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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면하여 말하는 기쁨 (신 5:4~6, 요이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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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심리학자가 10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외관상 혐오스러움, 특히 얼굴의 흉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지원자들을 서로 보지 못하게 떨어져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분장사는 지원자의 얼굴에 추악한 흉터를 분장하여 지원자들로 하여금 거울로 직접 보도록 하였습니다. 지원자들이 병원 대기실에 앉아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게 합니다. 대기실로 가기 직전에 분장사는 지원자에게 파우더를 발라주는 척하면서 흉터를 다 지웠습니다. 물론 지원자들은 지운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지원자들이 대기실에서의 경험을 얘기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하면서 한결같이 무례하고 자신을 피하고 흉터만 바라보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에 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가 자신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평가하게 됩니다.

  또한 얼굴은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체의 일부분입니다. 얼굴은 인격이며, 성품이며, 마음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가 났다, 기쁘다 하는 것을 얼굴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은 참 힘듭니다. 그래서 전화할 때는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얼굴 대하면 얼굴이 얘기하고 표정이 얘기하는데 전화로는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오해하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만나서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보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의 어원은 ‘얼’ 바로 정신적인 것 그리고 ‘꼴’ 모양새라는 뜻으로 바로 정신적 모양새를 뜻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얼굴은 ‘얼이 들어 있는 굴’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얼굴은 얼이 들어 있는 곳입니다.

  링컨이 대통령 재임 시절에 절친한 친구로부터 어떤 사람을 소개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재주가 비상하니 한 번 일을 시켜보게.” 링컨은 그 사람을 쓰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왜 그 사람 쓰지 않았는가?” 친구의 말에 링컨은 “사람은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얼굴을 다듬어가는 것은 내 몫입니다. 얼굴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다 씌어 있습니다. 우리의 표정관리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는 “얼굴보고 이름 짓자”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다 나타나 있습니다. 보톡스 주사를 맞고 눈가의 주름을 없애도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뱃살은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얼굴은 자신의 모든 성격과 감정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얼굴’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얼굴을 붉히다”라는 말은 감정의 표정을 의미합니다. “무슨 얼굴로 다시 만나겠는가”라는 말은 처지와 체면을 뜻합니다. “정계에 얼굴이 넓은 인물이다”라는 말은 개인의 평판이나 지명도를 의미합니다. “연예계에 새 얼굴이 많이 등장했다”라는 말은 두각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표지는 책의 얼굴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주된 부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얼굴’이란 말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감추고 계셨습니다. 출애굽기 33:20에는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자신의 얼굴뿐만 아니라 온 삶을 다 보이십니다. 요한복음 14:9에는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요구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인격적 관계, 대화의 관계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얼굴을 대하는 대면의 관계로 변한 것입니다.

  존 템플턴의 ‘열정’이란 책에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표정은 그 이상입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의 표정은 온갖 마음의 것을 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속담에는 “질투는 천의 얼굴을 가진다”고 합니다. 얼굴 그리고 얼굴의 표정은 그 자체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영향을 미칩니다. 요한이서의 결론을 통하여 은혜의 말씀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대면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요한은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할 말이 많고, 쓸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노인과 아이의 차이 중의 하나가 노인은 종일 아무 말 없이 지내고, 아이는 종일 조잘거리며 지낸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들려줄 말이 많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의 깊은 사랑이 묻어 있는 말입니다. 교회에 한 마디라도 더 들려주려는 늙은 사도의 애정이 넘치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 틀림없습니다.

  요한이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써도 얼굴을 대하여 하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10계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613개의 작은 계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최초로 분류한 사람은 중세 유대 랍비 사상가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였습니다. 그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전부 분석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 법 248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법 365개를 만들었습니다. 248은 사람의 몸을 이루는 모든 부분의 총합입니다. 365는 1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습니다. 주실 명령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세밀하게 명령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등의 거창하고 큰 법만이 아닙니다. 레위기 19:27에는 “머리 가를 둥글게 깍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레위기 21:5에는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발사가 할 일까지도 다 일러주십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심하게 권고하십니다. 다음 성경들에서 ‘다시’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0:7에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1:9에는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4:4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에서 반복해서 말할 만큼 얼마나 간절한 말씀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 절인 21:25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기록된 것 외에도 많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에 기록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흔히 잔소리라고 하는데 잔소리는 굉장히 중요한 소리입니다. 어른들이 잔소리가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잔소리가 즐거워야 하는데 이게 방해가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을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설문에 보시면 엄마가 공부하라고 잔소리할 때가 40%로 제일 많습니다. 시험결과나 성적이 나쁠 때가 35%입니다. 친구랑 싸우거나 사이가 나빠졌을 때가 13%입니다. 엄마랑 아빠가 싸울 때가 12%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 받으면 보통 어떻게 해소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특별한 해소방법이 없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잔소리에도 그렇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특별한 해소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 안 받는 방법은 있습니다. 잔소리를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와 사랑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많은 말씀이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의 잔소리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한은 “오히려 너희에게 대면하려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글로 쓰는 것보다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훨씬 많이 할 수 있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대면하여”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입과 입을 대하여”(스토마 프로스 스토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종이와 먹”이라는 말에 대조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글로 쓰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만 얼굴을 보면 할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는 자체가 이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서는 얼굴을 보면서 하려고 글은 짧게 써서 짧은 서신입니다. 얼굴을 보는 것으로도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로마서 1:11에는 바울이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4에는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 보기를 심히 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 원하는 바울의 사랑과 소망의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는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은 기쁨이요, 확실한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어도 봐야할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를 들으면 더 얼굴을 보고 싶어집니다.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말입니다. 그래서 할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보면 모든 말이 필요 없기도 합니다.

  창세기 45:28에는 야곱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합니다. 살아있다는 소식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서 얼굴을 봐야 합니다. 고등학생 때에 납북된 김영남씨가 28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살아있다 소식 아니라 가서 직접 얼굴을 확인한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을 쳤습니다. 미술 시험인가 봅니다. 문제가 “할머니 생신입니다. 할머니께 드릴 카드를 예쁘게 그려보세요”입니다. 그 아이는 답에 ‘삼성카드’라고 신용카드를 그려놓았습니다. 아이들의 생각도 점점 돈인가 봅니다. 가장 좋은 것이 돈이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얼굴입니다.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은 “인생의 90%는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풍속도는 얼굴 도장이 아니라 온라인 도장이 더 많습니다. 얼굴을 대하고, 가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바쁘다는 핑계로 청첩장에도 온라인번호를 적어서 보내고, 축의금도 부의금도 우체국 전신환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얼굴 없는 삭막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지난 주일이 서울노회 신광교회 창립 60주년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계시던 백상규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가신 교회인데 목사님이 지금 공부 때문에 미국에 가고 없어서 제가 그런 관계도 있고 해서 갔습니다. 제가 축사를 하게 되었는데 첫마디로 “나 떨고 있니?” 그랬습니다. 백 목사님이 우리 교회 사임할 때 “우선 일차 목표가 연동교회보다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 그날부터 잠을 못자고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떨 사람입니까? 그냥 듣기 좋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축사가 끝나고 나니 교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니 백 목사님 사모님이 제게 심각한 표정으로 “신광교회가 성장되면 연동교회도 잘 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는 겁니다. 농담이 아니더라구요. 진짜 떨게 되었습니다. 저를 소개하는 그 교회의 장로님께서 제게 영상 축하 메시지를 부탁했는데 영상이 아니라 직접 오겠다고 하셨다고 하면서 온 교우가 기뻐했습니다. 축하 화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축하꽃다발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축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얼굴을 보이는 것입니다. 얼굴은 어떤 것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연예계에서는 ‘얼짱’과 ‘몸짱’에 이어 ‘동안’이 유행했습니다. 이제는 ‘쌩얼’이 대세라고 합니다. ‘쌩얼’이 뭐냐 하면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을 뜻한답니다. 이런 대세는 연예인은 물론 일반에까지 널리 퍼진 맨 얼굴 열풍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화장품회사가 큰일났지요? 세계 여러 굴지의 화장품 회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화장품 판매가 성공하면 세계 어디에서도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화장품 신상품 시험 무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원래 외모에 관심이 많잖습니까? 그러니까 화장품이 잘 팔리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들끼리 하는 얘기를 옆에서 들어보니 “우리 나이에는 화장이 생명이다” 그러자 “맞아” 그럽디다. 그러면 화장품은 생명줄입니까?

  우리교회는 이미 ‘쌩얼’ 다 했잖아요? 40일 특별새벽기도회 때 화장기 없는 얼굴로 40일을 봤는데 좋데요. 어떤 분은 잘 못 알아보겠는 분도 있긴 합디다. 그래도 특별새벽기도회 며칠 지나고 은혜 받고 나니까 화장 안 해도 새벽마다 얼마나 즐거웠습니까? 생 얼굴 보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을 다시 쓰신다고 합니다. 너무 사람들이 성형을 많이 해서 알아보지 못해서 다시 만든다고 합니다. 화장이 지나쳐 분장도 하고 변장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맑고 깨끗한 본래의 얼굴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국인은 세계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민족입니다. 피부가 모든 나라에 다 맞습니다. 음식도 못 먹는 게 없습니다. 입도 세계 모든 발음 다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제 ‘한국의 평화’, ‘Pax Koreana’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얼굴은 누가 봐도 좋아한답니다. 조금 피부가 검은 사람은 흑인이 자기 친구인줄 알고, 얼굴이 조금 흰 사람은 백인이 자기 친구인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 얼굴은 가장 유리하다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목적은 예배드리는 자들의 얼굴을 변화시키는데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하면 얼굴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됩니다. 얼굴만 봐도 기쁨이 충만합니다. 부부도 함께 살면 얼굴이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데도 얼굴이 변치 않는다면 문제이겠지요.

  왜 얼굴보다 이름을 더 빨리 잊는지 아십니까? 왜 인용문 자체는 잊어버려도 인용문이 페이지 어디쯤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되는 걸까요? 영상기억이 문자기억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편지보다 얼굴이 기쁜 이유입니다. 얼굴을 대하는 것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입니다. 얼굴을 대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람은 돈이 없이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무재칠시(無才七施)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시(身施)입니다. 몸으로 돕는 일입니다. 둘째는 심시(心施)입니다. 마음을 함께 하여 돕는 일입니다. 셋째는 안시(顔施)입니다. 편안한 얼굴과 웃음으로 대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안시(眼施)입니다.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아 주는 일입니다. 다섯째는 언시(言施)입니다. 좋은 말,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 따뜻한 말을 해주는 일입니다. 여섯째는 상좌시(狀座施)입니다. 남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일입니다. 일곱째는 방사시(房舍施)입니다. 내 집의 빈방에 하룻밤을 편하게 재워주는 일입니다.

  편안한 얼굴과 웃음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서 아무 말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여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사실은 위로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얼굴과 가슴이 다가가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4에는 장래 천국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찬송에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 얼마나 좋으랴”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대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보기만 해도 좋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최상의 기쁨을 누리는 소망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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