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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의 기쁨 (잠 9:9~10, 요이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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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한 마담 부쉬는 현대사회의 4대 결핍현상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함께 부를 노래가 없다. 둘째는 높이 흔들 깃발이 없다. 셋째는 믿을만한 진리가 없다. 넷째는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없다.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곡도 가사도 따라 하기조차 힘듭니다. 높이 깃발을 들고 따라오라고 해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절대 가치를 지닌 진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풍요한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결핍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현대는 진리도 지도자도 없는 시대로 전락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지만 모두 함께 따라올 만한 것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런 결핍현상은 시대적 불운입니다. 참 교훈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정보시대는 영성시대입니다. 영성이 극대화되는 시대이고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영성이 제5의 물결이라고 할 만큼 영성은 이 시대의 화두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최고도로 발달하는 시대에 웬 영성입니까? 영성은 과학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이런 영성의 시대에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만 영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영성이 있습니다. 불교는 불교의 영성이 있고, 모든 신비종교도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당도 영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과 다른 것이지만 영적이지 못한 사람은 그 영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 영성이나 추구하고 따라갑니다. 제다 볼 때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건강입니다. 온통 어딜 가나 건강 얘기가 꽃을 피웁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이런 정신적 지주가 영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미래사회는 사이비 이단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영성을 추구하는데 바른 영성을 받지 못하면 엉뚱한 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이비요 이단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그릇된 교훈”이라 했습니다. 그릇된 교훈을 받는 그릇된 영성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영지주의는 심각한 이단이었습니다. 영지주의를 ‘그노시스 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노시스’란 말은 헬라어의 지식이란 말입니다. 영지주의에서는 높은 지식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구레네 시몬이 대신 달려 죽었다고 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유대주의, 동방의 신비주의, 그리스 철학 등이 그리스도교와 혼합된 일종의 혼합주의였습니다.

  최근의 ‘다빈치 코드’는 그리스도를 그릇 이해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 정도로 격하합니다. ‘유다복음’은 영지주의 중의 가인파의 복음입니다. 가룟 유다를 미화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이런 유의 소설, 영화, 이야기가 끝없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문화시대인 현대의 반 그리스도, 적그리스도입니다.

  디모데후서 4:3에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라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사람의 말을 더 중히 여깁니다. 개인의 욕심을 따를 스승을 두고 예수님이 아닌 스승을 따릅니다.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듣습니다. 사람을 깨우치고, 뒤집어놓고, 돌이킬 수 있는 말은 하지 않고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달콤한 말만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른 교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 남성이 여성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10가지 닭살 대사가 있습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아버님이 도둑이셨나요?”라고 남성이 묻습니다. 여성이 “네?”라고 반문하면 “하늘에서 별을 훔쳐다가 당신의 두 눈에 넣으신 것 같아서요”라고 한답니다. 정말 닭살 돋지요? “천국에서 떨어질 때 아프지 않던가요?” “어젯밤 내내 제 꿈속을 돌아다니느라 다리 아프지 않던가요?”라는 등의 말입니다. 이런 말은 닭살인지 알지만 들어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요.
  그런데 점점 사람들이 자기에게 유익한 말만 듣고, 쓴 말이나 참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참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교훈에 귀를 기울입니다. 복음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영화 볼 때는 절대 안 졸지만 교회만 오면 졸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시편 119:103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합니다. 참 말씀과 주님의 교훈의 맛이 세상 어떤 것보다 단 맛입니다. 주님의 교훈의 말씀이 참 진리입니다. 다른 말에 유혹 당하지 말고 교훈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여 일한 것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8절에는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전에 좋은 것, 많은 것을 가지고 교훈을 받았어도 이 교훈을 버리면 그 동안 일한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전에 열심이 교회를 섬기고 좋은 교훈을 받고 살다가 바른 교훈을 버린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받고 살다가 그릇된 교훈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 상반절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에 바울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심지어 데마에게는 동역자라고까지 한 사람인데 세상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몬1:24). 주님의 교회를 함께 섬기다가 세상으로 빠지는 사람도 있고, 좋은 교훈을 받아 섬기다가 엉뚱한 교훈으로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 번 미국에 갈 때에 비행기가 많이 흔들렸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가장 오랜 시간동안 비행기가 흔들린 것 같습니다. 10분 이상 흔들리니 약간은 멀미가 나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흔들렸으면 기내 음료 서비스도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조금도 멈추거나 늦추지 않고 계속 제 속도로 비행했습니다. 비행기가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면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고도나 속도도 늦추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꾸준히 달려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1에는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고 합니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3절에는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지고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그릇된 교훈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느 날 심지어 몇 시에 오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재산을 교회에 바치라고 강요합니다. 십일조와 봉헌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 교회에 가면 구원 못 받으니 우리 교회에 와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교회에 다 갈 수 있고, 다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내 신앙에 가장 좋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교회가 공교회 즉 하나님의 교회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구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가 가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고백입니다. 우리 목사님만이 진짜다고 합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목사님만 진짜고 다른 목사는 가짜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목사님을 우습게 보는 것은 그릇된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4:6에는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좋은 교훈이 무슨 교훈입니까?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의 교훈만이 진짜 교훈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좋은 교훈입니다. 목사도 틀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온전하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6:3에는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따르지 아니하면”이라고 합니다.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된 사람이니까? 5절에는 말합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닌 교훈은 마음이 부패하여 얻은 교훈입니다. 결과적으로 진리를 잃어버린 교훈입니다. 진리를 떠난 교훈은 참 교훈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교훈을 가지지 않는 자들을 집에 들이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얼마나 엄격하고 단호하고 냉정하게 잘라버리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사실은 바른 교훈을 받지 못한 사람은 멀리 할수록 좋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열심인지 아시지요? 우리 보다 덜 열심이 아닙니다. 열심이 없으면 이단이 못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단이 생기는 것도 우리 잘못입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위대한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지혜가 있고 훌륭한 여성이었습니다. 한 번은 부주의하고 고집 센 딸을 올바르게 교육하기 위하여 딸에게 다 탄 숯을 한 아름 안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숯들은 뜨겁지 않다. 델 염려가 없으니 안고 오렴”. 물론 딸은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손과 옷이 더러워지잖아요?” 딸의 반문에 어머니는 말합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늘 주의해야 한다. 사람의 행동에는 화상까지 입히지는 않지만 손과 가슴을 더럽게 하는 행위가 있기 때문이란다.” 화상은 입지 않지만 더럽게 하는 그릇된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 더렵혀지면 더 더러워지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생명까지도 손상이 가게 됩니다. 이런 그릇된 교훈을 아예 처음부터 버리고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9절 하반절에는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성경에는 ‘바른 교훈’이라 합니다(딛1:9, 2:1). 바른 교훈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고 삽니다. 결과적으로 바른 교훈에 거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때문에 바르게 사는 바른 사람들입니다.

  악동인 아들 형제를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이 부모는 아들들을 고쳐보려고 목사님께 맡겼습니다. 목사님은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동생은 모른다는 시늉만 하고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동생은 계속 모른다는 시늉만 합니다. 목사님은 확실하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서 격앙된 어조로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묻고 있다”. 이 때 동생이 얼른 밖으로 나와서 형에게 말했습니다. “형, 큰일 났어. 하나님이 실종됐나본데 우리 탓인 줄 알고 계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삶이 바른 교훈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교훈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이것이 영적 삶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른 교훈을 주는 것은 가장 중요한 부모됨의 가치입니다. 아룬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의 손자입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자제하는 법과 평화롭게 힘을 사용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겸손함에 대해 배웠습니다. ‘마시멜로 이야기’란 책에 보면 아룬 간디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룬 간디가 17살 때 아버지로부터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회의에 참석하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룬에게 집에서 15킬로 떨어진 사무실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하여 아룬은 차를 운전하며 아버지의 사무실에 갔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한 후 아버지가 아룬에게 “차가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서 귀에 거슬리는 구나. 수리를 해야겠다. 차를 정비소에 맡긴 다음 5시까지는 다시 사무실로 오너라.” “네.” “5시까지 꼭 돌아와야 한다.” “걱정 마세요.” 아룬은 시내를 지나 외곽에 있는 정비소에 갔습니다. “차를 고치는 동안 뭘 하지?” 정비사에게 차에 대한 설명을 하고 차를 맡기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차를 다 고쳤어. 타고 가도 괜찮단다.” “벌써 다 고쳤어요?” 이제 겨우 12시였습니다. 아직도 5시간이나 남았습니다. 아룬은 시내로 들어가다가 극장 간판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는 차를 세워두고 표를 샀습니다. 두 편을 상영하는 동시상영이었습니다. “동시상영?” 아룬은 한편만 보고 가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에 빠져 두 편을 다 보고 두 번째 영화의 마지막이 되자 그는 놀라 시계를 보았습니다. 6시 5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끼고 석양이 지는 저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무실 밖에서 혼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아버지는 아룬을 보자 안도감에 큰 숨을 내 쉬셨습니다.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해서 걱정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 “정비사 때문에 늦었어요. 고장 원인을 찾지 못해 한참 걸렸어요. 겨우 찾아 수리를 끝냈어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버지, 타세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아버지는 차에 타지 않고 꼼짝도 않고 서 있었습니다. “어서 집에 가야죠.” “아들아, 차를 몰고 집에 먼저 가거라. 나는 걸어가야겠다.” “아버지, 15킬로나 되는 길은 너무 멀어요. 왜 그러세요?” “나는 지난 17년 동안 너를 올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내가 네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구나. 어떻게 해야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걸어가련다. 네가 거짓말 할 정도로 내가 나쁜 아버지였다면 용서해 다오”. 아버지는 시간 맞춰 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이 되어 이미 정비소에 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걷고 아들은 차를 천천히 운전하면서 울먹이면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둘이는 천천히 걷고 운전하며 집을 향했습니다. 무려 5시간이 걸려 자정이 가까워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에 도착한 아룬의 아버지는 말없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룬은 그 때 평생을 간직할만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 후에 어떠했습니까?” “그 후로는 어떤 자에게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체벌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야단칠 때는 야단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체벌은 순간적인 효과밖에 없습니다. 손쉽다는 이유로 체벌만을 강조하는 교육은 오히려 어떻게든 체벌만을 면하면 된다는 그릇된 사고를 심어줄 수 있습니다. 아룬 간디의 아버지는 체벌 대신 어려운 일을 택했습니다. 아들을 때리는 것보다 더 아픈 교훈을 준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제력은 아들에게 평생의 교훈을 심어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9에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합니다. 바른 교훈이 아닌 다른 교훈에 아예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6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합니다. 다른 교훈이 아니라 성경이 곧 교훈입니다. 성경으로 교훈하고, 성경으로 책망하고, 성경으로 교육하는 우리 가정,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려고 가게에 갔습니다. “이건 어린이 장난감 치고는 너무 복잡하지 않아요?” 가게 주인이 말했습니다. “부인, 이 교육용 장난감은 어린이가 요즘 세상에 적응하도록 도와준답니다.” “그래요?” “이 장난감은 어떻게 맞춰 봐도 제대로 들어맞지 않거든요”.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삽니다. 참 교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외면당합니다. 절대 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맞춰 봐도 맞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바른 교훈을 따르고 가르쳐야 합니다.

  지혜지수(Brilliant Quotient)란 말이 있습니다. 머리(Brain), 아름다움(Beauty) 그리고 행위(Behavior) 이 셋을 가지고 지혜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이 셋이 함께 해야 참 지혜입니다. 말이 달릴 때 발을 디딘 땅만 이용하여 달린 것이 아닙니다. 발자국이 있는 땅만 두고 나머지 땅을 다 없이 하면 달릴 수 있습니까? 디딘 땅은 작은 부분입니다. 말은 모든 땅을 다 달리는데 사용했습니다.

  살아가기 위하여 세상 지식도 필요합니다. 물질도 필요합니다. 사람의 지식도 필요합니다. 세상 스승의 교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선하게 이용할 것이지 발을 디딜 부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말씀입니다. 우리 손에 있는 성경입니다.

  미혹되기 쉬운 이 시대에 조심조심 그리스도의 참 교훈을 받아 바른 교훈을 따라 사는 기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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