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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홍해 앞에서 (출 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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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학생이 신학 교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교수님이 대뜸하는 말이 "너의 뜻에서 멀어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설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뜻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분을 만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기 때문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능력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 부분은 아직도 자기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속에 갇혀서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불안의 장애를 가지고 밤낮 없이 시달리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부딪히고 다루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 대부분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는 불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내일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무슨 일이 기다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아무리 총명한 부모라도 내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들려오는 소문들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요즘 북한 핵의 향후 전망을 가늠해 보면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앞으로 경제가 잘 풀릴지 아니면 더 늪으로 빠질지 아무도 진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점에서 불안이란 연약한 우리가 평생 함께 걸어가야 할 반갑지 않은 길동무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불안과 염려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오늘도 겨우겨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애굽을 떠나던 날-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적인 감격의 체험이었을까요? 그 지긋 지긋한 430년 동안 애굽에 매였던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그들은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 땅을 벗어나자마자 이들 앞에 상상도 못한 홍해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14장3절에 보면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꼼짝 달싹할 수 없는 벼랑에 서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절망의 환경 앞에 이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느냐?" 따집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절규는 홍해의 파도보다 더 거칠게 온 땅을 진동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바로 군대의 칼에 찔려서 죽는 것 밖에는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는데 이제는 은혜 받고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이와 같은 홍해를 만날 때 답답하지 않습니까?

공포의 순간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원망도 불평도 분노도 터뜨립니다. 그러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순간에 홍해를 가르셔서 죽음의 막다른 길로 여겨지던 홍해를 생명의 길로 바꾸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왔던 바로의 군대를 오히려 물속에 수장시켰습니다.

더 이상 살아날 방법도 희망도 없었던, 그래서 불안 속에 있던 저들이 홍해를 건너서 다시 소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11:29절에 보게 되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것을 믿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믿음 때문이었다면 그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쫓기는 삶, 그러나 돌파구 없는 홍해를 앞두고 어떻게 할 줄 모르며 두려워하는 그것이 오늘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그 현실을 이겨낼 수 있었던 믿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첫째 성경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테반은 사도행전에서 이 출애굽 백성들을 향해 "광야교회"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과거에는 우리 모두가 교회 성장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진 것 사실입니다. 또 그것은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장도 중요하지만, 그 교회가 건강한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 사실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인이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신앙인,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한 자기 확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교회인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출애굽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는가? 우리가 정말 본받고 싶은 건강한 교회였는가에 대해서는 긍정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건강한 교회'였느냐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대답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행복한 교회"였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가까이에서, 그만큼 구체적으로, 그만큼 놀랍게, 그만큼 직접적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신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고, 말씀하시고, 품에 품고 사랑하셨다는 점에서 그 교회는 참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도 그러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 교회는 참으로 행복한 교회였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만큼 선명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들만큼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한 교회가 없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누린 교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고 계시는 교회였습니다. 고개만 들면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친히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들려주시던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던 상황입니다.

광야교회는 이렇게 행복한 교회였으나 "행복을 누리는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축복은 받았으나 그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넘어지고, 작은 문제 앞에서도 방황하고, 작은 장애물 앞에서도 불평을 토해 놓았던 교회였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생생한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심약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걱정하십니다. 13장 끝 부분에서도 그렇고, 14장 첫 부분에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이 나옵니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인 블레셋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신 것도 그들은 연단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홍해 앞에 세우심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건을 통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한 사건 안으로 몰아넣고 계셨습니다.

보세요. 이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인 만남이 없으니까 문제 앞에 출14:11,12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의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게 노라"그들이 고통과 고난 속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감정이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기억하게 되었습니까? 자연스럽게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두려운 현실 앞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는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본문 13,14절에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들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찌니라." 모세는 하나님과 또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시는 그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홍해 앞 그 절망감 속에서 부르짖는 분들이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나약함과 실패의 기억이 계속해서 내 삶 속에 끓어오르고 있습니까? 이제 그것을 중단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나를 무시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 내 속에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원망과 불평과 좋지 않은 기억들을 그만두십시오. 그 생각이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중단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십시오. 오늘 모세가 말하는 것처럼, 잠잠히 조용히 기다리라는 말씀을, 그리고 끊임없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한 생각들을 중단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기대가 무엇인지, 약속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선하게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해 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권고입니다. 주님의 음성 앞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방황하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백성 앞에 모세는 선포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대신해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신해서 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손에 꽉 잡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빗나가지 않도록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닮은 자가 되기까지 철저하게 간섭하시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눈물도 감사해야합니다. 나의 성공도 감사해야합니다. 나의 실패도 감사해야합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부르시기 위한 손길이었고, 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손길이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야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것을 창세 전에 아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인도하시는지, 어떻게 당신의 그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 버리시면서 까지 나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 하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하신 주님께서 지금 나의 처한 이 고통을 아실텐데 왜 침묵하시는 것처럼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왜 이런 문제에 빠져 고민하고, 절망해야합니까? 왜 내가 이런 질병에 시달려야합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이 방법이 아니면 내가 더 성숙할 수 없기에, 지금은 아프고 힘들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문제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 문제를 붙잡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향한 신실하신 주님을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거기에 홍해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심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던 절망과 고통의 상징인 홍해가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위협하던 것들이 결국은 구원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 홍해를 건넌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 16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말씀과 생각은 행동을 전제로 한 단어입니다. 어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따르는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믿음을 가지고 그 음성을 따라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홍해를 건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만해!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야. 이제는 내가 네게 한 약속을 따라 나아가야 할 때야.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가 아니야.'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성경 주석가인 맥킨토시는 홍해는 일순간에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차츰차츰 점진적으로 갈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하나님은 결코 한번에 두 걸음을 안내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내가 한 걸음을 내디뎌야만 다음 걸음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한꺼번에 모든 길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한가지씩 순간순간 인도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서 승리의 길로 갔지 한꺼번에 승리하는 길로 인도해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한 걸음씩 인도하실까요? 그것은 우리를 가장 잘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조급한지 몰라요. 한국인의 의식구조라고 하는 책을 쓰신 이규태씨의 글 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사람의 성품 중에, 의식구조 속에, 그 체질 중에 고쳐야 할 것 하나가 있다, 고 강조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쿼터리즘'입니다. 쿼터라는 말은 15분이라는 말이에요. "15분 주의"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정에 성숙하지 못하고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너무 초조해. 꼭 뭐든지 15분밖에 못합니다. 아침 신문 보는 거 자세하게 논설도 읽고 해야 하는데 큰 글자만 대충 읽습니다. 침착하게 오래오래 생각을 하고 그러지 못합니다. 그분이 지적한 대로 유원지에서 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보아도 놀이터에 어떤 놀이기구에 앉아서 노는 아이들을 보아도 가만히 보면 5분밖에 안 놀아요. 5분 있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어른들은 15분 얘들은 5분. 이렇게 초조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즘에 "느리게 사는 비결"이라는 책도 나오잖아요. 좀 느리게, 느긋하게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속전속결, 바로 거기에 우리의 인간성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문제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가는데 왜 이렇게 조급해요? 조금 일이 잘되면 감사하고, 찬송하고, 조금만 안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종잇장처럼 벌컥벌컥 튀어요. 조급한 마음, 이것이 이렇게 원망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대표적인 영화사 중에 하나인 PARAMOUNT PICTURES라고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여기 회장님은 여자 분입니다. '쉐리 랜싱'이라고 하는 분인데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많은 수고를 해서 회장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유명한 랜싱 회장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그 회사원들을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과정을 즐겨라. 그리고 성공을 염려하지 마라." 성공할까 실패할까, 이거 두려워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과정 자체를 즐겨라 이 말이죠. 과정 자체 속에 우리의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어야되고,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빠른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훈계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비록 홍해 앞에 서 있고, 바로의 군대가 나를 추격해 와도, 오늘 비록 어려움이 있고 환난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세우셨으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새롭게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감격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가면 살아 계신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찬양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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