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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든지 아니 듣든지... (겔 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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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에스겔서 3장은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장면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듣고 가서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받은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듣는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  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귀로 듣는것 보다 마음으로 받는 것을 먼저 언급하였습니다.
  외적 청각 기관인 귀로 듣는 것보다 먼저 마음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 6:63절에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딤후 4:3-4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말씀을 듣는 태도에 있어서 아주 잘못된 모습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 욕심을 채워줄 말만 듣는 다는 것입니다. 즉 귀를 즐겁게 해줄 말씀만 듣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들으면 안 됩니다.
  귀로 들어도 마음으로 받지 않으면 그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귀에 들리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귀로 듣는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만 추구합니다.
  듣기 좋은 칭찬이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식의 설교는 잘 들어오는데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책망하는 설교는 본문에 입각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딱딱하게 느껴지고 듣기 싫어진다면 그것은 귀로 듣는 설교입니다.
  설교는 마음으로 즉 영으로 들어야 합니다. 영으로 듣는 설교는 그 말씀이 주는 의미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회개와 진정한 신앙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마음으로 듣는 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수용적 태도를 갖는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대한 수용적 태도는 신앙 생활을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온갖 신령한 복을 누리게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구조는 성경의 말씀에 대하여 수용적인가 거부적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수용성이 높은 심리구조를 가진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회복하여야 은혜를 받고 믿음이 생깁니다.
  고후 1: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들을 때 “예” 하는 수용적인 태도는 말씀에 대하여 “아멘” 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수용성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말씀을 전파하는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은 사람은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어떻게 전하라고 했습니까? “듣든지 아니듣든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라는 말은 막무가네로 상식을 벗어난 방법도 동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에스겔 선지자 시대의 사람의 마음은 완악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에스겔 3장 7절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쁘다고 얼굴을 돌리고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열심히 전도하라는 적극적인 자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의 마음상태를 안다면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이 굳어져서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텃밭 일구기를 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엎습니다. 돌덩이는 제거하고 잡초는 뽑아냅니다. 딱딱하게 굳은 흙을 쟁기로 갈아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씨를 뿌립니다.
 
  오늘 날 세상 사람들 즉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불신자들의 마음의 밭도 굳어질 대로 굳어졌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돌덩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가시가 그들의 마음에 우거져 있습니다. 그곳에 무조건 전도한다고 해서 다 열매맺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씨를 뿌린다고 다 싹이 트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돌덩이를 제거하고 가시와 같은 잡초를 제거해야합니다. 그리고 딱딱해진 마음들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들의 딱딱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을까요? 복음의 텃밭을 일구어야 복음의 씨가 그 위에 떨어질 때에 싹이 트고 자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 밭을 옥토와 같이 부드럽게 일구어 내어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하신 마태복음 5:16절의 말씀은 암송용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떻게 딱딱해진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좋은 방법을 일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의 어두워짐을 밝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비결이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의 착한 행실로 텃밭 일구기를 하여야 합니다.
  선한 행실은 오히려 백 마디의 설득하는 말보다 더 설득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 양정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타내야 할 착한 행실은 세 가지입니다.

  ❶ 친절함과 ❷ 정직과 ❸ 헌신 즉 봉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친절 합시다.
  불신자들에게 친절하면 그들의 사람들의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녹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열심히 그들에게 듣든지 안 듣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정직하고 자신의 양심에 대하여 정직하며 사람들에 대하여 정직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칭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섬길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존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우리의 전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듣든지 아니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말씀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전달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했습니다.
  내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듣고 안듣고는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그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살고 죽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라는 말에는 최후통첩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최후로 들으면 살고 안 들으면 그대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최후통첩은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번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최후 통첩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를 보내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까지 보내었지만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십자가로 이루신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복음마저 듣지 않으면 이제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 3:18절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심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에 인생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이 있습니다.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이요 믿지 않는자는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시대의 희망의 소식입니다. 생각이 굳고 완악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과 소망을 주는 말씀이 복음입니다.

  김재진 씨가 쓴 시 한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너를 만나고 싶다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는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다가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 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 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는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어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 글을 읽으면서 시인이 만나기 원하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그런 사람” 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는 하나의 꿈 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그런 꿈들이 현실에서 자신에게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만나고 또 헤어집니다.

  욕심에 찬 만남은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와 허무와 눈물만을 남겨버리고 잘못된 만남으로 인해 생기는 생채기가 두려워 사람들은 마음을 꼭꼭 닫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홀로 쌓은 아성(我城) 에서 고독의 축배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행복한 만남을 소개하는 한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 시대에 이렇게 확실한 부르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쉼은 마음에 있습니다.
  짐이 무거워도 쉴 수 있습니다. 환경이 나빠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쉼과 행복은 느끼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며 먼저 구원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를 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착한 행실의 빛을 발하며 전합시다. 영상 하나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창(槍)의 끝” (end of the spear) 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라틴 아메리카 에쿠아도르 아마존강 유역에 사는 ‘와다니’ 부족은 창을 잘 쓰고 용맹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수(復讐)입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아들이 갚아야 합니다. 복수를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선이요 정의였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서로 죽이는 피의 악순환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에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결국 와다니 족은 서로 죽이다가 멸종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마존의 울창한 밀림 속으로 들어가데 예쁘고 젊은 아내의 남편이며 사랑스런 두 아이의 아버지인 선교사 네이트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영상 .....(다음 대사가 있는 화면 그리고 녹색바탕의 설명이 끝날 때 까지 영화의 장면들을 영사할것 ...)

  “와다니 족이 공격하면 아빠는 방어하실 거죠. 아빠는 총을 쏠 건가요?”
  “아들아 우리는 와다니 족에게 총을 쏠 수 없단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되었잖니.. 우리는 준비가 되었지만 ...”

  아들 스티비는 아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이룩하는 경비행기 뒤를 쫓아 달립니다.
  젊은 선교사 ‘네이트’ 는 동료 세명의 선교사들과 함게 비행기로 정글 깊숙한 강가의 모래톱에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부족 사람들과 대화가 될 것 같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와다니족 청년들이 창을 들고 순식간에 달려들어 선교사들을 살해합니다. 창에 맞은 네이트 선교사는 허리의 권총을 빼들었지만 자신을 향해 창을 던진 그들을 향해 겨누지 않고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결국 순식간에 젊은 선교사 4명이 다 쓰러졌습니다. 

  와다니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나무벌족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경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남편이 와다니 부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 무참하게 살해당하자 그 부인들이 나섰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살해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정글속 마을로 들어갑니다.

  선교사 부인들이 부족 마을에 들어갔을 때 선교사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키드’라는 청년이 “나무벌을 타고 온 남자들은 우리에게 왜 총을 쏘지 않았지?” 라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찔려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복수 하지 않으셨다 그럼으로 그를 찌른 사람들이 후에는 옳게 살게 하려고 그러셨다” 라고 대답합니다.

  결국 와다니 족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처절한 복수의 악순환은 끝나고 말 그대로 더 이상 복수의 창을 쓰지 않는 부족이 되었습니다.
  창의 끝이 온 것입니다.
  부족 전체에 평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네이트 선교사와 아들 스티비 사이에 나눈 대화가 제 가슴을 계속 때리고 있습니다.

  헌신 없이 복음이 전파될 수 없습니다.
  헌신이 없이 교회도 부흥할 수 없습니다. 유치부 성경학교가 지난 금-토일로 마치고 이제는 유. 초등부 및 중고등부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군들을 찾으십니다. 108명의 교사들과 기도와 물질로 지원하고 후원하는 모든 교우들의 헌신으로 교회는 부흥하고 우리교회 발전과 주님의 소원인 땅 끝 선교의 비전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같이 일어서서 헌신의 찬양을 부릅시다. (주제찬송)
  그리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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