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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눈싸움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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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기적 동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한 사나이가 호텔 수영장에서 물 위를 걷는 쇼를 펼칩니다.
마술이었습니다. 

이런 속임수 말고 진짜로 물위를 걷는 동물이 있습니다. 중앙아메리카에 서식하는 바실리스크라는 도마뱀입니다. 이 도마뱀은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예수도마뱀이란 이름도 갖고 있습니다. 이 도마뱀은 1 초에 20 번을 움직이면서 물을 걷어찹니다. 발이 물을 밀치면서 생긴 반발력과 깊은 구멍 모양의 공기 주머니 때문에 순간적으로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이 물위를 걸으려면 어느 정도 달려야 할까요? 한 물리학자가 계산했습니다. 시속 100 Km의 속도와 현재보다 15 배 강한 다리 근력으로 물 위를 달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현재 인간의 몸 상태로 물 위를 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녀 쉬질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빈들에서 마음을 추슬러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시간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즉시 기도시간을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 22 절에 ‘즉시’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혼자 남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돌려 보내셨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순순히 돌아갔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그 자리에서 병이 낫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기적의 여흥이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돌아가란다고 순순히 돌아갑니까?

요한복음에는 아주 재미있게 그 내용을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 6:15>

사실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더 극성을 부렸습니다. 이젠 아예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무리에게 붙들리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이런 낌새를 알고 산으로 도망했다고 했습니다. 산으로 떠나셨다고 적었지만, 사실 도망하듯 사라지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에 닿을 듯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잘 놓치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고 피곤한 중에도 기도하는 일을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을 베푸는 원동력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차츰 그 능력은 메말라갑니다. 기도는 능력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예수님 능력의 비결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 비결은 기도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한 간질병 소년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아이가 넘어지는 까닭은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꾸짖어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바로 나았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효험이 없는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녁 때 조용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8-29>

예수님은 바로 기도가 능력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능력이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요령이 없습니다.

지난 번 부흥회 때 많은 분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 집회 후에는 강사 목사님이 병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저는 그 분이 기도하는 모습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흥회 시작하기 한 주일 전에 식당에서 강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부흥회 전단지를 전해드리고, 집회 때 많은 은혜를 기대한다고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황 목사님이 은근히 부담을 준다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를 금식하면서 준비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체격을 보니 금식이 쉽지 않아 보여 그 말씀에 오히려 제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병 낫기를 원하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려면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낫게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이 기도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을 예측해 보십시오.

25 절을 봅시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예수님이 밤 사경에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밤 사경이면 새벽 3 시에서 6 시 사이를 말합니다. 날이 저물면서 혼자 산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9 시간은 족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밤을 꼬박 새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 위를 걸으신 것 또한 그런 기도의 능력입니다. 마태복음 14 장에는 모두 세 종류의 기적이 나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과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 기적입니다. 이 세 기적 모두 초자연적입니다. 일반 물리와 자연현상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런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물리 법칙을 달리 적용하십니다. 이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 체험은 오직 기도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사실 피곤할 때는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밤새 기도하신 까닭은 낮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라 분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만큼 피곤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 그 피곤까지 이겨내십니다.

우리 멋진교회 표어가 ‘예수닮기’입니다. 예수님을 닮자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의 이런 기도하는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기도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자!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배 위에서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거슬려 물결이 심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쪽에 헐몬산이 있습니다. 헐몬산 꼭대기는 사철 눈이 있을 정도로 높습니다. 북쪽에서 부는 찬바람과 갈릴리의 더운 공기가 만나면서 바람이 거세집니다. 이 바람은 갈릴리 북쪽의 협곡을 따라 붑니다. 그래서 북쪽에서 강한 바람이 자주 붑니다.

제자 십여 명이 탄 배라면 상당히 규모 있는 배입니다. 그런데도 풍랑에 시달렸다면 여간 센바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잠시 떨어져 있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님이 곁에 계시면 든든합니다. 사나운 풍랑도 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곁에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단체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긴급한 상황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도우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선택한 방법은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야할 정도로 긴급했습니다. 기적은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기적을 남발하지 않으셨습니다.

홍해 바다가 언제 갈라졌습니까? 앞에 홍해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뒤에서 애굽의 철병거가 쫓아 왔습니다. 양 옆으로 높은 산입니다. 골짜기 가운데 몰려 있었습니다. 꼼짝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한 밤중에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에 시달려 보셨습니까? 낮에 당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공포가 밀려옵니다. 바다는 시꺼먼 색입니다.

전에 바다에 배를 타고 밤낚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바다였습니다. 수면이 유리처럼 잔잔했습니다. 제가 탄 배는 4 명이 꽉 찬 작은 쪽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배가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그 바람에 큰 노을이 만들어지면서 배가 휘청거렸습니다. 처음 당해본 일이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곧바로 배가 뒤집히는 줄 알았습니다. 시꺼먼 물살이 집어삼킬 듯 일렁거릴 때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만나는 파도치는 밤바다는 아주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물위를 걸어 긴급하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의 행동은 오히려 제자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유령으로 보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소리치면서 무서워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즉시 내니 안심하라고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다시 한 번 즉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이 ‘즉시’라는 단어가 모두 세 번 나옵니다. 처음 22 절에, 지금 이 장면에서 27 절에, 마지막으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하시면서 31 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즉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행동이 결단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의 손을 내미실 때는 언제나 즉시입니다. 긴급한 구원에 머뭇거림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까? 즉시 기도하십시오. 즉시 도와주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놀라는 사이에 베드로가 가만히 보니 유령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니 희한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런 베드로를 보면 특이합니다. MBTI 성격검사를 해보면 ENFP 스파크형 같은 성격으로 나올 겁니다. 엉뚱하고 튀는 성격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자기도 물 위를 걷고 싶은 생각을 했을까요? 조금 전까지 풍랑에 휩싸여 죽는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풍랑 이는 바다에 내려 자기도 걷겠답니다.

요즘 ‘슈퍼맨 리턴즈’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있습니다. 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예고편 장면을 보니까 사랑하는 여인을 데리고 함께 하늘을 나는 장면이 있더군요. 처음에는 슈퍼맨을 붙잡고 하늘을 나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하늘을 날면서 얼마나 신났을까요?

베드로도 예수님을 의지해서 지금 물 위를 걷고 싶어 합니다. 엉뚱하지만 예수님은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엉뚱한 청을 허락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베드로의 믿음이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풍랑 이는 바다에 내려 설 수 없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예수님이 걱정 말고 바다에 내려 보라고 해도 못합니다. 첫 발을 내딛는 것은 엄청난 믿음과 담력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입니다. 마침 우기가 지나 요단강물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맨 앞에 법궤를 세웠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매고 넘실대는 요단강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에는 이미 갈라진 바다를 건넜습니다. 엘리야가 요단을 건널 때에도 겉옷을 강물에 내리쳐 가른 다음에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아직 강물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수아는 전진을 명했습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겁니다. 만약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 강물이 갈라지지 않으면 물에 휩쓸려 죽습니다.

이번에 강원도에 폭우가 내려 많은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 죽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무거운 법궤를 매고 넘실대는 강을 건너는 것은 엄청난 모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앞장 선 제사장들이 첫 발을 요단강에 내딛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강물이 홍해처럼 좌우로 갈라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겠다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승낙을 받고 물위에 발을 내렸습니다. 과연 베드로도 물위에 섰습니다. 베드로는 흥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향해 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의 능력은 믿는 자에게도 똑같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적은 언제나 믿음의 결과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들어 저 바다에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때로 엉뚱한 발상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물리적 현상과 자연적 현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하늘 계산법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야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믿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왜 빠졌을까요? 그렇게 센 믿음 같아 보였는데 효력이 몇 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본문 29 절부터 보겠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14:29-32>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잡아 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의심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처음에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내 의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기적을 겪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 스스로 놀라서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기적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베드로가 의심하게 된 원인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물에 빠져서 무서웠던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바람에 무서워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할 때는 바람을 무시했습니다. 물위를 걷는데 바람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 물위를 걸을 때의 장면을 자세히 봅시다. 29 절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걸을 때는 물 위를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바람이 부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고 밑을 봤습니다. 밑에 뭐가 보입니까? 시꺼먼 풍랑 이는 바다가 보였습니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몰려 왔습니다. 이 두려움은 주님을 바라볼 때의 믿음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믿음이 의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겪으면서 밑을 보았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아닌 자기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물위를 걷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심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믿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인데 왜 자기를 봅니까? 끝까지 주님을 봐야 합니다. 내 능력을 믿지 말고 주님의 능력만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과 의심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눈을 주님께 맞추다가 아래를 내려 보는 것은 잠간입니다. 아래를 보지 마십시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끝까지 주님만 바라봅시다.

여러분! 믿음은 이렇게 눈싸움입니다.

사단에 맞서서 눈을 내리깔면 지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싸우다가 꼬리를 내리거나, 배를 보이거나, 눈을 내리깔면 지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시선을 고정합시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좌우에서 별 소리가 들려도 주님을 보다가 거두면 안 됩니다.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승리합니다. 주님을 보면 기적이 일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건져서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은 승리와 평화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기도합시다.

믿음의 첫발을 내딛읍시다. 바다가 갈라지고, 문제가 쪼개집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면 놀라운 일이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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