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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기(1)-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자들의 당연한 발걸음 (삼상 17: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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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오면서 참 많은 실수와 실패를 했고 여러 가지 좌절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 나아가서는 과연 하나님이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어떤 도움과 해결을 주실까 하는 의구심까지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폭적으로 기대하지 못하고 내 상황과 비교해서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까지도 흔들리는 경우를 체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삶의 용기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하거나 혹은 내 능력 이상이거나 아니면 내 삶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들을 볼 때 당찬 마음으로 달려들어 내 삶과 한계의 지평을 넓혀 보리라는 각오대신에 위축되고 패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찌감치 포기하여 상처받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류의 역사라는 것은 항상 도전하고 삶과 역사의 장벽에 도전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룬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역사의 지평이 확정되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믿음의 백성들은 자신의 능력의 범위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용기에 근원을 삼아서 삶의 지경을 확장해 나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몇 주간 동안 특별히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몇 가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을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우리 입술에 많이 올리고 반드시 동반되어져야 할 일들을 습득하고 활용하고 생활화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우리는 더욱더 힘을 내서 여름철을 한 승리의 분기점을 삼아 한해의 반전과 그리고 또 한 번의 변환의 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늘 생각되는 몇 가지 단어들을 우리는 신앙적 이해와 실천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의 실제를 주는가는 같이 나누고 믿고 실천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삶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용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성도님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우는 전쟁터에 나가게 됩니다. 형들은 전쟁터에 군사로 뽑힘을 받아서 군사로 전쟁에 출전했지만 다윗은 나이가 어려서 군대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형들에게 전쟁터에 위문품을 갖다 주라고 해서 치즈 덩어리와 위문품을 바구니에 담아서 전쟁터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터에 가보니 의외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군사 이스라엘과 이방의 군사 블레셋 군이 대치를 하게 되는데 블레셋의 거인장수 골리앗이 우롱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능멸하고 조롱합니다. 그 골리앗의 기세에 눌려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런 소리도 못 내고 숨죽이고 있는 이와 같은 기막힌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의분을 느낍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와 같이 위축되어있고 이방신을 섬기는 블레셋 군사들은 골리앗을 위주로 하여 저와 같이 기승하고 있는가?’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마음속에 상심하고 오히려 의분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을 마음속에 작정을 합니다. 사울왕에게 고하여 다윗은 골리앗과 더불어 전투를 하려고 작정을 합니다. 이 사울왕이 다윗이 기특해서 그의 갑옷과 투구와 검을 주지만 다윗은 그것이 불편하여서 사용하지 않고 자기가 평상시에 사용했던 물맷돌 하나를 가지고 달려가게 됩니다. 마침내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가 시작됩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얕잡아 봅니다. 그리고 그는 그저 다윗은 한주먹에 날아가겠다고 생각하고 이와 같이 어그적 거리고 걸어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있는 힘을 다해서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가며 그의 물맷돌을 회전하여 날리게 됩니다. 그 물맷돌은 정확이 골리앗의 정수리에 맞고 골리앗은 그것으로 쓰러져 죽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으로 인하여 전쟁의 승리의 기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이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이 실제적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사건이 됩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전면적으로 부상하게 되고 그것으로 통하여 다윗이 왕으로 가는 고난의 행락이 시작이 됩니다. 즉 역사의 무대에 다윗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으로 시작하여 다윗은 고난 끝에 왕위에 오르지만 결국 이와 같은 귀한 기회는 다윗의 공적인 생애가 시작되는 서막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 속에서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서 이루어지는 다윗의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의 장면을 특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이 발휘했던 용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용기를 상실합니다. 이러저러한 실패 속에 자신의 좌절과 무능력을 생각하게 되고 많은 고통과 아픔가운데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와 같은 용기를 잃은 이런 세상 속에서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용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운 힘으로 살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용기의 근원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하나님의 이름과 역사가 가로막힘에 대한 의분 때문에 일어납니다.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주어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환란을 내가 이겨내고 견디어 내며 내게 주어진 여러가지 아픔들을 내가 반드시 이겨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이름이 능멸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이런 의분 때문에 우리는 용기가 일어나 그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경우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골리앗을 만나고 전쟁터에 온 것입니다. 아직 어려서 다윗은 전쟁터에 나갈 나이도 못되었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형들의 위문품 가져다 주기위해서 갔다가 결국은 골리앗과 만나게 되고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그의 삶을 통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그는 맹수들의 손에서 양들을 보호해 냈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힘을 길렀고 그는 물맷돌을 날리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도 승리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당연히 지금도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짐을 그냥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명이 생기면 용기가 생깁니다.

용기가 없다는 것은 내가 꼭 이겨야 할 당위성이 없을 때입니다. 승리에 대한 당위성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내가 이 일을 반드시 해야 되고 당위론적이고 필연적 사실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정말 평생 그렇게 몸이 언제나 건강하겠습니까? 자녀들 아침식사 준비해서 학교 보내고 여러 가지 가정 일 보시고 또 식구들 챙겨주시고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감동스럽습니다. 엄마가 좀 아프면 아이들이 세수하고 밥도 잘 먹고 학교도 잘 갔으면 좋겠는데 그런 아이들 세상에 별로 없지요. 그래도 엄마가 아파도 끝내 일어나서 깨우고 또 학교 보내고 그리고 겨우 모든 일 수습하고 겨우 드러누워 아플 수 있는 것이 아마 우리의 어머니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기 싫은 일, 하기 싫은 말, 어려운 일, 고통스러운 장면에서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물러나면 모든 가족들이 어려움에 빠지니까 물러서려고 해야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들도 무너질 수가 없고 끝까지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말 애쓰고 버둥질치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볼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으면 우리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기 싫은 일 하고 마침내 그것을 극복해서 해결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제가 오늘도 이러저런 생각을 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15년 동안을 설교를 했는데 아마 초창기부터 여러 번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15년 동안 주일을 따지면 거의 한 750번쯤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안식년 갔을 때, 일 년에 특별한 경우로 출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교를 한주도 아파서 쉰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님들께 굉장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건강했던 것입니다. 또 제가 설교 횟수를 살펴보니까 15년이면 대략 750번 정도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횟수로 따져보면 보통 5번 정도라고 해도 4000번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4000번 정도 되는데 한 번도 안 빠지고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 사실을 나중에 계산해서 생각을 해보니 정말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해 주셨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아픈 때 왜 없었겠습니까?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원고 쓴 것 하나도 빼지 않고 정확히 읽고 내려가야겠다고 하고 정말 집중해서 원고를 읽었던 적도 꽤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시나지 않게 성도들이 아픈지 모르게 표시나지 않게 4000번 동안 지내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참 감사한 것 같아요. 우리 성도님들이 기도해주시고 또 어려울 때 도와주셔서 아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고 감사합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설교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니까 아픈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하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수십 년 살아오셨잖아요. 그 기나긴 세월동안에 여러분 한 번도 숨 안 쉬고 산 적이 없습니다. 계속 숨 쉬고 살잖아요. 왜입니까? 숨 안 쉬면 죽으니까요. 우리는 당위론적으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숨을 쉬어야 하고, 그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꼭 이래야 돼. 이건 꼭 해야 돼”하면 그것을 합니다. 대부분 어떤 일을 못하는 것은 ‘못할 수도 있어’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돼 안되면 안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일을 반드시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 가운데 용기라는 것도 내가 일을 반드시 해야 된다는 마음의 사명이 있으면 용기 속에 그 일을 진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의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가 비굴하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투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용기가 있었을까요? 오늘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오지만 골리앗에게 외칩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어서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이 먹게 되며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인하여서 오늘 다윗은 용기를 가지고 그의 삶에 어려움의 장면을 극복하기 위해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의 삶에 어려움의 장벽의 극복이라는 것은 민족의 어려움의 장벽의 극복이었고, 개인사가 민족사로 확장되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그리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절대적인 신뢰, 그리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능멸당하는 것을 참고 볼 수 없는 의분, 이와 같은 것은 사람을 용기 있게 만들며 그 용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역사들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근거에 쌓아온 신뢰할만한 실력이 있을 때 우리는 용기를 발휘해 역사의 장면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다윗의 손에는 물매가 들려있습니다. 사울이 주었던 갑옷과 투구와 검이 아니라 물매가 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왕의 갑옷과 투구와 검을 가진들 그것이 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은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윗의 손에는 이제껏 사용했었던 익숙한 물매가 들려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적어도 물매를 던지는 능력에 있어서는 탁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 탁월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물맷돌 하나가지고 던졌는데 정조준되지 않고 맞지 못한다면 그저 한 순간에 골리앗의 손에 죽는 것입니다. 이 한 번의 던짐이 내 목숨을 결정하는 것이고 내 민족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아주 중차대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 있게 던졌습니다. 그 만큼 그는 자신 있었습니다.

우리 오늘 한 번 따라해 봅시다. “겸손함과 탁월함”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탁월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겸손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탁월하지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노력도 성령 충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충만하면 우리로 하여금 애써서 결국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탁월함만 있으면 우리는 그 탁월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함을 가지고 그 탁월함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사용되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한번 따라합니다. 평상시에 준비된 실력과 하나님의 시기가 적합하게 맞음으로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다윗이 물맷돌 던지다가 갔더니 우연히 맞았다가 아닙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에 우리가 읽은 본문의 전후를 보게 되면 다윗이 사울왕에게 고백합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게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나를 해하고자 하면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됩니다. 다윗은 여리 여리 한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사자와 곰을 맨손으로 쳐서 죽일 수 있는 괴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어렸지만 그는 괴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사자와 곰의 수염을 잡고 그를 쳐서 죽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을 열고 새끼를 꺼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다윗이 별로 힘없는 어린소년이 돌맹이 하나 던졌더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딱 맞아서 골리앗이 쓰러졌다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힘입어서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골리앗에게 가서 자신 있는 물맷돌 하나 던져서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민족을 구한 이야기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평소에 물매를 잘 준비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어느 날 우리에게 우발적으로 어떤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시켜서 그 은혜를 합당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능력도 없고 준비한 물매도 없는데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익숙한 것이 여러분에게 물매가 되고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모두다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찾아내고 그것을 발휘하여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능력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사울왕의 검과 갑옷과 투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사용했던 익숙한 물매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물매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자신이 있습니까? 베드로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울 때 “은과 금 내게 없지만 나에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적어도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그의 물매였습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 주어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그렇게 많은데 앉은뱅이 걸인에게 일어나라고 했는데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할 뻔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는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면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의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 손에 내 삶을 타개할 물매돌이 들려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때 내 삶을 나는 어떤 것으로 해쳐 나가는가, 항상 어려울 때 심지어는 잘못되어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의 긍휼을 자비로움으로 해결해 주셨고 앞으로도 해결해 주실 것이다. 믿기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결해 주시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게 최선일 것이다.’ 비록 내가 100점을 원했지만 30점, 70점을 맞아도 그것이 내게 최선의 가장 기쁜 일이니까 나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결과에 대한 기쁨으로 순응을 이룰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불만 속에서 언제나 좌절 속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100점을 원했지만 하나님이 70점 주셨으면 나는 최선을 다했을 때 그 70점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본보기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그 다음 2차적으로 이루실 일이 있다는 것을 기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 하나님에 대한 소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대,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물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역사의 지평을 향하여 도전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영적인 은혜의 체험들은 우리를 어려움의 장면에서 용기 있게 만듭니다. “전에 내가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양들을 구해냈고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하면 그들을 손으로 쳐서 죽일 수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저 괴수, 맹수와 같은 골리앗에게도 능히 이길 수 있다.”라는 마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순간 우리가 위축될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역사를 쌓아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승리의 체험들을 축척해 나가야합니다. 승리의 체험들이 하나둘 축적되어 나갈 때 우리는 승리의 구조를 알며 승리의 의식을 알며 그것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는 마음의 확신이 있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용기 있게 달려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골리앗을 향한 도전은 불확실한 도전이 아니라 자신 있고 당연히 승리할 수밖에 없는 용기 있는 도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목이 무엇이지요?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당연한 걸음입니다. 당연한 발걸음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용기,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자들의 당연한 발걸음”
용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용기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는데 내가 지금 왜 용기를 못내?’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면 당연히 다윗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골리앗은 산만했기 때문입니다. “이거 뭐 별 거 아니야.” 하고 어기적 거리고 나옵니다. 반면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실수하면 죽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확히 온 힘을 기울여 집중하여 그 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인하여 간구하는 것은 너무 귀한 것입니다. 집중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목사님과 전도사님들께 꼭 부탁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준비해서 첫 번째 만남에 반드시 감동을 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꼭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의 모든 것들을 준비해서 단 한 번 그 첫 번째 만남에서 감동을 주시지 못하면 우리는 모든 사역에 어려워진다고 꼭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어느 한 분을 만날 때 절대 그 분 외에 다른 분 얘기는 일절 하지 말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다른 집을 갈 때도 전화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해도 자동차에 타고 아무도 없을 때 전화를 하라고 말씀드립니다. 길어봐야 30분, 1시간 정도 되는 짧은 시간이니 ‘아, 와서 나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고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주시고 기도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 마음에 기쁨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아, 오늘도 여러 집 가니 그 가운데 나를 스쳐지나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에 실망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순간에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실행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어떤 필요한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집중적인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중하고 조심성있고 철저하게 준비하되 실행의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는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물매를 던져 실패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했을까요? 한 주먹에 죽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나라도 우리나라의 화랑관창 같은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소년이 담대하게 나아가 골리앗의 손에 죽었지만 우리가 소년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생각하고 군사들이 다 나아가 승리했겠습니까? 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벌 떨고 있습니다. ‘저 소년도 죽었구나’ 그리고 골리앗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다윗은 순교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는데 그 목숨 하나 던져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던 믿음의 인물로 남는 것입니다. 다윗이 손해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기있는 자로서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들이 있을 때 우리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용기있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간 묻혀있으니 그야말로 무기력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불렀을 때 “하나님 저는 정말 못하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광야에서 40년간 목동노릇을 했는데 이전에 왕궁에서 지냈던 것도 40년이 되면 달라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도 40년이 지나면 똑같겠습니까? 40년이 지나면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간 양이나 치니 모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모세가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하나님께 말씀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괜히 겸양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용기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목숨을 위해 바로의 궁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의 궁으로 가서 바로 앞에 담대히 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너희 모든 나라가 다 화를 입을 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담대히 선언한 것입니다. 부탁한 것이 아니라 담대히 선언하고 선포했습니다. 모세는 마음에 용기를 회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회복한 것입니다. 비난하는 백성들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서 오는 용기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포도주틀에서 밀을 밤에 조금씩 조금씩 몰래 곡식을 만들어먹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바알의 신당을 쳐부숩니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3만2천명이 모입니다. 하나님이 보내라고 하십니다. 300명을 남기고 3만1천700명을 이러저러한 시험을 통해서 보냅니다. 아무리 모래와 같은 수다한 미디안의 대군들에 비해 3만2천명이 적다고 하더라도 300명보다는 든든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드온은 마음에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 숫자가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에게 “나가라!” 하셨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믿고 그는 나아갔습니다. 결과적으로 횃불, 나팔, 항아리를 가지고 그는 자신있고 용기있게 나아가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승리한다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종살이를 하고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최선을 다할 때 언제든지 종살이 할 때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감옥에 있을 때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그리고 밖에 나와 왕궁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감옥에서도 간수장이 그에게 열쇠 자체를 다 맡겼습니다. 모든 일을 다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왜 내 인생은 이렇게 풀려갈까, 나는 어떻게 되는 일이 없어. 좀 열심히 해서 될만하면 또 이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보십시오. 사자굴에 던져져도, 풀무불에 던져져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주실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셔도 나는 변함없다.’ 그의 마음속에 용기를 가지고 죽음의 지경에서도 담대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담대하게 승리했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부딪힘이 있습니다. 가다가 넘어질 때도 있고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엘리야도 가다가 넘어지지 않았나요. 넘어지겠죠. 넘어지기 전까지 사용된 것만이 하나님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빛내었던 순간들이 아름답게 이어져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이루어졌던 그 순간들이 이어져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했던 부분, 그가 수고했던 부분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주님 앞에 쓰임받았다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넘어지고 침체될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용되는 그 순간이 감사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용기를 보겠습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입니다. 사울왕의 아들입니다. 그에게 왕의 기회가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너무 아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우정보다는 요나단이 하나님의 뜻을 간파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다윗쪽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와 정적의 관계, 자신과도 따지고 보면 정적의 관계이지만 다윗을 보며 그의 모든 것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는 왕이 되지는 못했어도 이스라엘 어떤 왕보다도 그는 훌륭한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용기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 뜻을 자신있게 이루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소신껏 그의 길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용기가 있으면 자신있고, 자신이 있으면 우리는 위축되지 않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에서 실수하지 않고 차근차근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청년공동체 수련회 제목을 ‘믿음의 인물로 우뚝서라’라고 정하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믿음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우리는 용기있고 자신있게 우뚝서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위축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우리는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담대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지만 사람들에게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기있게, 담대하게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뿐입니다. 우리는 비굴하게 살 필요 없습니다. 용기있고 담대하게 우리 삶의 길을 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자신있게 우리의 삶을 가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15년 전에 개척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5년 전 교회가 개척이 되었는데 교인이 저희 식구밖에 없었습니다. 몇 주 지나니 한 사람 두 사람 교인들이 등록하여 같이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예배당 평수가 32평 되었습니다. 30평 정도되는 교실을 하나 빌려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년이 되니 어른이 430명 정도 예배 드렸습니다. 1부, 2부, 3부, 4부로 예배를 드리고, 중고등학생 100명, 유초등부학생 100명, 그곳에서 일년 반 정도 예배를 드렸는데, 일년 반 되니 주일날 그곳에서 천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른이 650명, 주일학교, 중고등학교, 저녁예배까지 그 30평 정도되는 공간에서 천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잘 안 믿어지시지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좁은 30평 정도되는 교실에서 천명이 예배를 드렸을까 생각됩니다. 일년 반 정도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년이 되었을 때, 어른만 430명 정도 모였는데 굉장히 더웠습니다. 제가 서른세살에 교회를 개척해서 설교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 다음해에 서른네살이었습니다. 교회만 오면 사람들이 목사님 어디갔느냐고 물어보는 통에 제가 설교할 때 목사 가운을 입고했는데 여름에 너무 더워서 그 가운이 다 젖었습니다. 에어컨을 켜도 사람들이 많으니 소용이 없었습니다. 와이셔츠만 젖는 게 아니라 밖에 입은 가운까지 땀에 다 젖었습니다. 너무 더웠습니다. 겨울에 난방을 하지 않아도 춥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년 쯤 되어서 430명 정도 모이는데 지금 이곳의 부지가 363평 정도되는데 종교부지인데 저희보고 매입하라는 제의가 왔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1년 정도되었으면 교인들이 교회에 몇 개월 다녔겠습니까. 1개월, 2개월, 3개월, 4개월인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년된 교인은 저희 가정 식구밖에 없었습니다. 이해가 되시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등록한 지 한 달, 두 달, 세 달 되었으니 우리가 모여서 교회 지읍시다라는 얘기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된다 안된다 결정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결정을 하는데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되어도 근거가 있고 안되어도 근거가 있어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해보자고 생각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떤 근거에서 한다 안한다를 결정할까 기도를 하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광고를 해서 교인들을 다 모았습니다. “우리에게 예배당을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에 나온지 한 달 두 달 정도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도 없고 쉽지는 않지만 이런 제의가 있으니 결정을 합시다. 그래서 어떤 근거에서 그런 결정을 하느냐면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분당중앙교회가 개척해서 1년만에 예배를 드렸는데 앞으로 이 분당중앙교회가 장년교인 2천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교회라고 믿습니까? 그러면 교회를 짓자고 하십시오. 왜냐하면 장년교인 2천명정도면 이 정도 예배당 짓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앞에 있는 목사가 장년교인 2천명쯤 목회할 수 있는 목사라고 믿습니까? 이 두가지에 다 예스라고 대답하면 찬성하고 둘 중에 하나라도 no라고 생각하면 반대하십시오.”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손들어 보라고 하니 다 찬성하였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230 가정을 다 심방하며 미리 찬성하라고 얘기했으니까요. 그래서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결정하고 그 다음에 겨울 지나고 봄부터 창립 2주년 지나서 그 다음 크리스마스 때 이곳에 입당을 했습니다. 1주년 때 그렇게 짓기로 하고서는 3년 지나 정말 장년이 2천명 넘게 모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헌당은 쉽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가 그 때 나이가 서른네살 정도 되었으니 목사 안수 받은 지 3년밖에 안되었던 때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는 것이 있겠습니까? 설교를 해본 적이 있겠습니까? 교회 목회를 해본 적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별 것 아닌 것으로 하니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렇게 별 것 아니고 큰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크고 대단한 일로 여겨지지 않고 하나님이 용기를 주셨겠죠.
저는 요즘도 건물 짓고 이러한 것을 별로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여년전에도 개척해서 1년만에 이런 예배당을 지었는데 마음먹으면 그까짓 것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별로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자유롭습니다. 30평짜리 예배당에서도 주일날 천명이 모였는데 좁으면 좁은대로 충분히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무엇이든지 커보이면 못하고 작아보여야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장벽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고 마음이 위축되는가 아니면 별 것 아니고 하면 되겠다는 당연한 마음이 드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의 당연한 발걸음 당연한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큰 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앞에 있는 일들을 처리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냥 처리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별 일 아닙니다. 우리 앞에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게 되면 큰 일이 없어집니다. 놀랄 일도 없어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냥 처리해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주실 때 어떤 일이든지 커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어떤 어려움도 커보이지 않고 당연히 해결할 일로 보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육신의 질병이 다가와도 반드시 이것을 내가 승리하고 내가 반드시 투병하여 이길 수 있다는 마음의 확신을 가지셔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투병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난과 환란, 어려움을 당해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것을 극복하게 하실 것이라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면 그것은 언제나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저로 인해 지겹게 듣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천명을 좇으리니”라는 여호수아 말씀입니다. 요즘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똑같은 얘기를 10년간 노래를 부르면 문화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화가 되면 사실이 됩니다. 똑같은 얘기를 10년간 노래를 부르면 그것이 내 삶의 문화가 되고, 실제가 됩니다. 여러분 앞으로 끊임없이 듣게 될 것입니다. 지겹다 지겹다 하면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명을 좇을 수 있는 주의 성도들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하는 사람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천 명을 도울 수 있는 사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여러분 반드시 믿고 그렇게 하시면 그렇게 됩니다. 10년 후에 보십시오. 어떤 마음 가졌는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십시오. 제가 요즘 기도하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럼 이 교회도 한 교회가 천 교회를 도와야 되지 않겠는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야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되는구나.’라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이 교회가 천 교회를 도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데, 기도만 하지말고 그렇게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만 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에 결정을 했습니다. 물론 교회는 조직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하니 의사결정을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제 마음에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내년부터 이 교회가 천 곳을 돕도록 마음에 결정을 했습니다.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별 것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주력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줄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이미 결정을 했습니다. 교인들에게 한 사람이 천 명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했으면 교회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한 교회가 천 교회를 도와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내년부터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올 연말에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십시오. 당연할 것입니다.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 한 구절을 붙잡으면 이렇게 달라지는 구나.’ 성경 한 구절을 붙잡으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좇으리니”라는 말씀 한 구절을 붙잡으니 당장 이 교회가 내년부터 천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이룰 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에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어려운 것입니다. 별 거 아니라하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린 말씀 중에, 교회 15년 다니면서 교회가 어렵다는 말 한 마디라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15년간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렵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렵다고 느껴본 적도 없는데 어렵다고 말 할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항상 기쁘고 감사하고 모든 일이 잘 될 뿐입니다.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보지 않으면 어려움이 아닌 것입니다.

이 교회가 처음 지어졌을 때 선교사님을 세 분 도왔습니다. 그 다음에 두 분 더해서 다섯 분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3년 되었을 때 두 분 더해서 일곱 분쯤 도울까 생각하며 기도를 했는데 ‘째째하게 살지 말자. 이러다 평생 이렇게만 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교가정을 보니 서른 네 가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는 지금 상황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개척교회이고 규모도 달랐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또 보니 칠 팔십 가정 거의 백 가정 정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 가정을 다 도왔습니다. 그러니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지내온 것도 있지만 그러다 어떤 비약적인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 순간 넓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한 순간에 마음을 넓히는 것이 용기입니다. 마음에 용기를 가지고 삶의 지경을 달려갈 때 우리에게 큰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두려운 일도 없고 힘든 일도 없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그냥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가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큰일났습니다.”라는 말을 하면 무조건 제게 혼납니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는데 무슨 큰일이 나겠습니까. 우리 삶에 큰일은 없습니다. 다만 처리해 나갈 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연한 일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용기를 가지고 당연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의 이러저러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 주의 역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은 용기를 가지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여러분 용기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용기있게 달려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앞에 골리앗과 같은 장대한 장안이 서있을 때 오히려 우리는 용기있게 달려가서 우리의 물매를 날릴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주의 용기가 함께 하셔서 어떠한 일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백성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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