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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 (창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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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적령기가 되면 아름다운 결혼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결혼생활이 유지되는 것조차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늘어만 가는 이혼율을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번영의 과정에서 오는 미성숙의 소산이라고 보았으나 서구 선진국들의 이혼율의 증가는 그러한 이유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결혼은 무엇이며, 결혼이든, 독신이든, 연애이든 우리가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이것들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바는 무엇인지 본 설교 말씀을 통해 정립하고자 한다.

II. 결혼과 연애

본문 말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는 표현을 두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이처럼 뭔가 결핍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주장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아담을 창조하신 후 뭔가가 부족하여 하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는 이미 하와를 창조하실 계획이 있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험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 아니라 아담의 입장을 기초로 한 기록인 것이다.

A. 남녀 창조와 결혼

결혼 제도는 인간 경험을 통해 인간이 수립한 것이 아니라, 창조 시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세우신 것이다. 아담이 홀로 있기에 뭔가가 부족하셔서 하와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 속에 이미 있었던 하와를 만드심으로써 창조가 마무리 되었으며, 완전하여졌고, 아름다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녀를 창조하신 원리이며, 결혼제도의 동기인 것이다. 결혼 제도의 미학적 동기는 아름다움이다. 이는 접힘과 펼침이라는 하나님의 초시간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 곧 두 사람의 결혼이 이루어지기 전에(접힘) 하나님은 두 존재의 결합으로 인한 아름다움을 이미 아셨기 때문이고, 결혼을 통해 실제적으로 펼쳐질(펼침)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 확인되는 아름다움도 그분은 아셨기 때문이다.

1. 아름다움의 성취, 보완: 아담의 본성은 하와의 창조 유무에 상관없이 창조 받은 그대로 항상 동일했다. 이 말은 아담이든 하와이든 그들은 각각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완전한 인간이며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긴 하나, 두 사람이 서로 보완적 존재로 결합할 때 이 아름다움은 더더욱 빛을 발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아름다움으로 성취된다는 사실 또한 내포하고 있다. 모든 인간성의 본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처럼 남성과 여성이라는 어떤 구분된 성향을 따로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그분 속에 완전하게 가지고 계신다. 인간 안에도 이러한 점은 어렴풋이 발견되지만, 여성과 남성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서로 구별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렇듯 각각의 성향을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목적은 서로 보완을 이루어 살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온전한 성품을 드러내게 하고자 함이다.

2. 의존적 존재: 남성에게는 강인함, 결단력, 육체적 힘, 진취적이며 정복하려는 성향을 주셨고, 여성에게는 섬세함, 부드러움, 돌봄, 관계에 대한 애착, 가꾸고 정착하려는 성향을 주셨다. 이러한 보완적 성향들을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면 심각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나, 여기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것은 각자에게는 없는 부분을 보완해 줌으로써 두 사람이 서로 의존하도록 만드시고자 한 점이다. 의존은 사랑과 소속감을 유발시키며, 그 감정을 유지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3. 다양과 평등: 하나님이 주신 두 성향이 인간의 자기 사랑과 결탁할 때에는 이를 주신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역사 속에서도 수없이 발견되는 것이며(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도덕과 윤리, 사회제도로 여성의 굴종을 강요한 남성우월주의 실례들), 지금 우리의 가정과 남녀 관계 속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돕는(케네이도: correspond to)’이라는 말은 ‘그 남자와 상응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서 여성은 남성의 사명 성취를 위한 부속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독립적인 사명이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한 남성이 참 신자가 되어가는 것, 한 여성이 참 신자가 되어가는 것은 참다운 남성, 참다운 여성이 되어가는 것이지,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모두 다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양성이 서로 보완을 이루면서 하나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완성해 나가는 것, 그것을 도구삼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을 보여주어 본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B. 결혼을 위한 연애

1. 결혼 목표:
결혼의 기초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하면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시각은 우리의 시각과는 사뭇 다르다. 결혼하기 위한 확인의 기초로서 사랑을 언급하기 보다는 결혼한 이후 그 결혼을 유지시키기 위한 이 사랑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부부관계를 유비삼아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 곧 교회를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구원받기 전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회심한 이후 수많은 유혹과 핍박 속에서도 그 사랑을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성경은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연애함에 있어서 참고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연애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온전한 성인으로서 사회에 진출하기 전, -혼신의 힘을 들여 전인격적으로 준비되어야 하는 한시적인 시기- 그 시기 동안의 연애는 엄청난 에너지를 헛되게 낭비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애를 함으로써 자기완성과 발전에 더 매진하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삶의 어떠한 목적도 없으면서도 연애하지 말라는 원칙만을 지키는 자도 어리석은 인간이다. 인생의 가치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세운 자는 결혼도 연애도 지혜롭고 확실하다. 정해진 기간 동안만 이를 위해 열중하고 그 이후는 영적, 정신적, 사회적 발전과 함께 삶의 목적(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향해 매진해야 한다. 결혼은 육신적 성숙이나 적절한 나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많은 준비가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2. 구도의 동지:
둘째, 연애 상대를 선택함에 있어서 불신자들처럼 안목의 정욕에 매여 있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길이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성경에 두어야 한다. 청교도들의 결혼관은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으로 배우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 까지 걸어가야 할 구도자의 동반자로서 배우자를 보았다. 가장 이상적인 선택은 믿는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신앙적 대화, 진리를 교류를 할 때 구도자로서 성도의 기쁨을 나눠 줄 수 있는 자를 선택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준비가 다 된 사람이면 더더욱 좋을 것이나 가장 우선순위는 이것임을 기억하자.

3. 자기 깨어짐:
셋째, 한 사람의 남편, 한 사람의 아내로서가 아닌 예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가변적인데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하겠는가? 우리가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예수의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은 자기 깨어짐 없이는 불가능하다. 결혼의 진정한 행복은 상대방이 나의 질서를 온전히 받아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혼자 살았더라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탁월함과 아름다운 상태에 배우자가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깨뜨려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하지 마시고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길 원합니다’라는 하나님의 향한 그 고백이 우리의 가정과 관계 속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결혼 적령기를 넘어서면서 불신자와의 결혼에 유혹받기 쉬우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결혼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결혼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걱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라. 그렇게 드려지는 기도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그 사람을 바꾸시고 결혼을 준비시키신다.

III. 독신: 삶의 한 방식

A. 세속적 독신: 세속적 독신은 자의적 독신과 타의적 독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자신이 행복을 위해, 자신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나, 후자는 하고 싶으나 못한 것을 말한다.
B. 신령한 독신: 신령한 독신은 소명 받은 독신이다. 독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은 것도 사실이나, 신령한 독신이라면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하나의 삶의 양태일 뿐이다. 어거스틴은 이를 ‘거룩한 동정성’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처럼 거룩하고도 신령한 독신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께 바쳐진 일생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는 결혼 보다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확실한 소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령한 독신은 하나님 앞에서의 잠잠한 독대가 필요하다.

IV. 결론: 자신을 준비하라

결혼을 하여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사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십자가는 있다.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삶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자는 어느 것을 선택하든 후회하지 않을 것이나, 세월에 떠밀려 아무 목적 없이 살아가는 자는 그 어느 것을 선택하든 후회만이 남을 것이다. 준비되었는가?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구하며, 당신의 길을 보여 달라는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길을 걸어가도록 힘주시는 신실하신 분이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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