지 말고 끝까지 머물러 지켜야할 곳은 하나님 품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흉년이 올 때 너무나 쉽게 도피를 결정하고 맙니다.“모압이라도 좋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불신앙적인 도피행각에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버리고 타락의 땅 모압을 선택했던 나오미는 남편도, 두 아들도 그 땅에서 잃어버리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간 걸음인데! 출세해서 여봐란 듯이 살고 싶어서 간 곳인데! 그 기대의 끝은 절망이며 한숨과 탄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여기까지가 나오미의 불행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의 삶이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불행으로 끝나버린다면 참으로 불쌍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에 회복의 은총이 없다면 영원한 절망의 무덤 속에서 올라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회복의 은총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였을 때 사죄의 은총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돌아 올 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시며 행복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나오미의 삶은 불행으로 끝나버리지 않았고 행복을 찾는 신앙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최악의 상태에서 나오미에게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 흉년이 해결되었다는 은혜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때 나오미는 소식을 듣는 즉시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참 뻔뻔한 여자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얼굴에 철판 깔았나?’다른 사람들은 흉년 가운데서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고 지켰거든요. 그런데 도망갔던 여자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아마 그 곳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형편과 처지가 뭡니까? 잘 살겠다고 도망치더니 남편도 죽고 두 아들마저 죽었으니 깨질 대로 다 깨어지고 부숴 질 대로 다 부숴 진 모습으로 그 곳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마 차라리 죽기보다 싫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이제야 제 정신이 돌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주위에 사람들, 비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안 보입니다. 안 들립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일 뿐입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체면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데는 위신과 명예가 문제 안 됩니다. 행복이란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가치입니다. 보세요. 제 정신이 든 나오미가 처음에는 며느리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생각을 바꾸어 며느리들에게 자기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혼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제는 더 이상 사람과 세상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결단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며느리들을 떠나보내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복이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한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그 중의 한 사람 룻을 남겨 두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때로는 내가 바로 포기한 그것을 다시 주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포기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나오미가 세상 적인 모든 것과 부끄러움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단 할 때 그녀에게 주신 복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며느리 룻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룻을 통해 메시야가 탄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복도 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압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즉, 세상과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의지 할 때 행복 된 삶은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위치에 서 있습니까? 기대 했던 모든 것을 다 잃고서 낙심할 모압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포기할 것 다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베들레헴을 향하고 있나요?
<행복을 찾는 신앙의 신비>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 각자의 대답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