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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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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복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받는 것을 더욱 좋아합니다. 흔히 자기에게 기분 좋게 하는 사람에게는 “복많이 받으십시오” “성공하십시요”하고 축복합니다. 그러나 기분나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빌어먹을 인간” 저주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온유한 자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힘이 있어야 성공하고, 배경이 든든하고 강한 자가 되어야 이 세상을 정복하고 능치 못하는 일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가 잘 삽니다.
이가 강합니까 혀가 강합니까? 이빨은 강해도 이 강한 이빨은 나중에 빠집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혀는 벌레먹는 일도 없습니다. 죽을 때 혀 빠져 죽은 분이 있습니까? 이 빠져 죽는 사람은 있어도 혀 빠져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드럽고 약한 것은 수명도 길게 하십니다. 강한 것이 오래가는 것 같지만 강한 자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힘있는 동물들이 천하를 다 다스리고 자기 혼자만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호랑이나 사자나 치타 같은 동물들은 잘 번식이 되지를 않습니다. 점점 수가 줄어들게 되어서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토끼, 고양이, 곤충들, 연어, 비둘기, 참새 . . .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은 번식이 잘됩니다. 번식을 일부러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하여튼 순한 동물 치고 오래 안 사는 동물이 없어요. 수명이 길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주신 거예요. 영역도 넓고 수명도 길고 행복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잘 된다”는 것입니다.

1. 자기를 잘 다스리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온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라우테스(prautes)라는 말을 쓰고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적 배경을 보면 옛날에는 벌판을 질주하던 야생마를 사냥해서 식용으로 썼답니다. 그러다가 이 야생마를 길들여 교통수단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생마의 야성은 다 죽고 사람에게 복종하고 길들여진 말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유라는 말은 원래는 야생마처럼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었는데 주안에서 길들여져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좋은 개는 족보가 있습니다. 좋은 개는 좋은 개 훈련 학교도 다닙니다. 그리고 일명 똥개도 있습니다. 진짜 진돗개는 주인에게 철저하게 복종합니다. 주인 앞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에게는 한없이 차갑고 강합니다. 그러나 똥개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주인에게도 꼬리치고, 낯선 사람에게도 꼬리칩니다.
여기서 ‘온유’와 ‘온순’을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온유’는 진돗개와 같고 온순은 똥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유는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 성품이라고 한다면 온순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받을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하나님의 훈련에 잘 길들여지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월프’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분노를 느낄 때의 위장의 점막은 충혈 되고, 운동이 증가되며, 위산분비가 많아져서, 마침내는 위, 장출혈과 궤양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대장염의 96%가 분노 때문이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또한 분노는 혈관을 갑자기 수축시켜 혈압을 올리므로 뇌출혈 등의 위험을 가중시킨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돈 버는 것입니까? 자식 키우는 것입니까? 자신의 뜻을 펴는 것입니까? 대인관계입니까? 신앙생활입니까? 이 모든 것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고난 성품이 좋아야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품이 안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서 바뀐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온유한 것은 단순히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성적인 그런 성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된 성품, 변화된 기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어떤 방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된 성품이나 기질을 우리는 온유함이라고 말합니다. 급하고 과격한 성품을 가졌던 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을 살다보면 아주 온순한 사람도 불같은 성품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아가 잘 훈련된 사람들은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가 약하거나 병들게 되면 욕망을 조절할 수 없어서 제 멋대로 살게 됩니다.

김치는 때로 겉절이도 맛있게 먹기는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김장김치가 제맛입니다. 배추가 겉만 절여져서는 김치의 감칠맛이 우러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추가 제대로 속까지 푹 절여져야 배추 전체에서 김치의 맛이 솟아납니다.
잘 다스려진 핵에너지는 전기를 생산해서 큰 공헌을 하지만 다스려지지 않은 핵에너지는 강력한 폭탄이 되어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우라늄이 핵분열을 해서 전기에너지로 바꾸면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이지만 군사적인 에너지로 쓰이면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복의 통로가 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제일 땅을 많이 차지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뚱뚱한 사람이랍니다. 뚱뚱한 사람이 땅을 제일 많이 차지합니다. 너무 다이어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다스리는 힘은 성령님께 있습니다. 성령님께 붙잡혀야 다스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인이 되셔서 다스려 주셔야 합니다. 성령님께 우리의 마음, 입술, 행동을 맡기고 지배를 받으면 우리를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

2. 온유는 의지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온유는 우리의 의지의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온유는 우리의 땀의 열매도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온유는 전적으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온유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자아를 지배하고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실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열매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이루시려면 우리는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주장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를 원하면서 삽니다. 너그럽게 살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등산도 가고, 여행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느긋하게 마음 편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침부터 동분서주, 하루종이 세상에서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들은 자식들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나만 이렇게 있을 수 있나?’ 그래서 뒤떨어질세라 경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경쟁률이 높아지고 고액과외도 나오고 족집게 과외도 나오고 . . 불안해서 그런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영어회화, 컴퓨터 . . . 불안감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격이 조급해 집니다. 여유와 너그러움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온유함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문제입니다. 보통 세상 기준은 사위를 구하든 며느리를 구하든 자기 체면과 가문을 생각하고 구합니다. 자랑하고자, 드러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뭔가 큰 기쁨이 있을 때 상대적으로 작은 일에는 너그러워지고 양보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양보할 수 없고 분명히 짜증내고 다투었어야할 일도 다른 큰 기쁨을 가져다 준 일이 있을 때 그 기쁨 때문에 짜증내고 다툴 일도 양보해 버리는 여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안에서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은 온유합니다. 반대로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발악(?)을합니다. 살아남고자 . . .

성령 충만이란 이렇게 배추가 푹 절여지듯이 우리가 성령 안에 잠겨서 철저하게 성령의 주장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면 나를 새롭게 빚으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지배로 온유해 진 사람들은 순종합니다.

3. 온유한 자는 순종하는 자입니다.

온유함은 자기 스스로 훈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온유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순종하고 정말 내 생각과는 다르고 내 뜻과는 다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아멘으로 받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속에 수많은 죄악으로 말미암아서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지만 내면적인 갈등이 일어나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참 부드럽고 온순한 성품을 가진 것 같은데, 그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죄의 욕망과 탐욕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속 부딪히고 순종하지 못하고 아멘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유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4. 온유한 자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온유’의 반대말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는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요, 그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서 온유를 말할 때 겸손과 관용이란 말이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 보통입니다.

1912년 4월14일 밤 11시40분, 엄청난 참사가 북대서양에서 일어났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말의 의미는 ‘가라앉지 않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배라는 것입니다. 왜 가라앉지 앉느냐 하면 보통 배들은 아래층이 통짜인데 타이타닉은 아래층에 다 칸칸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배에 구멍이 나면 그 부분만 물이 차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빙산에 부딪혀 1,500여명의 목숨과 함께 가라앉았던 것입니다. 이 배는 처녀 항해를 한지 겨우 4일 17시간 30분만에 가라앉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5. 온유는 주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온유하다라고 할 때.받는 느낌이 무엇입니까? 그저 순하고 온순하고 힘이 없고 때로는 좀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11:29절에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주님의 온유한 모습을 벧전2:23-2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이 모습을 마음에 담고 우리도 주님처럼 행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자 배신자 가롯유다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뭉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유다가 다가와서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이것이 신호가 되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 뜨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검을 도로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이 왜 힘이 없으십니까? 예수님이 왜 능력이 없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완전히 이루기 위해서 참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참 대단한 힘입니다. 대개 힘이 없는 사람은 지혜를 내서 살아가게 되어있고 힘이 있는 사람은 머리를 쓰려고 하지않고 힘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힘도 있고, 지혜도 있습니다. 그러니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유하실 뿐만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그 온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 온유한 자들이 다 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온유한 사람들이 다 복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요셉도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변덕을 부렸던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들이라고 별명을 들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훈련받고 변화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12:3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실수라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구스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나아가 이 문제 뿐 아니라 모세의 지도력 자체까지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들었습니다. 이제 가까운 형제들에게까지 심한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저들에게 직접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저들을 따뜻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모세도 본래는 혈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훈련시켜 주시고 다듬어 주셨습니다.
아직도 혈기가 살아있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다듬어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를 망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성품으로 변화시켜 주실 때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 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4-5)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로 알고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는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종살이 할 때는 주인에게 순종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는 간수에게 순종했습니다. 그가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는 왕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온유함으로 복을 받았고 땅을 넓혔습니다.
다윗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형을 만나러 갔다가 골리앗을 이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김을 당하여 엔게디 골짜기에 있는 굴속으로숨어 들어갔을 때 마침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다가 용변이 보고 싶었던지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부하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그때 다윗 왕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는 사울의 옷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삭은 좀 모자란 듯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힘써 판 우물을 다른 사람들이 달라고 하면 두 말 없이 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복을 주었습니까?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창26:12-14) 구약에 등장하는 최대의 갑부는 욥인데 그 역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이 말은 야베스의 복처럼 “복에 복을 더하사 그 지경을 넓혀준다”는 말입니다. 사업의 지경도 넓혀 주십니다. 인격의 지경도 넓혀 주십니다. 모든 지경을 넓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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