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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 강해(1) - “아버지여 !”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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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장 9-13절)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요약하면 주기도문으로 압축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기도문을 실천한 삶입니다. 그래서 2세기 교부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은 ‘모든 복음의 요약이요, 기도중의 정수, 기도를 가르치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주기도문은 ‘기도의 알파벳’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은 기도하는 만큼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기도의 위기입니다. 첫째는 기도의 시간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철야 기도는 점점 사라지고, 기도의 목소리는 낮아지고 있습니다. 70,80년대 유명했던 기도원들은 이제 그 뜨거움을 잃고 있습니다. 기도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 잘되는 곳보다, 콘도식의 시설이 좋은 곳을 선호합니다. 한국교회 성장의 정체는 기도 소리가 잦아지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기도의 절대량이 부족합니다. 기도는 그릇과 같습니다. 절대량이 채워져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의 분량보다 더 문제되는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는 ‘무엇을 주십시오’ 하는 식의 기복적인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기의 생각이나 욕심에 대한 간구가 그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자 기도의 내용이 바뀝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것이 기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기복적인 기도와 주님의 기도의 결정적이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복적인 기도만 계속하면 아무리 오래 또 소리 높여 기도했을지라도 우리 인격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스개 소리로 ‘주기도’는 ‘죽이는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주기도문 연속강해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하는 자세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기도문은 예배 순서에 의례적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형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를 배운다면 우리의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 인격이 더 깊고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부름의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까지 입니다. 둘째 부분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나라이 임하옵시며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하나님의 뜻을 위한 간구가 세 가지입니다. 셋째 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로 우리를 위한 간구 네 개입니다. 마지막으로 송영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

첫 부름의 말은 헬라어 원문 순서는 ‘파테르 / 헤몬 /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곧 “아버지여, 우리, 하늘에 계신”의 순서입니다. 저는 이 순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기도의 목표지점도 ‘아버지’되신 하나님과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이 우주를 만드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거룩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이 감격을 알고 있습니까? 지구라는 이 행성도 얼마나 큽니까? 지구라는 땅 덩어리에 사는 우리는 정말 개미만도 못한 존재들인데 이 우주와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그래서 고대인들은 자신과는 전적으로 다른 신이라는 존재와 가까이 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기도로 신을 부르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했습니다. 예컨대 고대 바벨론에서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굉장히 장황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왕이신 ‘샤마스’여, 공평과 정의의 주이시며, 아누나키의 주이시요, 이기기의 주이시여, 약속을 폐하지 않으시며, 명령을 변하지 않으시는 주이시여!” 이것이 곧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은 말이 많은 기도입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에게 아첨하는 말을 해야 신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 시간에 시편을 연속해서 묵상합니다. 그런데 다윗이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부를 때 복잡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예, 시54,55,56,57,59)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이 한마디면 족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잖아요. “아버지!” “주여!” 로 충분합니다. 왜 말이 길어지나요. 친하지 않으니까, 거리감이 느껴지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요. 친한 사이면 서론이 필요 없어요. “네가 어찌 그럴 수 있어!” 이 한마디면 족합니다. 자녀가 아버지 한테 무언가 부탁하러 가서 “아빠, 나 이것 좀 사줘?” 하면 됐지, “연봉이 많으시고, 잘 생기시고, 남자다운 기상과 대범함을 지니신 우리 아버지시여!”하고 나오면 되겠습니까? 당장 “얘가 미쳤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제 옛 이스라엘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워 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는 “아버지여!” 입니다. 사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는 제3계명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중 ‘여호와’라는 단어만 나오면 이 단어를 ‘아도나이’ 곧 ‘나의 주님’으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는 법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히브리어는 자음만 표기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여호와’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음가는 ‘야훼’가 맞습니다. ‘할렐루/야’(야훼를 찬양하라)의 발음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공동번역과 순복음교회만 하나님을 ‘야훼, 야웨’라고 제대로 발음하는 형편입니다.

우주보다 높고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도 성이 안 차셨던지 아버지를 “아바”라 부르셨습니다. 아바는 우리 말로 ‘아빠’ 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는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이만큼 친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그 권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면 염려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부자 아버지를 모시고 삽니다. 아버지가 부자면 자녀도 부자입니다. 그렇다면 제발 거지같이 비굴하게 살지 마십시오. 또 안절부절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산상수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1-32)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아빠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는 든든합니다. 비록 큰 아이가 건들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빠의 손을 잡고도 못 믿어서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아빠를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바로 앞에 있는 6장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저희(이방인)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8) 사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지금 자녀가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걸 모른다면 부모가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나 아줌마라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기도할 필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더라도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릇이 안 되니까 기도를 통해서 그릇을 다지라는 뜻입니다. 기도 없이 덜커덕 선물을 주면 그 선물에 대한 감사를 모르고, 또 그 선물이 우리를 망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물질의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물질을 부어주시고, 지도자의 그릇이 되어야 지도자의 자리를 허락해 주십니다.

또 어느 때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 기도를 응답해주면 오히려 해가 될 때입니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칼을 달라고 하면 부모는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여!”하고 부르짖을 때 모든 기도는 이미 응답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목표, 아버지와의 연합

우리가 기도를 “아버지여!” 하고 시작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 기도의 목표지점이기도 합니다. 기도란 것은 무어냐 하면 ‘정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구나’ 하고 확인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 응답받았다고 합니까? 우리 마음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아(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이 감동처럼 느껴질 때 그때 우리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하나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하며 기도가 절정에 달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퍽퍽 한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 아저씨’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심을 다해서 찬송하거나 기도의 깊은 데로 들어가다 보면 하나님이 타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분, 나와 하나된 하나님으로 느껴질 때가 바로 기도의 정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부르실 때 절대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무려 117번이나 ‘아버지’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장면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예수님께서 목표로 하는 것은 대가족주의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거하는 대가족입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연합의 신비를 기도 가운데서 체험합니다.

교회 수도원이 생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3-5세기에 이집트 사막에는 수많은 수도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사막의 수도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의 유혹을 끊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한창 번성할 때는 그 숫자가 3만 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곳에 성 조지 수도원이라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동굴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높은 동굴 속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도만 하였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예수님과의 연합이었습니다.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에서도 영성의 대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그러하듯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 된 경지에 이릅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모든 욕심이 죽고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보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가 죽고 하나님의 넓으심처럼 세상을 포용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런 연합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자기 용건만 간단히 아뢰고 나오는 피상적 만남에 그칩니다. 기도는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인격의 목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또한 우리 인격의 목표를 밝혀 줍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매일 같이 아버지를 부르는데 우리 인격이 마냥 그 아버지를 닮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김동인 씨가 쓴 『발가락이 닮았네』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M이라는 사람이 소설의 주인공인데, 이 사람은 젊은 시절 방탕하게 지내다 그만 성병에 걸려 생식기능을 잃고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아내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든 그 아이를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자기를 닮은 데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이 아이의 발가락을 만지다 기뻐합니다. 바로 발가락이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가운데 발가락이 다른 발가락에 비해 유난히 길었는데 6개월도 안 된 그 간난 아이의 발가락이 자기를 닮았던 것입니다.

이는 소설에 불과하지만 하늘나라에 갔을 때 우리에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멀리서 보고서도 내 자녀가 오는구나하고 알아 봐야지, 나 닮은 곳이 어디 있나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마지못해 천국에 맞아들여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크신 분인 것처럼 우리 마음도 커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리이신 것처럼 우리도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오래 기도하고도 우리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얼굴도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부부도 서로 사랑하다보면 닮습니다. 놀라운 것은 입양한 자녀도 정을 주고 기르면 닮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얼굴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얼굴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얼굴에 담긴 평화, 기쁨 때문에 세상에서 ‘아 저 사람은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드러나야 합니다. 링컨은 40대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40이전까지는 부모의 유전이 얼굴을 만듭니다. 그러나 40 이후는 자기가 만든 얼굴입니다. 신앙인의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분께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하나님을 닮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첫 부름의 말인 “아버지여!” 이런 한 단어이지만 이처럼 우리 기도와 인격의 시작과 목표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우리 기도가 깊어지고, 모두 하나님을 닮은 존귀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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